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재임 시 위정자들에게 보호를 받던 천주교는 흥선대원의 집정 후 병오교난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은 후사 없이 서거한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 조대비( 趙大妃, 憲宗의 母親)는 천주교 반대파 좌의정 조 두순(趙斗淳)과 손을 잡고 먼 왕족 흥선군 이 하응(李昰應, 1820-1898)의 어린 아들을 운현궁으로부터 맞이하여 임금(高宗. 1852-1919)으로 등극시키고 부친 이 하응을 대원군(大院君)이라 부르게 하였다. 조대비는 어린 왕 옆에서 정사를 챙기며 다음 해 조 두순을 영의정으로 삼고 안동 김 씨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흥선대원군에게 세도를 넘겨 1865년 4월부터 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음 3월에는 부인 민 씨 12 촌수의 동생을 왕비로 삼는다.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은 일찍부터 천주교공부를 하였고 고종의 유모인 박 말다 역시 천주교인이었는데 고종이 그녀의 품에서 자라났다. 고종이 즉위하자 하인을 베르뇌 장주교에게 보내 천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뜻으로 생미사를 올려줄 것을 부탁한다. 대원군도 역시 조선 안에서 8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에 대하여 고종 3년 기간 동안 천주교 반대파들이 천주교를 없애자는 상소를 계속 올려도 고종과 대원군은 무시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하여 조선 교구에서는 멀지 않아 종교의 자유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풍문도 그렇게 돌고 있었다. 베르뇌 장 주교도 한양에 큰 성당과 신학교를 세우려 파리외방전교회에 많은 성직자와 자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고 친히 황해도, 평안도 지방까지 나가 전교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베르뇌 주교의 요청에 따라 1865년 5월 27일 4명의 성직자가 입국하는데 그들은 바로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bretniere. 白) 신부, 유앙(Huin.閔) 신부, 볼뤼(Beaulieu. 徐役禮) 신부였다. 이들은 많은 은괴와 물자를 가지고 1864년 7월에 파리를 떠나 홍콩과 상해를 거쳐 그해 겨울 요동 차구(岔溝)를 거쳐 조선의 입국 길을 찾다가 다음 해 봄에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생겼다는 헛소문을 듣고 5월에 중국배를 타고 백령도 해역으로 접근 베루뇌 장 주교가 보낸 조선 배를 만났으나 황해도와 한강 연안 감시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인 안내자를 따라 충청도 내포로 상륙하게 된다.
이때 마침 내포지방에 머물던 다블뤼 안 부주교는 그들을 교우 마을로 안내하여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머물며 조선글과 말을 배우게 하였으며 차례로 1명씩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이들을 포함하여 조선교구 안에는 12명의 성직자로 충원되어 열심히 전교를 한 결과 함경도를 제외한 젖국적으로 23,000 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베르뇌 장 주교는 당시에 한양 태평동에 있던 큰 집을 교우 홍 봉주 도마 이름으로 사서 주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성당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은괴를 보관하고 있었고 교회서적 출판사도 그 부근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지, 고종 즉위로 조선교구에 훈풍이 돌던 무렵 러시아 인들의 거듭된 국경침범과 통상요구가 일어났다. 이미 두 개의 부동항을 소유한 러시아는 남진의 야욕으로 1864년 2월과 1865년 9월 , 11월 각각 국경을 넘어 경흥에 침입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해 왔다. 두 번 째 부터는 함흥감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주장하여 경흥부사 윤 협(尹夹)이 거절하다. 세 번째 들어 90일 이내에 답을 주겠다고 하고 감사 이 유원(李裕元) 을 거쳐 조정에 보고하게 되었다. 급보를 받은 대원군은 크게 놀라고 있을 때를 맞춰 베르뇌 장 주교 복사 홍 봉주 등은 대원군에게 글을 올린다. - 러시아를 막아내는 방법은 오직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는 데 있고 이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서양 주교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이 글을 본 후 보료밑에 넣어 두는 것을 본 민 부인은 박 말다를 시켜 교우들에게 다시 청을 넣으면 성공할 것이라 알렸다. 이에 고무된 승지 남종삼(南鍾三) 요안이 글을 지어 대원군에게 올린다. 대원군은 이 글을 자세히 읽은 후 좋다는 의사를 승지에게 알리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남종삼을 부른 대원군은 오랜 시간 교리를 듣던 끝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 그 교리는 좋으나 어찌하여 죽은 이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오. 하고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는 것을 주교가 막을 힘이 있다고 믿으시오 라고 물으니 승지는 정말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라고 답을 하자 대원군은 - 그렇다면 주교를 급히 만나게 해 주오 - 라고 부탁하였다. 운현궁에서 물러나온 승지는 곧 주교를 찾았지만 때가 성탄절 전후라 성사를 주기 위하여 베르뇌 장 주교는 황해도 평산 지방을 , 다블뤼 안 부주교는 충청도 내포에 있어 빨리 데려 올 방도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대원군은 큰 딸 시아버지 조 기진(趙 基晉)이 돈과 가마를 대어주어 급히 가서 두 주교를 모셔오게 하였는데 베르뇌 장 주교가 한양에 도착한 날은 1865년 12월 13일이었다. 이에 남 종삼 승지는 15일에 이를 알리려 운현궁에 들어가니 대원군은 너무 지연되어 안 좋은 낮으로 승지를 대하면서 - 나는 영감이 부친에게 세배를 드리려고 시골로 간 줄로 알고 있었소, 그 일은 급하지 않으니 좀 두었다가 만납시다 - 하였다. 이에 실망한 승지는 제천으로 가 부친 남 상교(南尙敎) 아오스팅을 뵙게 되니 아들에게 말하기를 - 너는 충성된 신하의 일을 다했으니, 너의 목숨은 이미 팔린 바가 되었으니 죽을 문서에 수결(手決)할 때는 성교(聖敎)에 욕된 글귀가 없도록 해라 - 하였다.
이후 대원군은 박해의 의지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한 이유는 북경으로 가던 동지사 이 홍교는 가는 도중 거짓 정보를 보내온다 그 내용은 - 청나라에서는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서양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알려 왔다. 이 정보는 조선교구에게는 흉보였다. 12월 중순 넘어 이 흉보를 접한 대신 정 원용, 김 좌근, 조 두순, 김 병학 등은 글을 만들어 대원군을 질타한다. - 서양인을 물리치시오. 그들과 친하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오. 서양 오랑캐를 모두 죽이고 서학꾼을 모두 죽이시오 - 하였다.
대원군에 병인 박해 요인은 경복궁 재건에 따른 재원의 부족으로도 원인이 있었다. 4월부터 시작한 경복궁 재건사업은 재원이 부족하여 베르뇌 장 주교가 소유하고 있던 은 재화를 빼앗기 위하여 박해를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병인교난도 구정을 전후하여 발단되었는데 그 첫 희생지역은 평양에서다. 평양감사 정 지용(鄭志鏞)은 1865년 겨울에 두 교우를 체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교우들이 몰려와 함께 체포하라고 100여 명이 달려들어 민란으로 확대될까 봐 석방해 주었다. 다시 이듬해 1월 3일 유정률 베드로, 우 세영 알렉시오 등 4명의 교우를 체포하여 심문하여 3명은 배교를 시켰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유 정률 베드로를 배교한 백 명에게 타살하게 하여 대동강에 버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평양 사건은 그해 겨울에 지나가던 동지사가 평양감사와 짜고 일으킨 일종의 박해 사건이었다. 이 박해는 한양으로 번져 1865년 12월 29일 그믐날에는 포졸들이 대궐을 짓기 위하여 월납 전을 거둔다는 핑계로 두 번이나 베르뇌 장 주교의 집을 찾아와 돌아보고 갔다. 새해에 접어들자 곧 한성부는 베르뇌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 선이(李先伊)와 교회서적 간행인 최 형(崔炯), 전 장운(全長雲)을 잡아들이고 1월 5일에서야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는데 이 모든 일은 천주교 반대파 조 두순 일파가 만든 책동이었다.
정부에선 배교자 이선이의 진술로 교회 내막을 알게 되어 4일 후 1월 9일부터 베르뇌 장 주교, 홍 봉주 등 9명의 성직자와 교우들을 체포하면서 병인박해를 일으킨다. 병인박해를 일으킨 주동자 조대비는 1월 24일 전국에 명을 하여 서양인과 교인을 남김없이 잡도록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상을 주지만 숨긴 자도 함께 처벌하도록 하였다. 특히 황해도 충청도 해안에서 중국을 왕래하는 자는 곧 잡아 처형한 후 정부에 알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방식을 도입하여 전국에 걸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그해 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물의 날짜와 순교한 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월 9일(양력2월23일) | 베르뇌 장주교, 홍 봉주 | |
1월 11일 | 한양에서 정 의배, 부르트니에르 백, 신부, 교우 우세영, 체포, 고양군에서 승지 남 종삼 체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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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 고아주 둔토리에서 볼류 서 신부 용인 손곡에서 도리 김 신부 체포 | |
1월 20일 | 밀고자 이 선이 풀어 줌 | |
1월 21일 | 남 종삼, 홍 봉주는 | 서대문 밖에서 처형 |
베르뇌 장주교 외 신부들은 | 새남터에서 처형 |
1월 22일 | 충청도 제천 배론에서 푸르티 신 신부, 프르티니콜라 신부체포 | |
1월 23일 | 전 장운, 최 형 체포 후 | 서순문 빆 사거리에서 처형 |
1월 24일 | 남 종삼 부친 남 상교 제천에서 체포 공주 옥으로 이첩 | |
1월 25일 | 전 장운, 최 형 | 서소문 밖에서 참수 |
프루티 신 신부, 프티니니콜라 박 신부, 정 의배, 우 세영 | 새남터에서 참수 |
충청도 내포에서 다블뤼 안 신부, 유앙 민 신부, 오메트로 오 신부, 황 석두 체포 | |
2월 13일 | 다블뤼 안 신부, 유양 민 신부, 오메트로 오 신부, 황 석두, 배론 장주기 |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 |
8월 1일 | 김 면호 김 문원 ,대원군 하인 이 연식 | 새남터에서 참수 |
병인 대교난은 1월 초에 시작하여 2월 중순까지 발 빠르게 진행되어 조선교구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였다.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3월 20일 고종의 왕비로 민 치록의 딸을 왕비로 올리는 국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관리와 사소로운 감정이 개입되었거나, 선참후계를 묵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여 그 수는 실로 많았다. 그해 가을 프랑스 함선 내침이 있었고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도 가야산 대원군 부친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일어나 대원군을 분노하게 하였으며 1871년에는 조미동상 수호조약을 이유로 미국 함대의 침투가 있기도 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가 발행한 한국에서의 가톨릭이란 책에서 대원군의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68년 9월까지 2천여 명의 교우가 박해자의 칼날에 쓰러졌고 1870년 에도 떠도는 말에 의하면 죽음의 괴로움을 당한 교인의 수는 8천 명이라 하였는데, 이 중에는 박해를 피하여 깊은 산중 생활에서 굶주림과 위험으로 죽은 수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아 그 수는 1만 명을 추산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