통 속의 뇌
Brain in a Vat 缸中之脑
꿈속에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까? 물을 수 없다. 반대로 현실에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까? 물을 수 있다. 질문을 바꾸어 통 속에 생각하는 뇌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통 속의 뇌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까? 꿈과 마찬가지로 통 속의 뇌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다. 심리철학자 퍼트남(H. Putnam, 1926~2016)이 제기한 이 문제의 결론은 ‘인간은 통 속의 뇌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통 속의 뇌는 퍼트남이 마음의 가상과 외부의 실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제기한 사고실험이다. 하르만(G. Harman)의 생각을 발전시킨 퍼트남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해보았다.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사람의 뇌를 제거하여 뇌 기능이 유지되는 통 속에 넣었다. 과학자는 그 뇌를 컴퓨터와 연결한 다음 전기 자극을 주면서 뇌가 여러 가지 지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통 속의 뇌는 사람의 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자극을 받으면 현실과 똑같은 지각을 할 수 있을까? 그 지각이 현실과 같다면, 통 속의 뇌는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퍼트남의 답은 ‘아니다’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퍼트남이 근거한 이론은 ‘가상과 실재에서 상호 인과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과 ‘실재는 마음 바깥에 있다’는 의미 외재주의다. 사실 이 문제는 ‘실재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의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바꾼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정립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현실에 실재하는 모든 것은 가상일 수 있다고 가정한 다음 마음이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저 유명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생각하는 자아(ego)를 토대로 인간의 주체를 확립하고 그 자아로 세상을 인식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마음의 표상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간은 마음 외부의 실재를 직접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주어진 심상(image)을 간접 인지할 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극장으로 불리는 마음의 표상주의다. 퍼트남이 표상주의를 부정하고 현실은 모두 실재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통 속의 뇌다. 그리고 퍼트남은 (통 속의 뇌처럼) ‘현실이 아닌 것은 현실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실의 실재는 분명한 실재이고 통 속의 뇌가 지각하는 가상은 실재가 아니다. 이런 퍼트남의 태도는 소박실재론과 직접실재론을 현실에 접목한 자연적 실재론(Natural Realism)이다. 퍼트남은 [이성, 진리, 역사]에서 현실과 자연이 실재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만약 내가 외부세계의 실재를 알고 있다면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외부세계의 실재를 모른다.’
퍼트남은 후건부정으로 ‘나는 외부세계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실재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으로 밝혀진다는 언어철학의 이론을 인용한 것이다. 한편 표현의 의미는 그 표현이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지시의미론(referential semantics)에서 지시의 대상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것은 통’으로 지시/표현하는 대상은 곧 의미를 가진 실재다. 그렇다면 통 속의 뇌는 ‘나는 통 속의 뇌인가?’라고 통을 지시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없다. 이 문제를 꿈으로 생각해보자. 현실에서는 꿈(비현실)을 지시할 수 있지만 꿈에서는 현실을 지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현실은 상위층위이기 때문에 하위층위의 꿈을 지시할 수 있지만(인과적 제약이 가능하지만), 하위층위인 꿈에서는 상위층위인 현실을 지시할 수 없다. 따라서 ‘(통 속에서) 나는 통 속의 뇌인가?’, ‘(꿈속에서) 나는 꿈속에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퍼트남은 (통 속의 뇌처럼)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논박은 성립하지 않음을 밝혔다. 즉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퍼트남이 비판하는 것은 표상주의와 마음 외부의 실재를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이고, 퍼트남이 옹호하는 것은 현실의 실재를 인정하는 실재론이다. 퍼트남은 쌍둥이 지구 가설을 이용하여 지시와 대상의 관계를 기능으로 설명한다. 지구에서는 물을 H2O로 쓰지만 쌍둥이 지구에서는 XYZ로 쓴다고 하더라도 지시 대상은 같은 물이다. 지시하는 언어의 의미는 실제 사용의 맥락 즉 기능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것은 퍼트남이 프레게(G. Frege)를 인용한 ‘개념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언어철학의 사고실험이다. 여러 가지 비판이 있지만, 통 속의 뇌는 장자의 호접지몽, 힌두철학의 마야환영, 데카르트의 악마, 영화 매트릭스(Matrix)처럼 현실의 실재와 가상의 실재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 의미가 있다.(개신학사 김승환)
*참고문헌 Hilary Putnam, Reason, Truth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참조 <관념론>, <데카르트의 악마>, <리얼리즘/실재론[철학]>, <마야 환영>, <소박실재론⦁직접실재론>, <실재의 사막>, <심신이원론>, <심신일원론[스피노자]>, <이성>, <인식론>, <존재론>, <지각>, <표상>, <현상>, <호접지몽>, <회의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