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김 규 순 (서울동인학회 원장. www.locationart.co.kr)
오서산烏棲山(790.9m)은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권32>에서 오서악烏西岳으로 적혀 있으며 국가적으로 하늘에 지낸 제사인 중사中祀를 지낸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북정맥의 주인처럼 최고봉을 만든 오서산은 서해바다를 만나면서 바다와 육지의 기운이 성기어 신령스런 기운을 품고 있다. 710m의 고도로 높은 산으로 분류되지 못하지만, 서해안의 지표면에서 바라보는 오서산은 일천미터의 높이를 능가하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토정 이지함 선생도 “호서(湖西)의 산 중에 이만한 산이 없다”고 평가한 바 있다.

운무에 끼인 오서산_
청라면 광산김씨 동네에서 바라본 오서산의 위용이다.
보령시, 홍성군, 청양군을 안고 있는 호서의 큰 산이다.
만대영화지지가 있다는 속설 때문에 명당을 차지하고 싶은 인간의 탐욕으로 집중포화를 당하여 산 전체에 공동묘지처럼 무덤이 많다. 제 아무리 씨를 뿌려도 봄이 오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이다.
오서산의 오서(烏棲)는 ‘까마귀가 서식하는 산’이라는 뜻.
삼족오三足烏가 돌아오면 오서산의 정기가 다시 살아나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천시에 맞추어 만대영화지지의 주인이 나타날 것이다.
내포지역_ 오서산 자락의 청라동
안성 칠정산에 뿌리를 둔 금북정맥은 남서방향으로 달려가다가 백월산(560m)에서 우측으로90도 각도로 방향을 틀어 오서산을 만든다. 여기서 북서방향으로 계속 전진하여 용봉산, 덕숭산, 가야산이 바다와 어우러져 사람살기 좋은 곳이다.
내포內浦란 가야산, 오서산, 성주산 주위의 열 개 고을을 말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큰 길목에서 벗어난 지역이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오직 보령의 산천이 가장 훌륭한데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탁 틔어 있어서 명승지라 한다”고 적고 있다.
특히 보령시 청라면 일대는 오서산남만년영화지지烏棲山南萬年榮華之地 또는 오성지간만인가활지지烏聖之間萬人可活之地 라고 이름나 있다. 오서산 남쪽 기슭에 만년동안 영화를 누릴 길지가 있다거나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는 만 명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내포지역 중에서도 오서산일대 청라동이 길지로 알려져 있어서 고려 말부터 광산김씨와 한산이씨를 비롯한 사대부들이 이주한 곳이다.
광산김씨 김성우의 풍수적 선택
광산김씨는 신라45대 신무왕의 세째아들 흥광의 후손이다.
김성우는 김흥광의 16대손으로 수군을 거느리는 정3품 벼슬인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를 지냈다.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우가 보령에서 전라우도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성주산에 은거하면서 장남 남호를 위시한 후손들은 보령에 정착한 것이다.
고려시대말 비운의 장군이었던 김성우(1327-1392)장군이 왜구를 물리치면 활약했던 곳이 보령이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타이밍을 놓쳐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는 군사를 해산시키고는 자신은 성주산聖住山 은선동隱仙洞에 은거하다가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자결한다.
그의 증손자 김맹권은 집현전학사가 되어 세종의 충신이 되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그를 멀리하기 위해 그날로 고향 청라동으로 숨어든다. 그뿐만 아니라 김맹권의 장남 김극신도 연산군조에 과거급제가 취소된 일을 겪자 출사를 포기하고 고향땅에서 여생을 보낸다. 여기서 김성우 장군의 곧은 성격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유전된 것을 발견한다. 김맹권의 차남 김극성(1474-1540)은 출사하여 우의정을 지냈고, 토정 이지함의 아버지인 이치는 김맹권의 딸에게 장가든다.

광산김씨 김성우의 묘_보령 입향조.
앞에 운무에 가려진 조산은 성주산 장군봉. 멀리 문필봉이 보인다.
좌청룡 우백호가 면밀하게 발달하여 환포하고 있어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리이다.
김성우 묘아래 증손자 김극신의 무덤이다. 고조부께서 외로울까봐 손자가 재롱을 부리고 있는 형상이다.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이 조화롭다. 특히 우백호가 겹겹이 아름다운데 외손이 발복한다는 설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다. 성주산의 장군봉을 조산으로 맞이하고 있는데 조금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군봉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이는 묘지를 등지고 있다는 뜻으로, 어영부영 주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정도로 갈려는 반골의 기질이 다분하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오서산에서 뻗어온 힘있는 용맥에 자리한 김성우 장군 묘.
좌청룡 우백호가 긴밀하게 감싸안고 있다. 주산이 옹골차지 못하고 기운이 약간 퍼진 느낌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안티세력이었지만 그의 손자인 중노(사헌부감찰)부터 꾸준히 벼슬길에 올라 조선의 주류에 파고들지만, 권력을 탐하기보다는 절개와 백성을 생각하는 유전자가 가문의 지문처럼 이어져 가고 있음을 본다. 조상의 정신적 육체적 유전자가 땅의 정기를 통하여 보존되어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매개체가 풍수이다.

토정 이지함의 가족묘
보령 해안가에 토정선생이 직접 조성한 가족묘원이다. 토정의 형제와 조카 들이 모여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덤을 보면 조선시대의 가족묘원으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바닷물이 고여 있고 안산이 감싸고 외곽으로 다시 바닷물이 있는 형국이다.
한산이씨의 보금자리가 된 보령
조선시대 전기에는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장가를 갔었다.
남자는 처가妻家 부근에 집을 짓고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삼봉 정도전도 외가인 단양 도전리에서 태어났고,
회재 이언적도 외가인 양동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토정 이지함의 출생지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로 알려져 있다.
지금 화암서원이 있는 지역이다. 광산김씨의 마을 바로 곁에 한산이씨가 터전을 잡았다. 한산이씨도 이색의 후손으로 많은 인재가 나타났으므로 조선왕조와 사대부가에서는 홀대하기 힘든 가문이었다.
이치는 조선왕가의 외손자였으나, 파워게임에 밀려 역모의 탈을 쓰고 유배를 전전하게 된다. 토정 이지함은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2-3년 사이에 잃어버리자 생활의 기반이 무너졌다. 다행히도 외조부모께서 모친에게 남긴 유산을 받아 어렵지 않게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이치의 손자인 이산해, 이산보가 영의정과 판서로 벼슬이 높아지자 서천에서 올라온 한산이씨가 보령에 뿌리를 내린 사대부가문이 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주류에서 완전히 멀어진 광산김씨와 한산이씨의 한 가문이 다시 일어서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서산의 품에 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정 이지함의 형제들은 조부모와 부모를 잃고 한양으로 입성한다. 보령 오서산의 기운을 담금질하기 위해서이다. 담금질의 결과 이산해(영의정)과 이산보(판서)가 벼슬에 올라 가문의 중흥을 이룬다.

고운 최치원이 기거한 보리섬

설잠 김시습의 부도

고운선생의 도맥을 이어온 조선시대의 도인 설잠 김시습이 안주하고 있는 무량사는 일반 사찰과는 사뭇 다른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도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성주산을 바라보면서 태어나고 자란 토정선생이 고운선생과 설잠 선생의 도맥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세 도인의 특징은 유불선을 통달했다는 점이다. 시대를 초월하였지만 공간을 통하여 기운을 만나는 것이 바로 풍수이다. 김시습의 부토탑과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성주산 성주사지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성주사지.
신라말기에 등장한 9산 선문 중 하나인 성주사지는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재적 다양성을 지닌 사찰 터이다.
성주사지를 보면서 대 사찰이 사라진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9산선문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과 정치적인 대립각을 세운 불교로 지방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보령에 상당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보령에 잠시라도 기거한 것이 성주사 때문일 것이다.
오서산의 만대영화지지와 정만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당시 조선 최고의 지관(地官)으로 소문이 난 정만인에게 내포지역에 두 개의 명당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다.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그 하나고,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자리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그 하나이다.
하나는 가야산 남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오서산의 오성지간에 있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산에 있는 2대 천자지지를 얻어 풍수를 통하여 조선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한다. 그러자 또 다른 욕심이 발동한다. 흥선대원군도 두 개의 명당을 다 가지고 싶었다. 오서산에 있는 만대영화지지를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재불명, 정체불명의 지사 정만인은 만대영화지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신선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정권을 잡은 후 대원군은 오서산을 나랏돈으로 사들이고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이대천자지지를 선택했지만,
만대영화지지를 선택했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이 망하면 조선의 부자도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하는데 만대영화지지가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아직도 만대영화지지의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건은 있되 주인이 없으니,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밀로 한다는 천장지비天藏地秘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국가의 성장 동력은 사람이다. 보령 청라동에서 대한민국의 잡스의 출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