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족의 역사
우즈베크족의 선민들은 소그드인, 마자테인, 호라즘인과 남하한 돌궐어 사용군체가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고대의 소그드인은 주로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유역 그리고 저라부쌍강 유역에 분포되었으며 이지역은 하중(河中)지역이라고도한다. 기원전 2세기에 알타이어 계에 속한 돌궐인 부락이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현지 토착인 인소그드인 부락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차 돌궐어를 사용하는 군체로 변화했다. 활동구역이 다름에 따라 이부류의 사람들은 돌궐인, 부하라인, 페르가나인, 호라즘인, 사마르칸드인 등으로 호칭했다.
기원 874년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만왕조를 세우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해 중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를 내왔고 고대 페르시아 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아우러져 새로운 페르시아 문화를 형성했다. 이는 우즈베크족의 형성에 기반을 마련했다.
9세기 후 중앙아시아의 카를루크와 회골 등 돌궐인들이 남하하여 하중지역에 진입했고 카라한 왕조를세웠다. 카라한 왕조는 국력이 강했으며 기원 999년에 이란인의 사만왕조를 멸망시키고1004년에는 텐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강대한 중앙아시아제국을 형성했다. 이때 중앙아시아는 대규모의 돌궐화 과정을 시작했고 돌궐인과 이란인들이 상호 융합되고 돌궐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되면서 돌궐-페르시아-이슬람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카라한 왕조 집권기는 중앙아시아에서 봉건제도가 최종적으로 노예제를 대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즈베크족이라는 이명칭은 기원 14세기 몽골제국의 4대 한국(汗國)중의 하나인 킵차크한국의 돌궐 출신 통치자 인수단무함마드우즈베크한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가지배적이다. “원사(元史)”에서는 “웨지베”(月即別), “웨주보”(月祖伯)등으로 불렀다.
킵차크한국은 우즈베크한의 치세에서 한동안 국력이 강성하여 “우즈베크한국” 이라 불렀다. 그러나 얼마후 기원14세기중반부터 우즈베크한국은 권력다툼으로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기원 15세기에 킵차크한국이 멸망하게되고 그한부분을 이루던 백장(白帳)한국이 강성해졌으며 그통치범위내의 농민과 목축민들을 우즈베크인이라 부르기도했다.
1451년 무함마드 시반니가 시반니한국을 세웠으며 당시 중앙아시아의 소택지지역 및 초원산림지대에 살던 돌궐부족들이 한국의 주요한 부락들이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시반니칸이 우즈베크 유목민들을 이끌고 다년간의 정벌을 거쳐 강대한 부하라한국을 세우면서 하중지역과 페르가나강 유역에서 통치적 지위를 확립했다.
남하한 우즈베크족 유목민들은 현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돌궐- 이란사르트족 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새로운 대 융합을 시작했다. 남하한 우즈베크인들의 언어가 현지 주민들과 비슷하거나 같았고 이들이 정치와 경제 등 분야에서 통치지위에 있었기에 이 시기는 전반 우즈베크족의 형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하중지역은 중국의 신강과 마주보고 있고 지리적 환경도 비슷했기에 경제와 문화적인 보완성이 강했다. 하여 오래전부터 우즈베크인들의 조상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신강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14세기에 킵차크 한국과 원나라는 대규모의 상업왕래가 있었다.
명나라때에 쌍방의 이런 상업왕래가 더욱 번영했고 사절단을 상호파견하고 관의상단들이 늘 오갔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부하라, 사마르칸트등지역에서 동쪽으로 온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중국신강의 야르칸트(葉爾羌)를 필수 경유지로하면서 비단과 찻잎, 자기, 가죽 등 여러가지특산물을 경영했다. 일부상인과 상단은 아커쑤(阿克蘇),투루판(吐魯番)에서 숙주(肅州)로 와서 화물을 중국내지에 팔았다. 이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일부상인들이 신강의 일부 도시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