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앞 삼봉 정도전 시비
조선왕조와 한양도성의 설계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다.
정도전이 새로 건설된 수도 한양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기리기 위해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를 쓴다.
그는 이 시조에서 8가지 주제로 한양의 경관을 찬미하면서 국운이 영구하기를 기원했다.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굳건한 도성과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들을 묘사하며 이곳에서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제1수에서 새로운 도읍의 지리적 요충지임을 밝히고, 제2수에서는 궁궐과 정원과 도성을 친자연의 공간으로 묘사하하고 있다.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성(鐵甕城)이고(城高鐵甕千尋)/구름에 쌓인 궁궐 오색 찬연해.(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어원에는 봄 경치가 좋은데(年年上苑鶯花)/해마다 도성 사람 즐겁게 노네.歲歲都人遊樂)"-진신도팔경시의 2경에서-
임금이 사는 한양에 지은 그 도성을 노래한 대목이다.
이 한양의 도성은 조선조 500년을 말없이 지켜 본 성곽이다.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자 사방으로 성을 쌓기로 했다. 그 위치를 어디로 하느냐 고심하였다.
눈이 많이 오는 밤 이성계가 꿈을 꾸었다. 하얀 옷을 입은 도승이 나타나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울타리처럼 왔을 것이니 그 곳을 따라 성을 쌓으면 500년은 무사할 것이라고 일렀다.
과연 날이 새어 밖을 보니 하얀 눈이 쌓여서 눈 울타리처럼 되었다고 한다.이 울타리를 따라 서울의 도성을
쌓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이다.설(雪)과 울타리에서 설울이 나온다.그 설울이 서울의 유래로 친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 이성계다운 생각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만인 1394년에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가 된다.
한양의 주산은 백악(白岳)으로 청와대 뒤쪽에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수산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뒤에 있는 삼각산이 조산으로 북한산정에 솟아있는 세봉우리인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으로
삼각이란 세개의 뿔을 의미한다.서울에서 볼 때 이 봉우리들이 규봉이어서 흉하게 본다.
그리고 주산인 백악의 양쪽으로 좌청룡에 해당되는 것이 동숭동 옛 서울대 뒤쪽의 낙산이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것이 금산형태인 인왕산이며 주산을 마주보고 있는 남산이 안산이다.
그리고 안산을 멀리서 떠 받치고 있는 관악산이 조산이다.
이러한 서울은 겹꽃이다. 경복궁은 그 가운데 꽃 수술이다.
겉꽃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삼각산(북342미터)-덕양산(행주산성.서)-관악산(남)-용마산(동)이고,
속꽃은 백악(북342미터)-인왕산(서338미터)-남산(남262미터)-낙산(동125미터)이다.
한양 도성은 속꽃를 따라 축성한 한양 성곽으로 둘러 싸였다. 길이 액18.2키로미터이다.
서울의 이러한 사신사를 중심으로 한양도성을 쌓았다.또 한강은 서울의 외명당을 감싸도는 객수로서
서울을 북으로 환포하여 남으로 흐르다가 북서진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굑류하천이기에
서울은 풍수지리로 볼 때 명당이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漢陽)'이다.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이요,일지소조왈양(日之所照曰陽)이라고 했다.
산의 남쪽이자 강의 북쪽이 바로 양명한 길지라고 한다.여기서 말하는 산이란 북한산이다.
강이란 한강이다.그래서 한양은 북한산의 남쪽 기슭, 한강의 북쪽에 자리한 양명한 땅을 의미한다.
태조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 도읍터를 한양으로 정할 때 가장 눈여겨 본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모양과
방어상의 우수성이었다.
한양의 풍수역사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야사집과 개인문집에도 많이 실려 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 하륜 그리고 정도전이 그 중심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아래에
새로운 도읍지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태종 이방원의 사람 하륜이 상소를 올려 공사중지를 주장한다.
이에 이성계는 1393년 12월11일 공사를 중지시킨다.
하륜은 이후 이성계로부터 고려왕조의 풍수비서를 섭렵할 기회를 갖는다.
하륜은 도선비기를 근거로 무악천도론을 주장한다.
1394년 7월12일에는 음양산정도감을 설치하여 지리와 도참에 관련된 책을 모아서 참고하게 하였다.
이 때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하륜 등이 관여했다.
서거정이 이웃에 살았던 이양달의 입을 통해 하륜의 무악천도론의 근거가 도선비기에 있엇음을 <필원잡기>에 기록했다.
“도선의 비결에 한강이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으니 마땅히 무악 남쪽에 세워야 할 것이다.”
세종은 풍수술사 이양달에게 종1품 벼슬을 제수했을 정도로 조선건국초기 풍수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무악천도불가론을 주장한 한양명당론자였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을 들어 한양으로 천도를 재결정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무학대사의 업적이 별로 거론 되지 않는 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유교국가를 천명한 조선의 왕도를 건설하는데 승려가 자주 등장하는데 대한 사대부들의 거부감이 작용한 것이고,
둘째 무학대사는 조선의 국사가 아닌 이성계의 친구로서 주로 사담을 많이 나눈 것으로 나타나므로
무학대사의 의중이 이성계를 통해서 표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반해 정도전은 이방원의 역습에 목숨을 잃었지만, 이성계와 혁명 동지이며 신흥사대부세력의 우두머리로
조선건국의 공신이자 500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치한 경국대전의 저자였다. 한양에서 주산을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
북악산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불교적 관점과 유교적 관점이 대립을 한다.
불교는 동향이 중심이었고, 유교는 남향이 중심이었다.
석가가 동쪽 문으로 출가를 했고, 동쪽을 바라보면서 깨달았지 않았는가. 순임금은 남면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불교와 유교는 삶을 보는 관점이 달랐으므로, 자연관이 다른 것은 당연했다.
정도전의 지리관은 음양술수가 아님은 명확하다.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역설이 1394년 8월12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새 왕국 조선을 떠받칠 사상은 유교이니 유교적 자연관이 왕도를 만드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정도전은 도읍지 천도에 대한 원칙적인 찬성파였으며, 한양으로 도읍지가 선정된 후에 도읍지 건설책임자로
한양도시계획 및 건설을 총괄했다. 정도전의 유교관이 한양도성을 완벽하게 세팅하였다. 심지어 사대문의 이름까지도.
그 후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쳐 정도전은 피살되고 정종이 개성으로 가버리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제2차 왕자의 난 후에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 이방원은 재차 한양으로 입성한다.
이후에 재차 무악천도론이 고개를 들었으나 별 이의 없이 한양으로 결정이 난다.
태종 이방원이 참석한 1404년 10월4일 한양과 무악에 대한 격론이 벌어진다.
풍수술사 윤신달의 한양불가론에 대한 공격에 이양달의 반박 주장을 보면, “한양이 비록 명당(明堂)에 물이 없다고 말하나,
광통교(廣通橋) 이상에서는 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전면에는 물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으므로, 웬만큼 도읍할 만합니다.
이 땅은 규국(規局)에 합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읍하려고 한다면, 여기는 명당(明堂)이 아니고, 아래쪽에 명당이 있습니다.”
한양 도읍지 선정에 대한 논쟁은 이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40년 뒤에는 한양명당론이 아니라 경복궁 풍수 논쟁이 격론을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