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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가장 위험한 내적 치유
서론에서 저는 내적 치유가 ‘내면아이’와 함께 심리학이라는 나무에 달린 열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내면아이’가 탐스럽다고 하고 저 사람은 내적 치유가 마음에 든다고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이 내적 치유를 선호할 것입니다. 성경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면아이’는 대학 강의실이나 상담실에서 교수가 가르치지만, 내적 치유는 부흥회나 세미나에서 목회자가 가르치고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가 가장 위험합니다. 지금부터 내적 치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문제이며 얼마나 위험한지 살펴보겠습니다.
1. ‘내면아이’와 쌍둥이인 ‘내적 치유’
우리나라에 내적 치유 사역을 도입하고 보급한 선구자가 치유상담연구원의 정00 원장이라면, 꽃을 피운 사람은 내적치유사역연구원의 주00 목사와 김00 사모 부부입니다.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 기독교에 유통되는 내적 치유 사역은 이 세 사람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적 치유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주/김 부부가 쓴 대표작 [내 마음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의 몇 문단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들이 확립한 이론과 더불어 24가지 내적 치유 사례가 수록된 책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것은 마음에 쌓인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유리 조각들 중에 자신이 의식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버려 감지되지 못해 치료되지 않고 발병이 시작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기도 한다. …내적 치유 세미나를 통해 가장 주된 문제가 드러나며 치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돕게 된다.”(내 마음속에, 34)
“잠재의식 속에는 성격을 형성하게 만드는 뿌리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성격과 마음을 온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병든 뿌리를 찾아내어 치유해야 한다.”(내 마음속에, 48)
“우리의 내면에 형성된 부정적인 잠재의식의 형성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영역은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포함한다.”(내 마음속에, 49)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잠재의식’입니다. 내적 치유는 인간의 잠재의식에 있는 상처를 찾아내서 치유함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게 한다는 사역입니다. 잠재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 또는 우리에게 자각되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는 정신세계”입니다.
이처럼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정신 영역에 있는 상처를 찾아서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적 상처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 속의 상처가 원인인 문제는 어떤 것들일까요? 주00 목사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인관계의 어려움, 지나치게 지배하는 모습,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 자존감 결여,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태도, 무기력, 우울증, 강박적인 사고방식, 죄책감,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신 결여, 영적 삶의 굴곡과 침체 등등.
존 브래드쇼의 목록과 가장 큰 차이점은 정신적, 종교적 측면이 강하다는 점인데, 내적 치유가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하는 사역이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의 상처를 찾아서 치유하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는데 내적 치유에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 책이 말하는 내적 치유 또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떨칠 수 없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잠재의식에 숨어있는 상처가 그렇게 큰 문제라면, 그것을 찾아서 치유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잠재의식이라는 창고를 모두에게 열어놓지 않으실까요?
왜 스스로 잠재의식 속의 상처를 해결하도록 하지 않으실까요? 왜 내적 치유 세미나에 가거나 내적 치유 사역을 하는 목회자를 만나야 잠재의식에 숨겨진 상처를 찾을 수 있게 하실까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성경을 왜곡하는 내적 치유
내적 치유가 ‘내면아이’보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친숙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성경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인데 핵심적인 것이 “쓴 뿌리”(히 12:15)와 “속사람”(롬 7:22; 엡 3:16)입니다. 하지만 내적 치유 사역에서 이 두 개념은 완전히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책 35-37쪽에 기록된 주00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 과거의 일로 인해 마음에 독이 든 씨앗이 심기게 되고, 이 씨앗에서 쓴 뿌리가 평생 자라서 보이지 않는 마음을 더럽히고 굳게 만듭니다.
또 보이는 가시덤불을 만들어 내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고통을 주는 잘못된 생활 습관의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보이는 문제와 보이지 않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잠재의식의 영역에 자리 잡은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성경에 쓴 뿌리는 히 12:15절에 딱 한 번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생명의말씀사]에서 펴낸 [교회용어사전]에는 쓴 뿌리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 깊이 내재 된 죄악. 특히, 신앙 공동체를 부패하게 만드는 그릇되고 악한 교훈과 거짓 교리, 또는 그러한 것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킨다(히 12:15). 이는 ‘독초와 쑥의 뿌리’라는 신 29:18 말씀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본문의 의미로 보나, 사전의 설명으로 보나 쓴 뿌리는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다른 사람이 준 상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 목사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받은 상처가 사탄의 쓴 뿌리가 되어서 성품과 내면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쓴 뿌리가 인간의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을 내적 치유 전문가는 ‘상처’라고 말합니다. 이것에 감추어져 있는 사탄의 교묘한 함정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해결하는 길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이고, 상처를 해결하는 길은 치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죄라고 한 쓴 뿌리를 상처라고 하면, 회개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상처인 쓴 뿌리는 치료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잠재의식 안으로 들어가 그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쓴 뿌리 이론은 죄인을 회개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함정입니다. 쓴 뿌리 이론을 받아들이면,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용서를 받을 이유도 사라집니다.
다음으로 “속사람”에 대해 살펴봅시다. 주 목사의 주장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에 있다. 우리 겉 사람은 웃지만 내면의 자신은 울고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변화는 이 속사람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그 속사람을 묶고 있는 결박과 진(陣)들을 부수어야 한다.
결박과 진(陣)은 우연하게,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건과 필연적인 결과들로 생겨난 건축물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파괴하는 일 또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내적치유세미나는 그런 결박과 진(陣)을 부수는 과정이다. 그리고 속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돕는 세미나이다.”(내 마음속에, 91)
확신에 찬, 매우 감동적인 글입니다. 내 안에 울고 있는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속사람을 묶고 있는 결박과 진을 부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니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속사람이 기록된 것은 모두 세 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성경에 기록된 속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날로 새로워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목사가 말한 “내 안에 울고 있는 속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속사람이 원래는 주 목사의 주장처럼 내 안에서 울고 있었는데, 내적 치유를 받아서 이런 속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속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내적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 된 셈입니다. 원래는 울고 있었는데 내적 치유를 받아서 날마다 새로워지게 된 셈입니다. 원래는 강건하지 않았는데 내적 치유를 경험해서 강건하게 된 셈입니다. 이 무슨 궤변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은 ‘내 안에 울고 있는 나’가 아닙니다. 울고 있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웃게 된 아이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은 원래 내 안에 없었으나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이 넣어주신 ‘새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며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성령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 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겉 사람이 아닌 속사람에 있다. 우리 겉 사람은 웃지만 내면의 자신은 울고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변화는 이 속사람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인 속사람을 내가 다시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한 속사람을 묶고 있는 결박과 진을 부수기 위해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성경과 심리학을 절충할 때 나타나는 비참한 결과입니다.
상담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내면아이’와 ‘속사람’은 같습니다. 둘 다 상처받아 울고 있는 것들이고, 치유해 주어야 할 것들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아무리 성경의 표현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성경의 속사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의 속사람과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상한 감정의 치유]의 실체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목사이자 기독교 상담가인 데이빗 씨맨즈가 쓴 이 책은 1986년에 번역 출간된 이후 지금도 서점에서 살 수 있는,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 분야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제가 가진 책이 2018년에 108쇄로 발행된 것일 정도입니다. 저자는 이미 1960년대에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사역을 시작한 선구자 중의 선구자입니다.
[상한 감정의 치유]에는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많은 내용이 있는데 ‘내면아이’ 이론이나 주 목사의 주장과 비슷한 것들이므로 반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책 뒷부분에 있는, 씨맨즈 목사가 우울증에 빠진 베티라는 여인을 치유하는 과정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결혼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서둘러 결혼한 베티의 부모에게는 결혼도 베티도 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베티가 세 살이었을 때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고, 그 무렵에 아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서 아기를 갖게 되어 결국 결혼생활이 끝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베티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고, 베티는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간 마지막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버림받은 상처가 베티의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문제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책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의 아기 침대 장면으로 되돌아가게 해주셨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은 현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요 8:56)고 말하셨다. 우리 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은 시간의 주인이신 그분 앞에 낱낱이 펼쳐질 수 있다.
그녀가 치유를 경험하던 그 시간에 베티는 마음속에 수년 동안 묻혀 있었던 아픈 상처로 인해 쥐어뜯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베티, 당신이 그때 그 아기 침대에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그런 다음 갑자기 성령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완전히 폐허와 같이 되었던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기억나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녀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아닌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되어 울부짖었다. ‘아빠,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상한 감정의 치유, 213)
이어서 씨맨즈는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상처가 있는 베티를 위해 이런 치유를 시도합니다.
“베티,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좀 내려고 하는데 시간을 내어 그것을 가지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해보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당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순간을 지금 돌이켜 상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온 하나의 생명을 가진 세포가 어머니의 살아 있는 세포 속에 파고 들어갔을 때 당신의 존재가 가능하게 되었던 그 특별한 순간을 상상해 보도록 하세요. 그 순간 당신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 들어온 것이지요. 그것에 관해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세요.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상한 감정의 치유, 215)
결과적으로 베티의 상한 감정은 ‘치유’되었습니다. 아기 침대에 누워있는 세 살로 돌아가 아빠에게 감정을 쏟아냈을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이 이루어지던 순간으로까지 돌아가 그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씨맨즈의 책에는 이렇게 세 살 때 침대에 누워서 받은 상처는 물론이고 잉태되던 순간의 상처까지 치유 받은 베티가 쓴 감동적인 간증이 실려있습니다. 이 치유를 씨맨즈는 주께서,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동의하지 않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와 같은 ‘상한 감정의 치유’ 사례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적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사람을 과거로 데려간 경우가 성경에 있을까요? 예수님이 여러 남자와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하실 때에 그 여인의 내면 아이를 불러내셨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내적 치유를 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주 목사가 주장하는 내적 치유나 씨맨즈 목사가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상한 감정을 치유한 사례는 없습니다. 아무리 효과가 크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치유를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둘째, 성경에 사례가 없으니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성경 시대에 행하지 않은 일을 하실 수 있고, 하셔야 합니다. 성경 시대에는 없던 문제가 우리 시대에는 있다면, 성경 시대에 행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 시대에도 있던 문제인데 그때는 해결하지 않다가 우리 시대에만 치유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치유가 주장하는 잠재의식에 숨어있는 상처가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없었을까요? 우리 시대에 우리만 가진 문제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특별한 치료가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쩌다가 우리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없던 잠재의식 속의 상처를 갖게 되었을까요?
베티의 상한 감정의 치유를 하나님이 하셨다는 씨맨즈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고, 내적 치유의 대상인 잠재의식 속의 상처가 우리 시대에만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확신하건대 씨멘즈가 베티를 치료한 이야기에서 ‘기도’, ‘예수님’, ‘성령님’ 같은 낱말을 지우면, 절반은 최면술이라 할 것이고 다른 절반은 상담사에 의한 기억과 감정 조작이라고 할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가 브래드쇼의 책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것이 심리학의 핵심 사상이며 철석같은 믿음입니다. 이것이 ‘내면아이’와 내적 치유가 ‘과거의 상처’를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면 ‘내면아이’가 받은 과거의 상처를 해결하라,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까지 찾아내라,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 한 현재의 불행은 해결되지 않는다고 외칩니다.
이렇게 사람을 과거에 붙들어 놓는 것이 ‘내면아이’고 내적 치유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거에 붙들어 매어 놓으면,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게 하면,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없는 삶을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도 지금 당장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현재의 우리의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심리학, ‘내면아이’, ‘내적 치유’가 위험한 이유입니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하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는 내적치유가 이러한 위험성이 있었다니요!!!
저두 관심있는 분야였기에~
오히려 시작안한것이 감사하네요~
이미 하고 계신분들을 위해 기도로 맡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