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려고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허직(명예직) 임명장이며, 공명(空名)이란 “받는 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이란 뜻이며, 첩(帖)은 사령장 또는 임명장을 뜻한다.
여기에는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 양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 등이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중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공을 세우거나 납속한 자에게 발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후 복구와 흉년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서 계속 실시했다. 특히 현종대에는 곡식을 거두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이때부터는 공명첩의 가격이 더욱 싸졌을 뿐 아니라 평민층·천민층에게 주어지던 벼슬의 제한도 대폭 완화되었다. 숙종년간에도 여러 차례 발행하였는데, 1690년(숙종 16)의 경우 각종 공명첩 2만 장을 8도 전역에 나눠주어 팔게 할 정도였으며 영조대에도 발행하였다. 이전에는 전란이나 흉년에 비상수단으로 발급하였으나, 이때는 풍년이 든 해에도 흉년을 대비해 곡식을 축적하기 위한 조처로서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공명첩 발급은 그뒤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공명첩의 발급은 재정이 궁핍했던 조선정부가 신분이 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양반이 되기를 갈망하는 농민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공명첩에는 받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공으로 받은 것인지 기록해놓지도 않았으며, 특히 관직과 산계를 주는 공명고신첩의 경우 실제의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허직일 뿐이었다. 이 공명첩은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명첩을 사는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 되며, 이를 점차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신분·호구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존재한 호적대장 등에 납속가선이니 납속통정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납속'의 문구는 붙이지도 않고 가선이니 통정이니 하는 직함만 표시하여 사실상 납속이란 단서를 없애버렸다. 이에 정부는 그러한 위법행위를 하는 자를 무거운 죄로 다스릴 것을 규정하였지만, 지방 말단관리들의 운영 문란으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납속수직자라 하더라도 실직자나 마찬가지로 양반행세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