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번뜩이는 바늘을 들고……
가난한 어머니는 새 옷을 장만해 주지 못한다. 다만 그 애정은 더러운 옷을 빨아주고 기워주는 작업으로밖에 나타내질 못한다. 그러기에 가난한 어머니는 더욱 고달프다. 세탁과 바느질. 때를 씻어내고 흠집을 깁는 어머니의 손은 동상(凍傷)에 부풀어 있다. 그 언 손이 어린것들의 내일 입을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픔을 참는다.
어려운 時代에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어머니의 그 빨래와 바느질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염(汚染)을 막는 것이다. 새 진리(眞理)를 발견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진리 위에 묻은 때를 씻어내는 일이다. 언어는 세탁비누처럼 정화력(淨化力 )를 지녀야 한다. 창조의 언어보다는 이 정화의 언어가 더욱 시급(時急)해진다. 생활한다는 것은 때를 묻힌다는 이야기이다. 때는 처음 묻을 때만이 눈에 띈다. 오염의 두려움은 내가 오염되어 있다는 의식까지도 오염시키고 만다는 사실이다. 비누는 본연의 빛을 캐내는 연장이다. 비누 거품은 허망하게 꺼지지만, 그 소멸 뒤에는 순백(純白)의 빛깔을 다시 찾는 그리움의 발언(發言)이 있다.
다시 결합시키는 것. 어려운 시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가난한 어머니의 그 바느질에서 시학(詩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마멸해 가는 것이다. 생활한다는 것은 해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찢기고 구멍 난 생의 의상(衣裳)을 다시 꿰매 주는 바늘의 언어, 실의 언어, 이 봉합(縫合)의 힘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갈갈이 찢기운 도시(都市)와 인간의 마음을 재결합시키는 예리한 바늘을 손에 들어야 한다. 어두운 밤을 새우며 인내심 있게 한 바늘 한 바늘을 움직여 가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많은 것을 원치 않는다. 위대한 창조(創造)의 세계를 꿈꿀 수가 없다. 어려운 시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창조의 언어에 도달하기 전에 비누 같은 정화의 언어, 바늘 같은 봉합의 언어를 먼저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새 옷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 해서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때 묻고 남루한 의상이라도 우리의 어린 것들에게 내일 입을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빨래터로 가자. 그리고 반짇고리를 뒤져 바늘을 찾아라. 눈물이 흘러도 참아라. 눈물자국으로 애써 빨고 꿰맨 그 옷이 얼룩질까 두렵다. 이렇게 해서 초라할망정 우리들이 다시 입을 수 있는 생의 의상을 마련해가야 하는 것이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 문학사상』 1974. 3
바람이 불어오는 곳
산수유나무에 봄소식이 열리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 봄을 알리는 어린 꽃봉오리가 기특하기만 하다. 잠시 따스한 날씨에 철없이 고개를 내민 꽃망울, 잎망울은 곧 들이닥칠 꽃샘바람을 알고 있을까?
계절이 바뀔 때면 불어오는 바람들이 있다. 꽃이 필 무렵에 분다는 '꽃바람', '꽃샘바람'이 있고, 이른 가을에는 '색바람'과 '서늘바람'이 분다. 철 따라 온다는 '가을바람', '겨울바람'은 이름에서조차 계절이 보인다. 그런 바람은 어느 계절의 끝자락이었을까? 혹은 다가올 계절이 보내는 전령인 것일까?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기세를 빗대어 '바람이 일다, 바람이 불다'고 한다. '바람 부는 대로'는 때를 잘 맞추어 일을 벌여 나간다는 뜻이다. '민주화 바람, 자유화 바람'과 같이 사회적인 유행이나 분위기를 드러내는 예가 있다. 반면에 좋은 기회를 알지 못하고 분위기를 잘못 타는 일을 지적하는 '바람 부는 날 가루 팔러 가듯'이라는 재미난 말도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바깥을 다니는 일을 '바람을 쐬다'고 하듯, 바람은 변화의 계기로 이른다. 만약 변화가 없는 정체된 상황에 있다면 '바람 한 점 없다'고 한다. 한편, 분위기를 타고서 들뜬 마음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바람이 잔뜩 들었다'며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바람을 일으킬 힘은 없으면서 남을 부추겨 허황된 짓을 꾀할 때 '바람을 넣는다, 바람을 잡는다'며 경계한다. 물기가 빠져 푸석푸석하게 된 채소를 '바람이 들었다'고 하는 말에서 보듯, 훗날을 염려하며 변화를 미리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람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다. 삶을 유지하는 그곳에 바람이 있다. 축구공이나 자전거 바퀴는 '바람이 빠지면' 제 기능을 못한다. 있어야 할 곳에 버티고 있는 바람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힘이 된다. 다만 기억할 것은, 바람은 동기도 동력도 없이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갈로그어*에서는 들뜨고 설레는 생각이 있을 때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닌다'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말에도 작은 바람을 나비의 날갯짓이라 하니 세상 어디서나 사람의 마음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초등학교 작은 교실에서 새 반장이 뽑히고, 어느 집 화분에서는 밤새 초록 싹이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때이지 않은가? 그 어떤 가능성을 부르는 작은 바람일지라도 넉넉히 기대할 만한 3월이다.
(한국일보,2023, 3. 11 ‘우리 말 톱아보기’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
*타갈로그어: 말레이ㆍ폴리네시아 어족의 인도네시아 어파에 속한 언어.
<나생이>
김 선우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 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리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는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치는 연두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
새해 삼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월은 ‘삼월’ 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어디선가 노란 동백꽃의 냄새, 그 알싸한 향기가 볼을 간질이는 듯합니다. 양지녘 어딘가에 동백꽃도 피어 있겠지요.
유정독서 첫 모임을 엽니다. 2024년 3월 6일 18시에 커먼즈 필드에서 동백꽃 같은 웃음 웃으며 만납시다.
동백꽃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첫 모임에서도 <동백꽃> 다시 읽어볼까요? 공기와 물과 밥, 아무리 먹고 마시어도 그들은 오직 공기와 물과 밥이듯이 <동백꽃>,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그것은 물리지 않는 우리들의 <동백꽃>입니다.
커먼즈 필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2024.3.4.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