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에 의해 삼국시대가 끝난 이후 중국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에 대한 역사를 다룬 내용이 적어 일본쪽 웹사이트를 검색해 이렇게 직역해 올려봅니다. 이것에 나오는 내용이나 그림은 전부다 일본 웹사이트에서 발췌한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80년시대 세력판도
조조, 손권, 유비가 활약했던 삼국시대는 유명하다. 수나라, 당나라의 시대도 중국을 통일한 왕조로써 많은 내용이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던 5호 16국부터 남북조시대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그것을 조명해 보겠다.
삼국시대는 최종적으로 사마염(司馬炎)의 진(晋)왕조에 의해 280년 중국전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이후 진나라 황족인 여러 왕이 서로 권력을 둘러싼 항쟁을 벌여 여기에서 비롯된 <8왕의 난(291~306년)>이 계속되었다. 8왕의 난이 계속되던 시기 화북의 땅에 이주한 이민족들을 통틀어 [5호]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8왕의 난에서 활약해 그 여세를 몰아 각지에서 봉기했다.
5호는 일반적으로 몽골계의 흉노(匈奴), 갈(갈), 투르크계의 선비(鮮卑), 티베트계의 저(저),강(羌)등의 5개의 민족을 가리킨다.
화북을 중심으로 23개이상의 단명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그중에 대표적인 16개국을 기초로하여 이 시대를 [5호 16국시대]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5호도 16국도 숫자로써는 아무 의미는 없다. 이것은 후세에 의해 정해진것일뿐 그당시 사료에 의존해 분류된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은 그저 이민족들의 총칭인것이다.
5호 16국시대 (1)
327년 세력판도
진왕조 내부의 황족끼리의 내분으로 혼란이 격화되던 시기에 이것을 예견하고 난을 피해 벌리 변경지인 양주(凉州)로 부임하기을 희망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자가 바로 장궤(張軌)였다.
301년 1월 장궤는 양주자사가 되어 중앙의 혼란을 피해 변경인 양주에서 위세을 떨치며 사실상의 독립체제을 갖추게 되었다. 이 나라가 후에 전량(前凉)이 되었다. 양주에서는 반란과 도적이 많았으나 장궤는 신속하게 이를 평정하여 사회을 안정시켰다.
한편 조왕(趙王) 사마윤(司馬倫)은 쿠데타로 가황후(賈皇后)을 실각시키고 제위에 올랐으나 3월에 여러왕의 연합군이 낙양을 공격해 살해되었다. 제왕(齊王) 사마경(司馬경)이 실권을 장악했으나 그 또한 연합군에 낙양을 공격당해 살해되고 말았다. 계속하여 여러왕사이에도 분쟁이 발생해, 장사왕 (長沙王)사마애(司馬艾)가 살해당하자 결국 성도왕 사마영(司馬潁)이 실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난리에 화북에 들어와 있었던 흉노, 선비등의 이민족들은 용병으로써 참가하였다. 힘을 얻은 여러 왕들은 필사적으로 권력쟁탈에 빠져들었다. 이 이민족들이 이후 실력을 쌓으며 세력을 늘리게 되었다.
이 시기, 저족의 이특(李特)이란 사람이 관중지방의 유민(流民)을 이끌고 사천(四川)에 들어왔다. 서진(西晋)의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尙)이 유민대책에 실패했기때문에 유민들은 이특에게 의지했다. 302년 5월 여기서 이특은 자립하였으나 303년 3월에 나상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303년 11월 이특의 뒤를 이은 아들 이웅(李雄)이 나상을 공격해 성도(成都)을 함락했다.
흉노족의 유연(劉淵)은 성도왕 사마영 의 아래에서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고, 아들 유총(劉總)도 적노장군(積弩將軍)이 되었다. 이들은 문무에 뛰어났던 영웅이었다.
304년 8월 유연은 성도왕 사마영을 설득해 산서성(山西省)으로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하고, 10월에는 이석(離石)의 좌국성(左國城)을 근거지로하여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한(漢)]을 국호로 삼아 독립했다.
한편 이웅도 그해 10월 [성도왕]이라 칭하였다. 이로써 이민족이 자립을 이룬 304년을 [5호 16국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되어진다. 306년 6월 이웅은 황제가 되어 국호를 [대성(大成)] 이라고 칭하였다.
이민족이 각지에서 자립을 개시하던 시기 진왕조의 황족간의 쟁탈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10월 성도왕 사마영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의 부하에게 속아 죽음을 맞이했고, 11월에는 혜제(惠帝)가 식중독으로 죽었다. 이로써 예장왕(預章王) 사마치(司馬熾)가 즉위해 회제(懷帝)가 되었다. 12월 하간왕 사마옹(司馬邕)이 친동생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8왕의 난은 회제을 동해왕이 보좌하는 체제로써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회제는 동해왕을 싫어했기 때문에 동해왕은 낙양을 떠났다. 여기서 진왕조 내부는 2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유연의 세력은 팽창하고 있었다. 308년 10월에 황제의 자리에 앉고, 309년 1월에 평양(平陽)으로 수도를 옮겼다. 아들 유화(劉和)와 유총을 대장군, 거기장군으로 조카인 유요(劉曜)을 용양장군(龍讓將軍)에 임명했다. 310년 6월에 유연이 죽자, 유화가 즉위하였으나 인망이 없어 7월에 유총이 쿠데타을 일으켜 유화을 살해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311년 3월 진왕조 절반의 주인이었던 동해왕이 사망했다. 6월 유총은 석륵(石勒)에게 명령을 내려 동해왕의 장례을 습격시켰다. 그래서 왕행(王荇)의 일행 십수만의 대부대을 일방적으로 분쇄했다. 계속해서 유총은 진나라의 남은 절반을 공격하기 위해 전군대장군(前軍大將軍) 호연안(呼延晏)에게 2만 7천의 병력을 주어 선봉으로 삼았다. 진나라군은 이 선봉대에게 12연패을 당해 3만여의 전사자가 나왔다. 뒤이어 후속으로 왕미(王彌)의 부대와 유요의 부대가 도착해 회제을 생포하여 평양으로 보내었다.
313년 유총은 회제을 살해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안에 있던 회제의 조카 사마업(司馬業)이 즉위하여 민제(愍帝)가 되었다. 그러나 316년 유요에게 공격당해 그도 평양으로 보내졌다가 살해되고만다.
318년 3월 8왕의 난을 피해 건업(建業)으로 도망쳤던 사마예(司馬睿)에게 민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정식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원제(元帝)였다. 수도인 건업은 민제의 본명인 업의 글자를 피해 건강(建康)으로 고쳤다. 일반적으로 낙양, 장안을 수도로 했던 진왕조을 [서진(西晋)], 이 이후을 [동진(東晋)]으로 불러서 구별한다.
한편 한나라 정권에서는 318년 7월 유총이 사망해 아들 유찬(劉粲)이 즉위하였으나, 8월에 외척인 근준(革+斤 準)이 유찬이하 유씨일족을 살해하고 한천왕(漢天王)을 자칭했다.
그러나 10월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유요는 포판(蒲阪)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12월에 근준을 멸망시켰다.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趙)]로 바꾸고 수도을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이 나라가 전조(前趙)이다.
이 혼란중에 동쪽에서 세력을 쌓았던 석륵은 319년 11월에 양국(襄國)을 거점으로 [조왕(趙王)]이라 자칭하며 독립했다. 이 나라는 유요의 전조와 구별하기 위해 후조(後趙)라고 불리었다. 그 시기 선비족의 모용부족(慕容部族)은 요서(遼西), 요동(遼東)에 걸쳐 지배권을 확립했다.
전조가 관중경영을 진행해 나가던중 전량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양국은 황하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그 시기 전량의 지배자는 장준(長駿)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때문에 전조와 후조와의 대립은 후조가 우세한 상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양국은 낙양을 두고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328년 12월 후조의 석호에게 대패해 유요도 살해당했다. 329년 9월에 유요의 태자도 석호에게 살해당하자 전조는 멸망하게 된다. 그 사이 전량의 장준은 황하남쪽의 적도(狄道)까지 진출해 후조와 국경을 마주보게 되었다.
화북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게된 석륵은 330년 2월 [조천왕(趙天王)]을 칭하고 9월에는 황제에 즉위했다. 333년 7월 석륵은 병사했고, 둘째 아들 석홍(石弘)이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334년 4월 성에서는 이웅이 사망했다. 그 때문에 제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해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