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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주차 숙제
1.
- 정약용에 대한 개인적 존경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여년이나 앞서 실학자 정약용(세례자요한)이 고안해 만든 ‘배다리’는 현대 군대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교’의 원리를 적용했던 실로 놀랄만한 기술이었던 것 같다.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또한 놀랄만한 발명품으로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된다. 정약용을 너무나 아꼈기에 항상 등용하여 중요한 나랏일을 맡기고 싶어했던 정조마저도 정약용이 당쟁의 희생양이 되는 현실을 막을 수는 없었기에 그의 위대한 능력을 활용하지 못한 조선의 국가적 손실이 너무 안타깝고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민이 애틋하기만 하다.
- 고종의 동도서기론 지지 입장
고종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9월 16일 전국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를 모두 뽑아버리라는 명을 내리면서 개화 정책을 지지하는 윤음(綸音)을 공포하였다. 김윤식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윤음에서 고종은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의 방법을 따르면 사도(邪道)에 물든 것으로 보는데, 이 또한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교(敎)는 사악하므로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미색(美色)처럼 멀리해야 하지만, 그들의 기(器)는 이로워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니 농기구·의약·병기·배·수레와 같은 것을 제조하는 데 무엇을 꺼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교(敎)는 배척하고, 기(器)는 본받는 것을 병행하여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동도서기론을 뒷받침하였다. – 인터넷 자료 색인 참고함 -
- 영상자료 중
자료 중 천당과 지옥을 암시하는 그림이 매우 인상적….
2.
당시 지식인들의 수준 높은 학문적 지식과 사상,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열망,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서양 문물에 대한 놀라움 등이 외국인 천주교 사제들을 통해 그것들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증대되었고(물론 처음에는 학문적 입장이기는 했겠지만), 이는 자의적으로 천주교(서학)를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본다. 단지 사색당쟁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수많은 박해와 고초를 당하면서 그 싹이 제대로 트지 못한 채 한 많은 시간을 피로 물들인 후에야 이 땅에 천주교의 꽃이 피게 된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어찌 보면 더 진한 꽃망울을 틔우기 위한 자양분의 피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며, 그 수많은 순교와 희생의 목숨들이 바로 이 땅에 천주교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설립한 신앙 선조들의 명백한 증언이자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3.
소백산에서 은둔하며 천주교의 가르침으로 수도생활을 했던 신앙실천운동의 선구자 홍유한, ‘이색 학문’으로서 천주교 연구를 위해 자발적 모임을 가졌던 강학회 참석자들 – 이벽, 이승훈, 김범우,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 은 스스로 영세식을 갖고 세례를 받은 후 정기적인 기도와 학습을 진행하였기에 창립 선조임을 거부할 수 없다고 봄 (천진암에서는 창립 선조 5위를 ‘이벽, 정약종,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으로 말하고 있음)
4.
- 앵베르 :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기해박해 때 순교. 1838년 서울로 잠입, 동료 신부들과 힘을 모아 가톨릭의 전도와 교세확장에 힘써 오던 중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수원에서 체포되어 한강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당시의 신도들에 관한 전기를 모으다가 한양교우회장(漢陽敎友會長) 현석문(玄錫文)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58년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이다.
- 페레올 :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김대건 신부 임명. 김대건과 같이 서울에 잠입하여 우리 말을 배우며 전도에 힘쓰던 중 1846년 김대건이 순교할 때 몸을 피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 뒤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하여 신부가 된 최양업(崔良業)이 1849년 입국에 성공하자 그와 더불어 교세 만회의 기반을 담았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병사했다.
- 베르뇌 :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 1856년에 조선에 입국 후 그 후 10년 동안 조선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 하였는데, 베론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한양에 2 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등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박해받는 교회인 조선 천주교회의 특수성에 비추어 베르네 주교에게는 교황청의 비준 없이도 사제 서품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는 뮈텔 주교, 리델 신부 등과 함께 천주교의 세력을 넓혀, 고종이 즉위하기까지에는 신도수가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왕실 안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로 1866년 2월 23일에 한양에서 체포되었고, 3월7일에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도리 신부 그리고 볼리외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은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는 구실이 되었다. 물론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넓히려는 제국주의였다. 그가 순교한 후 그의 전기가 프랑스에서 발간되었다.
- 다블뤼 :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의 황산포로 조선에 입국. 1856년에는 충청도 제천(堤川)의 배론[舟論]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으며, 1859년에는 조선교회의 순교자 150여 명의 자료를 수집 ·기록하여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어, 이것을 《다블뤼의 비망록(備忘錄)》이라는 제목으로 간행케 했다.
교구장으로 임명된 3일 후인 11일 충청도 보령 내포(內浦)에서 체포, 고문 끝에 3월 30일 참수.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 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 저서에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역서에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가 있다.
- 리델 : 조선교구 제6 대 교구장. 1860년 7월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1년 랑드르 신부, 조안노 신부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해 충청도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 살아남아 청나라로 탈출했다. 7월 6일 추푸 항에 도착,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피에르 로즈 제독이 톈진에 주재하고 있자 한국 가톨릭 교회의 실정과 프랑스인 신부들의 순교 소식을 전한다. 살아남은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의 보호를 위해 프랑스 함대 출항을 요청했다. 이에 피에르 로즈가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격한 주력 함대가 귀환하는 대로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고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승선해 길 안내를 하면서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1869년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주교로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877년에 조선에 입국했지만 7개월 만에 체포되면서 감옥에 갇혔다. 이때 자신의 수감 생활과 회고록을 담은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을 저술했다. 이후 청나라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만주로 추방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불자전, 한어 문전 등을 저술해 1880년 나가사키에서 간행했다가 1884년에 선종했다. 2년 후인 1886년에 조불 수호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 블랑 : 조선교구 제 7대 교구장. 1876년(고종13) 다른 2명의 프랑스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전교활동을 벌였다. 다음 해 리델 신부도 입국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다시 심해지면서 리델 신부 등과 함께 체포 투옥되었다가, 본국 정부의 항의로 석방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천주교 탄압이 완화된 1884년 6월, 주교로 승품되면서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재입국하였다. 부임 초 신부양성을 위하여 21명의 조선 학생들을 남양의 비낭섬[島] 신학교(神學校)에 파견하였으며, 성서보급을 위하여 출판사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에 조선에는 22명의 프랑스 신부와 7개소의 성당, 1만 7500여 명의 신자가 있게 되었다.
- 뮈텔 : 조선교구 제 8대 교구장.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용산예수성심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독일 성 베네딕토회에 조선 진출을 요청하여, 1909년 베네딕토회 독일인 신부들과수사들이 서울 백동(現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게 했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도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뮈텔 본인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엄히 처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감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 받는다. 그러나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한국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자신이 사목을 책임져야 할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인종차별 의식까지 가졌을 뿐 아니라 교회법까지 무시하며 독립 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교회법을 무시한 월권 행위들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또한 뮈텔 대주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주교들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등장 전까지 서울 대교구장을 맡게 되면서, 1960년대 후반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는 주교 개인의 정치적 활동은 넘쳐났지만 한국 천주교의 사회 참여 활동은 억제되었다.
◈ 친일 활동 및 행적
-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 니콜라 발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안중근 의사와도 잘 알고 지냈으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니콜라 빌렘 신부의 장상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 받자 순국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했고 일본인 관리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이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집전을 요청했으나, 뮈텔은 "안중근 토마스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사촌 안명근 야고보가 뮈텔을 찾아와 다시 부탁했으나 그걸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기에는 "안명근 야고보가 아주 무례했다” 면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조건을 내걸면서 병자성사나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리는 물론 교회법으로도 잘못된 행위이며, 주교에게 그럴 종교적 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정치적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성사를 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면서 2개월간 성사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 금지령을 해제했다. 뮈텔 주교의 성사 금지령을 교황청이 직권으로 취소시킨 것.
또한 당시 빌렘 신부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뮈텔 주교가 교회법과 교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뮈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순국한 후 자신의 일기에,
“토마스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라고 적었다.
민족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사제로서 매우 의문이 드는 발언이다. 또한 그는 이전부터 안중근 의사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그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그런 흉악한 자가 천주교 신자일 리가 없다"는 주장까지 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신토식 장례에 선교 사제 3명을 데리고 참여하거나, 수녀들이 만든 조문 화환을 전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에 잘 보여서 교세 확장에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 천주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뮈텔의 이런 태도는, 이후 천주교 내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십 년에 걸쳐 암묵적인 배교자 취급을 당하며 묻히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현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안중근 의사를 평가하며 추도 미사를 집전하고 그를 살인자로 매도한 천주교의 과오를 공식 사죄한 것은 겨우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 대학 설립 방해
: 사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의 대립은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민중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다. 이 대학은 일반 교육은 물론 천주교 신앙도 함께 가르치려는 것이었기에, 천주교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민 주교[7]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 <안응칠 역사>
그러나 뮈텔과 그를 추종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 계획을 반대했는데, 이유는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하면 천주교를 믿는 데에 소홀해진다는 것이었다. 무식해야 잘 믿지! 쉽게
말하면 학문을 익히면 자신만의 논리와 생각이 생겨서 열심을 갖고 신앙 생활을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인에게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뮈텔의 사고 방식에 큰 충격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후 외국인을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반드시 필요한 프랑스어공부를 그만두었으며, 주변에도 "외국어를 익히면 외세의 종이 되기 쉽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믿었던 뮈텔 주교에게 배신당한 안중근 의사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조정래 선생이 쓴 안중근 전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독립운동 밀고
: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모두 주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그 사촌이던 안명근 야고보 의사 또한 독립 운동에 투신했는데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와 관련이 있었고 당시 일본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 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 계획을 털어 놓았다. 빌렘 신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것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빌렘 신부로서는 중대한 일이 라고 생각하여 일단 자기 장상인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말을 전해들은 뮈텔은 당시 날씨가 매우 안 좋았는데도 서둘러서 일본 헌병대에 밀고를
했다. 그는 이 날이 1911년 1월 11일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 밀고로 인해 교과서에도
기록된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는 일망타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수사와 관련해서 뮈텔과
헌병대는 긴밀하게 의논하며 협조했다는 사실이 뮈텔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대가로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히고 총독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 3∙1 운동 방해
: 1919년. 3.1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가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뮈텔은,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라고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 이처럼 뮈텔은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서운 폭도처럼 묘사하고 독립군들을 산적과 강도라고 주장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퇴학시켰다.
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던 조치는 다른 교구의 외국인 주교나 신부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대구 대목구의 초대 감목이었던 프랑스인 플로리아노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서도 드러난다.
- 우월 의식과 조선인 차별
: <안응칠 역사>에 나오듯이 조선인의 교육을 방해하고 우매하게 만들어 가톨릭 교리만
가르치려고 노력하던 뮈텔은,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여겼다. 이런 우월 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인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면서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의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뮈텔의 지침 때문인지, 외국인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조선 관아에 난입해 죄수를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고 건물을
부수거나, 신자들을 거느리고 비신자나 관리들을 폭행하며 타 종교의 상징물을 부수는 등의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뮈텔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의 행태에 대해, 당시 조선인 김명제 베드로 신부가 "왜 우리들을 막 대하는가?!" 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 평가
: 이러한 행태를 보였는데도 한동안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 받았으나, 그가
남긴 일기가 번역되고 다른 사료들이 발굴, 연구되어 그가 저지른 만행과 그릇된 사고 방식이
밝혀지면서 비판 받고 있는 인물이다.
- 라리보
: 조선 교구 제9대 교구장. 1907년 사제가 되어 그 해 5월 21일 서울에 왔다. 1933년 1월23일 G.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1942년 1월 5일까지 서울교구장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 천주교회를 잘 이끌었다. 일제가
교회를 탄압하여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 · 추방하자 조선교구를 보존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 노기남 신부를
추천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서울교구장직에 오르게 하였다.
8 ·15광복이 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고아를 돌보았다. 광복 후인 1958년에는 충남 대목구 초대 교구장을 거쳐
1962년 대전교구장이 되어 주교좌(主敎座) 성당을 신축하는 등 대전교구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1965년 8월
고령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귀국하였다. 1960년, 58년 동안의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봉사와 공로가 인정되어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았다.
- 모방
: 한국 최초의 서양인 신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와 있던 그는 조선 교구의 교황 대리 초대 감독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 조선에 들어오게 되어 압록강까지 왔으나 감시가 삼엄하여 입국하지 못하고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다가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을 얻어 죽은 뒤, 그는 혼자 삿갓에 상복(喪服) 차림을 하고
압록강 얼음 위를 건너 입국했다(1835 : 헌종 1). 그 뒤 신자 정하상의 안내를 받고 1836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와 전교에 진력, 전국에 걸쳐 6천명에 달하던 신도의 수를 9천 명으로 증가시켰으며, 보다 앞서 들어와 있던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상의하여 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 세 소년을 마카오에 있는 마카오 신학교[澳門神學校]
에 유학시키는 등 조선 교구의 교세 확장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다. 이보다 1년 후인 1837년 제2대 조선 교구장
으로 임명된 앙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프랑스에서 건너와 이들과 함께 전국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분투하다
가, 1839년 왕실의 천주교 박해가 다시 혹심해져 충청도 홍주(洪州 : 홍성(洪城))에서 체포 되고 다른 2명의
프랑스 신부 및 3명의 궁녀를 포함한 2백여 신도와 함께 한강 새남터에서 처형당했다.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 샤스탕
: 프랑스의 신부. 초기 한국 천주교회 선교사. 1837년 앵베르(Imbert) 주교를 따라 서울에 잠입하여 전교 사업에 종사. 1839년(헌종 5) 조만영 일파의 척족(戚族)이 세력을 잡자 무자비하게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여 홍주목(洪州牧)에서 좌포도청 포교(左捕盜廳捕校) 홍계창과 황기륜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앵베르 주교ㆍ모방 신부ㆍ3명의 궁녀ㆍ2백여 교도와 함께 한강변 모래 사장에 있는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고 순교하였다. 1925년에 비오 11세로부터 복자로 올림을 받았다.
- 공베르 형제
: 일제강점기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형제. 형은 안토니오 공베르, 동생은 줄리앙 공베르 1900년 10월 9일 함께 한국에 입국, 1901년 금사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충청남 도 남서부 지방(부여, 논산, 청양, 예산, 홍성, 서산, 서천, 보령)의 사목을 담당하면서 1906년 4월에는 성당을
신축하고,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조국 프랑스에서 동원 명령이 내려 1915년 11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한국으로 돌아와 사목을 계속하였다. 1923년 부창동성당의 2대 신부로 부임하여 1927년 구성당 물 238.02㎡를 신축하였다. 또한 박창래 회장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밀 원장에게 사절로 보내 수녀 파견을 요청해서, 1931년 10월 20일 김베놔 수녀 외 2명이 파견됨으로써 본당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후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본당의 교세는 꾸준히 확대되어
1945년 강경 본당이 분당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수녀들의 영성을 지도하고
있던 중 1950년 7월
11일경 체포되어 납북되었으며, 11월 12일
옥사하였다.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1900년 안성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09년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자비로 운영하였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1922년 로마네스크식
벽돌 성당을 신축하였다. 1924년에는 수녀원을 신축하였으며,
1927년에는 교세의 확장으로 평택 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1921년에는 천안 공소를 개설하였으며, 1943년에는 생제 신부와
함께 성가소비녀 (현서울성가소비녀회) 회칙을 작성하였다. 서울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의 지도 신부로 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동생인 줄리앙 공베르 신부가 있던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가 1950년 7월 11일경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납북되었으며, 11월 11일 옥사하였다.
- 푸르티에 장 안투안 샤를
: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며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54년 사제 서품을 받고 프랑스 외방선교회에 소속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해 홍콩에 도착하였으나 그의 선교 장소가 조선으로 변경되어 1856년 상하이를 거쳐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해 8월 배론 성 요셉 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신학생을 지도하였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중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심한 고문과 매질을 당하였고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되어 순교하였다. 1900년 5월 2일 명동성당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 니콜라 빌렘
: 1889년 7월 1일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890년 11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어 활동. 1895년 10월에 갓등이(현 왕림) 본당의 임시 주임으로 부임. 1896년 4월에 있은 성직자 연례 피정 때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사목 분할이 결정됨에 따라 황해도는 빌렘 신부가 전담하게 됨. 이 무렵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일대에서는 빌렘 신부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황해도 지역의 유지인 안태훈(세례명 베드로) 일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종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활발한 개종 운동을 우려하던 지방관리들이 천주교 단속령을 시행하였으며, 부당한 처분으로 피해를 입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빌렘 신부는 치외법권이 있는 선교사였으므로 교회측과 관리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직접 항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그 결과 신천(信川), 장연(長淵) 등 여러 고을 주민들이 그의 편지와 명령을 받은 교인들로부터 행패를 당하였다는 고소를 관가에 제기하면서 ‘해서교안’(海西敎案)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후 교안은 점차 지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까지 천주교 신자들을 핍박하는 등 190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해서교안을 겪은 뒤에도 계속 청계동에서 활동한 빌렘 신부는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세례명 토마스)과 함께 전교 활동을 하면서 구국 교육에도 앞장 섰다. 대부분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족 운동과 독립 운동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그는 안중근으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준 빌렘 신부는 허락없이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뮈텔 주교로부터 2개월간의 성무(聖務) 정지 처분을 받았다. 안중근 일가와 관련된 사건으로 뮈텔 주교와 불화가 계속되어 1914년 본국으로 돌아 갔으며, 이후 고향 알자스에서 사목하였다.
5.
김구 선생의 젊은 시절 이름은 김창수였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이 널리 퍼졌는데, 동학 교단은 각 지방을 관리하는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소의 책임자로 접주(接主)를 두었는데, 녹두장군 전봉준 등 동학농민운동의 주도자들이 바로 접주들이었다. 당시 스물 살도 채 되지 않은 김창수도 황해도 해주에서 접주를 맡고 있었다.
1894년 당시 탐관오리의 전횡에 분노하여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으로 진주하자, 이를 우려한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진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본격적인 침략 야욕을 드러내면서 다시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이때는 전국적으로 더 크게 확산되었는데, 김창수 역시 접주로서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을 지지하는 백성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기득권을 지닌 지배층이나 나라를 생각하면서도 양반지배체제를 부정하는 동학농민군의 새로운 운동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 유생층 등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자 개화사상을 가진 안태훈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황해도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안태훈은 이를 토벌하려는 의려군을 일으켰다. '백범일지'에 묘사된 내용에 따르면, 안태훈은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한 당시 조정 대관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등 황해도 일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포수를 중심으로 의려군을 조직한 후 청소년에 불과한 안중근 의사도 동참을 시켰는데 진압군은 7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농민군을 토벌하니 각 접이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다고 한다.
안태훈은 비록 동학농민군의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물리적인 활동에 반대하였으나 나라를 위한 인재를 아끼는 마음 또한 컸던 사람이었다. 당시 안태훈 선생의 근거지인 청계동과 김창수의 주둔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는데, 그는 김창수가 해를 입는 것을 피하고 싶어 밀사를 보내어 김창수의 동학농민군이 자신을 공격하면 생명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그러면 아까운 인재를 하나 잃게 되니 이를 피하고 싶다는 뜻을 보이고, 결국 서로 간에 먼저 공격을 하지 말 것이며, 어려움에 빠지면 도와주기로 밀약을 맺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김창수는 안태훈 선생에게 잠시 의탁한다. 안태훈 선생은 김창수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까지 모셔 오게 하였다. 훗날 <백범일지>에서는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 5개월이었지만, 그 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라고 적을 정도로 이때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다.
당시 안중근은 15세로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하였는데,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를 겨냥하면 놓치는 법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안태훈 선생은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창수는 안태훈의 집에 머물면서 인근의 선비 고능선을 알고 교류하였는데, 그는 의병장 유인석과 동문인 유학자로서 김창수를 손자처럼 아꼈다. 백범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풍미하던 동학사상,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을 두루 접하는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된다.
얼마 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고능선과 김창수는 여기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킬 뜻을 보이지만, 개화파에 속하면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안태훈 선생은 단발에 동의하였기에 의병을 일으키는 데는 반대하였고, 얼마 후 김창수는 청계동을 떠난다. 이때는 안태훈 선생과 생각이 달랐지만, 이후 다른 문물을 접하면서 김창수도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으로 생각이 변하고, 안태훈 선생의 생각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안태훈 선생을 찾아 사과할 생각도 하였으나, 다시 만나진 못하였다.
천주교에 입문한 김창수는 황해도 장련군, 문화군, 안악군 등등으로 이주하면서 근대교육 보급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하기강습회를 개최하는 한편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는 등 신민회 지회 조직에 노력했다. 이러한 경험은 백범 선생이 민족지도자로서 거듭날 수 있었던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1909년 재령 보강학교 교장으로 교육운동에 종사하던 중 경찰에 구금당한다. 얼마 후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청계동에서 안중근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것 때문에 연좌 당한 것이었다. 김창수는 감옥에 수감 당해 조사를 받으나 곧 불기소로 방면된다.
< 김구 선생과 뜻을 같이 한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선생>
김창수는 1913년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려 그의
집안과 인연을 이어 간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며 황해도 신천에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일어난 안악사건의 주도자인 안명근과 교류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안공근을 가까이 한다.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는데도 적극 관여하였다. 단원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고,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는 등 친형 안중근의 뜻을 이어 간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하기 전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그의 차남 안낙생이 자기 집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 당시 일제 밀정의 보고서에서도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대부분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라 할 정도로 김구와 안공근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임시정부를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옮겼다가 중일전쟁으로 난징도 위험해져서 충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김구는 안공근을 상하이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안공근은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을 우선 모셔온다. 김구는 다시 안공근을 상하이로 보내어 안중근의 아내를 데려오게 하였으나, 상하이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전황이 좋지 못하여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만을 데리고 돌아온다. 김구는 안공근이 안중근의 아내를 끝내 데려오지 못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책망하고 끝내 결별하게 됩니다.
광복 후 김구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송환한 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안장할 자리를 남기고 삼의사의 유해를 안장한다. 그리고 장제스의 도움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이미 뤼순감옥 일대가 개발되어 흔적을 찾기 힘든데다가 김구가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당하고, 장제스의 국민당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끝내 찾진 못하였다.
[출처]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분의 이야기 (이달의 독립운동가 - 독립운동가 및 전쟁영웅) |작성자 독립영웅
* 4번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동안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제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하면서 답을 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내용들이 다소 있더라도 이해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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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산발적으로만 알고있었던 그리고 모르고있던 여러가지사실을 잘
요약해주시어 너무 잘보고 이해했읍니다.감사합니다.
엄청난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정진하십시오.
대단한 정보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를 더한다면 초대 조선 대목구 브뤼기에르 주교의 역활이 조선에서의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속적인 활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조선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자진해서 시암에서 조선으로 오는과정은 복음의 선교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앵베르주교로 이어지며 파리외방의 조선 선교는 지속되며, 어떻게 보면 정하상 유진길이 교황님께 보낸 서한(1824)의 좋은 결과로 보여집니다. 단 8대 교구장인 뮈텔주교는 초임신부시절 1882년 82위 가경자 시복재판관으로 시복추진을 맡아 조선에 입국했으며 1890년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된후 조선교회보호라는 이유로 친일
식민정책에 적극 동조한 행위는 조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서양 프랑스인이라 당시 대국의 식민정책을 당연시 하는 걸로 이해할수도 있을것 같고 (베트남/아프리카 국가들)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선교사의 길을 오래하지못해서 조선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수도 있었을것 같습니다. 하옇든 결과론적인 글이지만 당시 조선인은 많이 실망하였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