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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안개와 함께한 4남자의 지리산 산행기
1. 일자 :
2. 장소 : 지리산 (백무동-장터목-천왕봉-중산리)
3. 행로 및 시간
[동서울 터미널(24:00) -> 백무동(03:30) -> (참샘 산방) -> 탐방안내소(04:45) ->
하동바위(900m / 05:40) -> 참샘(1123m / 06:25) -> 소지봉(1312m / 06:50) -> 망바위
(1460m / 07:55) -> (휴식) -> 제석단(08:35) -> 장터목산장(1750m / 09:00) ->
(1808m, 09:35) -> (식사,휴식) -> 통천문(1814m / 10:40) -> 천왕봉(1915m, 11:05) ->
(휴식) -> 천왕샘(11:35) -> 개선문(12:00) -> 법계사(12:35) -> (로터리산장) ->
순두류 안내판(2.1km / 12:50) -> 순두류 위령비(13:45) -> (법계사 버스) -> (장터목
주차장) -> 장터목 버스 터미널(14:30)]
4. 동행 : 강형, 성우, 대식
5. 뒤풀이 : 진주 남강식당
[프롤로그]
산을 본격적으로 오른 지 3년. 아직 진정한 Climber라 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늘 새로운 산을 갈구하는 마음만은 Apinist 급이다. 주말 산행을 위해 친구들을 모으고, 도상 연습만으로는 부족하여 이곳
저곳에서 고수들의 산행기를 탐독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건강을 위하여 적극 권장하던 집사람도
이제는 나의 도가 넘는 산 사랑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허나 얼마 만에 되살아 나는 열정인데, 좀 비굴하지만 욕을 먹으면서도 내 길을 가기로 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지리산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금주 토요일에는 대식의 수업도 없고, 성우,
정보를 종합하여 오늘 지리산 산행을 시뮬레이션 해보면 5월 23일 동서울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백무동에 내리면 새벽 3시 30분,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우중 야간 산행의 위험에 대비하여 잠시 쉬었다가 5시 정도에 길을 나선다. 하동바위까지는 완만한 오르막 일 것이고 이후 참샘을 지나 소지봉까지는 된비알. 소지봉에서 일차 전열을 점검하고 망바위, 제석단을 거쳐 장터목에 이르면 얼추 9시 경이 될 것이다. 장터목에서 휴식하고 통천문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다. 천천히 올라도 10:30분 정도일 것이고, 지리산을 정기를 사진에 담고 이른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중산리 하산 길은 법계사까지는 급경사 내리막이니 주의하여 내려가고, 로터리산장에서 망바위, 칼바위를 거쳐 중산리로 하산하면 넉넉잡고 2시가 될 것이다. 예상은 이렇지만 실제는 어쩔는지 모르겠다. 자! 이제 지리의 품으로 나를 맡겨보자.
< 백무동에서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으로 : 5.8km + 1.7km >
딸내미의 커다란 걸스카웃 가방을 빌려 짐을 싸고, 10시 15분 동서울로 향한다. 늦은
저녁에도 전철에는 사람들이 많다. 모두 바쁘게들 살아 가고 있다. 지리산으로
향하는 나만의 여유가 새삼 기쁘다. 11시 25분 터미널에
도착하니 성우와 대식이 벌써 와 있다. 12시 10분 전, 타고 갈 버스에 오르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몇 없다.
선잠을 자다 깨다 반복하다 보니 차는 어느덧 덕유산 휴게소에 도착해 있다. 새벽 2시가 넘었다. 비는 왔는지도 모르게 그처 있었고, 덕유산의 밤공기는 차다. 지리산 가기 전에 들린 덕유산. 지리산 만으로도 벅찬데, 중간 경유지로서 덕유산은 과분한 느낌이다. 버스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출발한다. 창 밖의 이정표가 ‘함양 40km’을 알리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는데 벌써 함양이다. 시계를 보니 40km을 15분 만에 온 것이다. 속도가 놀라울 따름이다.
안전벨트를 다시 멘다. 이후 버스는 이름 모름 마을과 실상사 등에 몇 번 하차한 후 우리를 백무동에 내려 놓았다. 비가 그친 백무동의 새벽은 싸늘한 어둠만이 감돈다. 어제 밤 예약해둔 ‘참샘산방’으로 향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켜 둔 불빛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소박한 시골 아침상이 차려져 있다. 내 평생 가장 일찍 먹는 아침이다. 맛과 가격을 떠나서 이 새벽 우리를 위해서 아침을 준비해 주신 정성에 감동한다.
< 참샘 산방 >
식사 후 잠시의 휴식을 거쳐 쉬고 게시는 아주머니가 깰까 바 인사도 못하고 조용히 산방을 나와 길을 나선다. 4시 45분 탐방 안내소를 지나며 본격적인 산행에 돌입한다. 길은 직진하면 한신계곡길, 좌측으로 가면 하동바위길이다. 좌측으로 길을 잡고 오르니 야영장매점이 나오고 조그마한 야영장을 지나 흔들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니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새벽 5시가 체 되지 않은 어둠 속을 4명의 친구가 말없이 오른다. 어둠과 내려 앉은 운무와 새벽 산의 정적만이 깔린 길이 운치 있게 느껴진다. 안개 비가 내리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조금 지나다 보니 숲의 녹음이 짙어 이곳은 평소에도 빛이 잘 들리 않을 듯 하다. 어둠 속을 터벅터벅 1시간 여 걸으니 어느덧 하동바위(900m)가 나타난다. 우측으로 계곡이 흐르고 좌측으로 집채만한 바위가 서있다. 이 바위에 오르면 하동 땅이 보인다 하여 명명되었다 한다.
< 하동바위에서 >
5시 40분 어둠이 서서히 거치고 있다. 비가 그친 것이 다행이다. 참샘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번갈아 가며 볼일을 보며 여유를 부린다.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산객들과 대화도 하고 막걸리도 한 통 얻었다. 등에 지지 않고 손에 들고 오던 것인데 무거워서 우리에게 넘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남의 호의를 호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감사합니다’. 길은 참샘(1123m)까지는 그런대로 오를만한 오르막인데, 참샘을 지나 소지봉(1312m)까지의 길은, 길지 않은 반면에 경사가 가파른 된비알이다. 400m의 거리에 고도 200m가 넘으니 가파른 것이 당연한 것일 것이다.
산을 오르며 나름대로 터득한 바에 의하여 정상으로 향하는 주 오르막 길을 기준으로 대략 고도 300m를 오르는데 약 1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고도 700m정도인 한라산 관음사에서 백록담까지의 고도는 1,200m로 4시간이 소요되고, 630m인 관악산 연주대까지는 약 2시간, 1,150m인 용문산 까지는 주차장에서 대략 2시산 30분 정도인 것이다. 물론 날씨와 길 상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경험상 그렇다는 것이다.
< 참샘에서 >
< 소지봉에서 >
소지봉에서
소지봉을 지나 망바위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꽃길(쉬운길)’이다. 아침이 완전히 와 버렸고 조금 전 계곡 길에서와는 다른 풍광들이 구름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다. 황홀하다. 산을 자주 다니나 보면 그 산만의 특징적인 매력이 있는데 망바위 길은 고사목 사이로 드러나는 안개에 덮인 웅장한 지리의 산세가 압권이다. 구름을 위 아래로 두고 언뜻언뜻 머리를 내미는 모습이 그만이다.
< 망바위 부근에서 본 운해 >
산의 모습이 구름에 완전히 사라질까 두려워 한참을 보고 간다. 망바위 길은 거의 평지 수준이다. 소지봉을 지나 1시간 5분만에 망바위(1460m)에 도착했다.
< 망바위에서 >
여유 있는 행보다. 망바위 주변의 바위군은 안개와 소나무와 어우러져 절정의 경치를 선물하고 있다. 바위 위 평평한 곳을 골라 또 퍼질러 앉는다.
< 구름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
망바위에서의 황홀한 휴식을 마치고 제석단으로
향한다. 길이 조금은 험해 진다. 구름이 더 내려앉아.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인디언 썸머 같은 짧고 굵은 사랑(풍광)은 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린다. 망바위 출발 30여분 만에 제석단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바위 앞에
닿는다.
이정표가 없으니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올라오면서 유사한 구조물이나 지형을 본 적이 없으니 맞을 것이다. 바위에 올라 백무동 방향을 바라보니 기묘한 구조의 바위들이 눈 길을 잡는다. 육산인 지리에서는 흔치 않은 광경이다.
<
안개가 어서 거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이슬비가 되어 뿌려대기 시작한다. 바람막이 옷을 다시 꺼내 있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길의 오르내림이 이전과는 다르게 심해지더니 25분 만에 장터목 산장(1750m)의 지붕이 보인다.
< 장터목 대피소 >
4시간이 넘는 시간 만에 보는 인공 구조물이 새삼 반갑다. 사진으로 수
도 없이 보아 왔던 모습 그대로인데 기대했던 경치는 안개 때문에 꽝이다. 많은 고수들의 흔적들을 보면서
다음 번 산장에서의 숙박 산행을 그려 보려 했는데 번거로워 진다. 날씨가 많은 것에 영향을 준다. 당초 이곳에서 세면도 하고 장비를 점검한 후 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 줄기도 거세저서 곧바로
천왕봉으로 향한다. 7년 전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오를 때에도 안개비가 내려 지리산 정상부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오늘도 역시 지리는 내게 가장 소중한 부분의 전모를 공개하지 않으려나 보다. 아쉽다. 장터목에서 올려다 보는 천왕봉 부근의 경치가 근사하다 하던데. 심신이 지쳐온다. 중간에 여러 번 쉬었지만 5시간 가까운 오르막 산행은 역시 쉽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으로 향하는 길은 잘 가꾸어진 돌 길이지만 초입의 경사는 만만치 않다. 안개비에 영향으로 시야는
좁으나 사진에서 보아 왔던 불탄 고사목의 흔적은 그래도 인상적이다. 장터목 기점 30여 분 지점에
< 제석봉에서 >
성우가 나무데크에 주저 앉는다. 나도 배가 고파온다. 즉석에서 자리를 펴자는 의견이 나온다. 준비한 성찬이 배낭에서 꺼내어 진다. 쉬지 않게 하려고 얼음 물병 옆에 고이 모셔온 김밥(너무 정성을 드리는 바람에 밥알이 냉장고에 두었던 것처럼 딱딱하다), 성우표 샌드위치, 소주, 육포, 오이 등등. 안개와 어둠 속을 헤쳐온 동지감이 샘 솟는다. 거쳐온 코스들의 총평이 이어진다. 대체로 코스의 난이도에 만족해 하는 것 같아 준비한 나로서도 흐뭇하다. 약간의 알코올과 함께한 이른 점심은 10시 20분까지 이어진다. 천왕봉에 오르기도 전에 벌써 하산 후의 일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처음 나는 진주를 계획했으나, 성우는 이왕이면 부산으로 가자는 제안을 한다. 부산에 가서 바다를 보며 광안리에서 회를 먹고 아침에 KTX를 타고 편하게 서울로 가자는 것이다. 생각을 조금 유연하게 하니 멋진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이러다 부산에서 배타고 일본으로 가자는 제안도 나오겠다. 새벽에 출발한 산행은 이토록 많은 시간의 여유를 주고 있다.
자!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다. 이슬비는 멎었지만 안개는 여전하다. 천왕봉 길에서 느낀 인상적인 것은 멋진 나무였는데, 소나무, 잣나무와는 비슷하나 다른 나무가 의젓한 자태로 곳곳에 서있는 것이 자주 목격되어 이름을 알아보니 ‘가문비나무’란다. 나른 곳에서 또 보았는지는 몰라도, 산을 내려가면 이곳 가문비나무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산 다음에 꽃, 꽃 다음에 나무라 했는데 자꾸 산 주변의 생물들에 관심이 많이 간다.
천왕봉까지는 생각은 약 30분이면
오르겠지 했는데 길이 녹녹하지 않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오르려니 힘이 많이 든다.
< 통천문에서 >
< 천왕봉에서 >
통천문에서 천왕봉까지는 쇠계단 길이다.
무릎에 약간의 고통이 감지되어 온다. 큰일이다 싶어 준비한 진통제의 힘을 빌린다. 통천문에서 20여 분의 힘겨운 발걸음 끝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언제 보아도 통쾌한 문구이다. 정상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돌아가며 독사진을 찍고 단체사진도
찍고 주위를 감상한다. 안개에 묻혀 시야는 별로다. 정상부의
붐빔이 싫어 100m 밑 안부로 자리를 옮긴다. 올라올 때는
천왕봉에서 하이파이브도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니 마음이 차분해 진다. 정상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지난 번 고생하며 용문산에 올랐을 때도 정상에서 오히려 차분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때와 같은 경험을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 천왕봉에서 이루어진 강형의 꿈 >
<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 5.4km >
11시 25분 하산 길을 내 딛는다. 천왕봉에서 천왕샘을 거쳐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내리막은 경사도가 매우 심하다. 오르는 사람은 법계사에서부터 이어지는 2시간여의 오르막 때문에, 내려가는 사람은 천왕봉 정상에 오르며 에너지를 대부분 소비해 버려서, 천왕봉-법계사 코스는 지리산의 대표적 난코스이다. 10여 분을 내려서니 천왕샘 안내판이 있으나 막상 어디가 천왕샘인지는 찾기가 쉽지 않다. 몸도 피곤하고 시간 내어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친다. 이후 개선문까지의 길도 쇠 계단이 있기는 하나 험하기는 매 일반이다. 그래도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심심하지는 않다. 특이한 것은 일본 노인 관광객 20여 명이 무리를 지어 산을 오르고 있었고 가까이서 보니 모두 다 70살이 넘어 보인다. 좋지 않은 날씨에 이 험한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얼굴은 밝다. 고수들인가 보다. 존경한다.
< 개선문에서 >
개선문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가 눈이 띤다. 이정표가 없어 정확한 이름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개선문보다 더 인상적인 구조물이다. ‘중산리 입석바위’라 명명하고 이정표를 세우면 좋을 것 같다. 이곳에 잠시 쉬고 있으니 올라 오는 사람들이 자꾸 천왕봉까지의 남은 시간과 거리를 묻는다. 난감하다. 거리야 얼마 되겠냐 마는 시간은 대략 1시간은 걸릴 것인데, 그분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라는 상투적인 선의의 거짓말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길도 험하고 아직도 한참 가야 합니다”라고 야박하게 말할 수 도 없고. 기분 상하지 않게 사실대로 말해 주니 “내려 가셔서 좋으시겠습니다”라는 말을 건넨다. 말에 부러움이 서려있다. 그래 몸은 힘들지만 저 사람들을 생각하며 행복한 기분으로 걷자고 혼자 다짐한다.
< 입석 바위에서 >
개선문을 지나
30여 분을 더 내려 가서야 법계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지난 등산 때는 보지 못한 것인데
새로 만들어 졌나 보다. 옆에는 큰 약수터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명물이 될 듯하다. 산에서의 시원한 물 한 모금의 가치는 산을 오르는 사람만이 정확히
알 것이다.
법계사 일주문을 지나 모퉁이를 도니 로터리 산장이 보인다. 예전 대비 말끔히 단장된 모습이다. 문득 2001년 중산리-천왕봉 왕복 산행의 추억이 떠 오른다. 당시 회사에서‘다물민족학교’ 교육을 단체로 가게 되었고, 교육 과정 중 하나가 지리산 등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며 순두류까지 버스로 이동해 로터리 산장에서 점심 먹고 천왕봉에 오른 후 하산하는 코스로 대략 6시간 남짓 되었을 것이다. 당시 로타리 산장에서 이미 초죽음이 되었고, 이후 빗속에 천왕봉을 올랐다가 하산 시에는 다리가 풀려 고생했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3-4일은 계단을 걷지 못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몸 상태는 최상이다.
로터리 산장을 내려서며 우측으로 길이 보였으나, 무심코 지나는 사람에서 “중산리 하산길이 어느 쪽이죠”하고 물으니 직진 내리막을 알려준다. 의심 없이 20 여분을 걸으며 생각하니 아무래도 길이 낮이 익다. 아! 7년 전에 그 길이다. 이 생각은 그 때 안내하던 젊은 여자 산꾼과 앉아서 쉬던 개울가에 도달했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맞다. 이 길은 망바위를 거쳐 칼바위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순두류로 가는 길이다. 얼마나 기다려서 온 지리산인데 왔던 길로 또 간단 말인가? 화가 난다. 나의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길가의 이정표는 ‘순두류 2.1km’를 알리고 있다. 순두류에서 매표소까지의 아스팔트 길이 한 시간 이상의 거리임을 알고 있는 나는 순간 “중산리 버스 정거장까지 2시간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멍해 진다. 그나마 길이 순해 걷기는 편하다. 이놈의 길은 30분을 걸었는데도 아직도 1.1km가 남았다 한다. 분명 평지길인데 거리 계산법이 이상하다. 한 참을 더 내려가다 보니 왠 여자 둘이며 내려가고 있는데 행색이 눈에 익다. 동서울-백무동 버스에 맨 처음에 탔던 여자들이다. 한 여자가 다리가 좋지 않은가 보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서 걷는데 앞서가던 산객들이 “순두류에 가면 법계사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하며 힘 내라 한다. 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이 길은 비록 가본 길을 다시 가는 것이지만, 순두류-중산리 셔틀버스를 고려한다면 시간상으로는 무려 1시간을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인 것이다. 버스를 놓칠까 걱정되어 앞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다 보니 두 여자와는 멀어진다. 빠른 걸음으로 나머지 구간을 내려서니 13:45분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순두루 버스정거장에 도착하며, 오늘의 긴 지리산 산행을 마무리한다.
< 순두류 위령비 앞에서 >
< 에필로그 >
2시에 셔틀이 출발한다 하는데 강형과 대식이 내려 오질 않는다. 15분 이상이 쳐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하산하는 등산객에게 물으니 “저 위에서 말씀하신 남자들이 여자들과 막걸리 먹고 있던데, 여자들이 서울막걸리라며 좋아하고 있더만” 하고 대답한다. 기어이 그 놈을 막걸리가 사고를 치는구먼. 소지봉에서 얻은 것인데 오랫동안도 메고 다녔다. 강형의 술 욕심은 끝이 없다. 버스 시간이 급해 성우가 부르러 뛰어 올라 간다. 한참 만에 막걸리를 들고 네 사람이 내려온다. 무척 다정해 보인다. 다행이다. 덕분에 다리 아픈 사람도 버스를 타게 되고, 산 친구도 생기고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말이다.
버스는 중산리 매표소 주차장에 우릴 내려주고 가 버린다. 다시 택시를 타고 비 오는 중산리 고갯길을 내려온다. 버스 매표소에서 진주행 표를 끊어놓고 막걸리를 앞에 놓고 짧은 담소를 나눈다. 멀리 산을 보니 안개가 산 중턱에 걸려 있다. 그 놈의 안개 평생 볼 것을 오늘 다 본 것 같다. 산에서 만난 두 여자와 진주까지 동행하게 되었고 이후 진주성과 남강이 보이는 식당에서 뒤풀이를 하고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오를 때 시뮬레이션 한 것과 비교할 때 천왕봉까지 30분 정도가 더 걸린 것과 법계사에서 망바위, 칼바위 코스를 타지 않고 순두류 코스를 탄 것을 제외하고는 계획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날씨가 궂어 조망은 좋지 않았지만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고,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쳤으니 모두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