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聽溪公(德毅) 遺稿 《청계공(덕의) 유고》
청계공 휘 덕의(德毅․1540~1613)는 진사공 곤(鯤)의 차남으로 자는 이원(而遠)이며 호는 청계 또는 동호(桐湖)다.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90일간 걸어서 의주 행재소에서 왕을 알현하고, 동생(德和)과 극적으로 해후하여 주위를 감동하게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도 이에 감동, 서로 다정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 明將呂應鍾參軍 ․ 丁景達牧使 ․ 金復巽別座 ․ 聽溪先生送唱聯句 (명장여응종참군.정경달목사.김복손별좌.청계선생송창연구)
(지장록 p.1138)
청계공의 이 연구(聯句)는 임진왜란 때 청계공이 왕의 행재소인 의주를 걸어서 찾아갔다가 왕을 알현하고 영남 운향관(運餉官)을 제수 받고 명나라 장수 여응종 등과 경상도 선산(善山)에 도착하여 왜군의 점령지를 회복한 소희를 시로써 읊은 것이다.
謾道才惟子建長 詩腸奈己作愁腸(呂應鍾)
風稜震蕩南天外 危悃崢嶸北斗傍(丁景達)
提釰未能埋猰貐 揮戈空見縱豺狼(金復巽)
一樽難與消餘恨 更向東邊怒欲狂(魏德毅)
〈해설〉부질없이 재주가 자건보다 능하다고 하였는데 시(詩)창자가 어찌하여 수심창자가 되었는고, 모진 바람은 남천밖에 몹시 울어 흔들리는데 위곤(危悃)은 북두 곁에 높고도 험하구나, 칼 이끌고 능히 알류를 묻지 못했는데 창 휘둘러 속절없이 시랑이만 놓아 보냈네, 한 동이 술로 남은 한을 녹이기가 어려운데 다시 동변을 향하니 노여움이 미칠 것 같네.
■ 續傷往賦並序 (속상왕부병서)
※ 청계공은 임진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 아픈 아내 박씨와 함께 배를 타고 피난했다. 그런데 배가 영광 어느 해변에 이를 때 아내가 숨을 거두자 어쩔 수 없이 해변의 수풀 속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금슬이 남 달랐던 터라 공의 여한 또한 이를 데 없었다. 그 애틋한 마음을 적은 것이 바로 이 글이다. 공은 이 글을 책장 설합 속에 두고 떠났지만 후손은 공이 타계한 후 오래 지난 뒤에 발견해서 대동보에 실었던 것이다. (지장록 p. 1139)
「余於丁酉秋八月迨旣望載病妻朴氏淨海越十八喪于舟上摧傷奈何勢難運傷草瘞於靈光境上傷懷之極見劉夢得傷往賦信乎先獲我心聊抒悲傷之意續而次韻其詞曰
噫歟欷吾誰傷兮傷斯人之我遺人情漸刷而少弛兮夫何越歲而愈悲招芳魂兮靡及淚潛兮無時歇疑形骸兮在何處祚一日而九馳境絶兮人稀風悲兮草衰欲往從兮末由籲蒼天而怨咨塊獨處兮山之中弔前迹於殘暉辱手澤於遺器兮撫芳塵於餘衣立遺墟兮求寢處黍離離兮露未晞昨宵夢裏之形影兮只以添恨而增悲人世常多喪匹兮慘痛誰似我者追惟新聘之日兮往在癸酉臘月旬下紛旣結縭以佩訓兮只知無違乎夫帷下新粧兮錦衾華襦天桃春曉兮標梅香徵歡溢新閨兮鼓琴瑟之陶陶酒滿淸樽兮動浮光之漪漪旁派則光生組綬兮先系則籍連貂笏幸與子而偕臧兮信天同而神比顧其行則靡虧兮語其才則亦具于歸當日兮一室懽如慈惠足以及人兮不致感者伊誰色溫而能厲兮語恭而非飴嘉度幽閒兮柔儀葳㽔恭事我兮多慧差對人而如癡宜家宜室兮門稱淑姿奠蘋六載兮幾盡誠敬之歸疑營家三歲兮每見勤苦之容謾擬百歲同室兮豈料人事擲空四十二春光易摧兮弱質遽罹於邪風還慮巳病之染我兮每勉我而遠通五月在外爲參商兮一體未足爲蚷蛩百端病裏之情兮手裁一幅和淚封忽余自牖而執手兮問先及兮來何從共含淚而相對兮兩心皆至於蒙蒙曾藥治未畿兮又何賊鋒之迫逢載一舟以浮海兮水幾遡兮山幾窮庶將一分之向蘇兮冀同歡舊園中何天意之未惠兮奄遭之波上凶音五內摧裂而哽咽兮不堪悲涕之淫淫情不能以自制兮豈知自傷之是葴鳴乎與子成說兮豈知有今異地孤瑩兮斷岸千尋恨未及期移封兮地茫茫兮天沉沉哀哀白首之單形兮豈獨留隙上光陰異日泉裏之則同兮更結此世之餘忱染莊生之吐血兮和古篇而悲吟」
〈해설〉『내가 丁酉年(1597․丁酉再亂) 8월 16일 병을 앓고 있는 아내(박씨)와 함께 배를 타고 난리를 피해 바다에 있다가 이틀 뒤인 18일 배에서 아내가 숨을 거뒀으니 최상(摧傷)함이 어떠했겠는가.
운상할 형편이 되지 못해 영광경상(靈光境上)의 풀숲에 시신을 묻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傷往賦)'를 보고 내 마음처럼 느껴져 그 사(詞)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아! 슬프도다. 내가 흐느껴 우는 것이 누구를 슬퍼함인가. 그 슬픔은 이 사람이 나를 버린 슬픔이네. 인정이 점점 지워져 조금씩 잊혀 가는데 어찌하여 해를 넘겨도 더욱 슬퍼지는가.
방혼(芳魂)을 불러본들 미치지 못함이여!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 그칠 줄 모르네. 형해를 생각함이여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은 하루에도 구천으로 달려가나 지경이 끊어져 인적은 드물고 바람은 슬픈 듯이 불고 풀마저 시들었네.
따라가고자 하나 갈 수가 없어 창천(蒼天)을 원망하며 탄식하네. 흙덩이처럼 홀로 뫼 가운데 서서 지난 일을 생각하며 저문 햇빛을 서러워하네. 그의 체취를 찾으려 손 떼 묻은 그릇과 옷가지를 어루만지네.
유허(遺墟)를 찾았으나 기장만 무성하여 이슬도 햇볕에 마르지 않았구나. 어제 밤 꿈속의 형영(形影)이여 단지 한만 더하고 슬픔만 더하구나. 세사에 짝 잃은 이 많으련만 참통(慘痛)함이 어찌 나와 같으리요.
신빙(新聘)한 날을 더듬어보니 지난 계유(癸酉)년 섣달 하순이었네. 분잡(紛雜)함은 끝나고 향주머니 속에 훈계담아 허리에 참은 단지 남편의 뜻 거스르지 않은 것만 알았네. 장막 아래 새롭게 단장함이여 비단 이불과 화려한 저고리였네.
천도(天桃)의 봄이 밝음이여 높은 가지 매화 향기 그윽하네. 신방에 기쁨 넘침이여 부부의 정 화락(和樂)하였네. 술이 맑은 술동이에 가득함이여 빛이 물결처럼 떠서 움직이네.
방파즉(旁派則) 적(籍)이 초홀(貂忽)에 이르렀네. 다행히 그대에게서 주어 함께 감춤이여 진실로 하늘과 같으며 신(神)에 비유하리라. 그 행실을 돌아보면 이지러짐이 없음이여 그 재주를 말하여도 또한 갖추어졌네.
시집온 당일이여 방안(一室)에 가득히 기쁨이 넘치었네. 자혜(慈惠)가 족히 사람에게 미침이여 감동하지 아니한 자 그 누구이던가. 얼굴빛 온화하고 말은 공손하나 유약하지 아니했네.
아름다운 태도 유한(幽閒)함이여 유순한 거동 아름다웠네. 공손하게 나를 섬기고 지혜스럽고 부끄럼이 많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어리석은 듯하였네. 집안을 다스림이여 가문에서 숙자(淑姿)라 칭찬하였네.
6년 동안 제사를 받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네. 분가해 살림한 지 3년이여 매양 근고(勤苦)하였네. 부질없이 백세(百歲)토록 동실(同室)하자고 다짐함이여 어찌 사람의 일을 헤아릴 수 있으랴.
속절없이 보낸 42년의 춘광(春光) 쉽게 꺾임이여 약질(弱質)에다 사풍(邪風)까지 걸리었네. 5개월 동안 밖에 있어 참성(叅星)과 상성(商星)처럼 멀리 떨어짐이여 한 몸인데도 노내기가 공공이처럼 하지 못하였네.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도 다정함이여 손수 일폭(一幅 베나 그림)을 만들어 눈물 섞여 봉(封)해 두었네. 내가 갑자기 창문을 열고 손을 잡음이여 먼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네.
눈물 머금고 서로 바라봄에 두 마음 하나같이 몽몽(夢夢)한데 이르렀네. 약으로 다스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한 어찌 적의 칼날을 만나는가. 한 배를 타고 바다에 뜸이여 물도 거의 거슬러 오고 산도 거의 다 하였네.
비록 일분(一分)의 살아남을 희망으로 구원중(舊園中)에서 같이 즐기기를 바랐었네. 천의(天意)도 어찌 그리 은혜롭지 못함이여 문득 파상(波上)에서 흉음(凶音)을 만났었네. 오장(五腸)이 찢어지고 목이 메임이여 슬픈 눈물 음음(淫淫)함을 견디지 못하겠네.
사무친 정을 억제하지 못함이여 어찌 자상(自傷)하는 이 잠(箴)을 알았으리요. 아! 그대와 같이 말하였을 때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른 곳 외로운 무덤이여 천길 단애(斷崖)로다.
이봉(移封)치 못함을 한탄함이여 땅도 망망하고 하늘도 침침(沉沉)하네. 슬프고 슬프도다. 백수의 홀몸이여 어떻게 세월을 보내리오. 뒷날 황천에 가서 같이함이여 다시 이 세상의 남은 정성 맺으리다. 장자가 토해낸 피에 물들음이여 고편(古篇)에 화답하여 읊으노라.
※ 유몽득(劉夢得): 유몽득은 중국 당나라 중엽 때의 문신인 유우석(劉禹錫․772~842)의 자다. 그는 낙양(洛陽)출신으로 정원(貞元) 9년(793) 유종원(柳宗元)과 진사시험에 합격, 출사했다. 몽득은 유종원과 왕숙문(王叔文) 등과 한패가 되어 환관(宦官)들로 구성된 구세력에 대항,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1년도 못돼 실패했다. 그래서 지방의 하급관리인 사마(司馬)로 좌천되어 생애를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144-021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20일차에서는 '청계공(덕의) 유고' 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남달라 선조가 의주로 피난(몽진)했다는 소식에 장흥에서 90일간 의주 행재소까지 걸어가서 임금을 알현했다는 청계공의 기록은 진정한 '忠'이 무엇인지를 후손에게 몸소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전쟁통에 부인을 잃고 그 애뜻한 마음을 노래한 글(속상왕부병서)은 참으로 마움울 아프게 하고 처연함을 느끼게 합니다.
※ 주1) '명량해전'에 대한 책을 집필중인 분께서 청계공 후손과의 연락을 원한다는 소식이 있는 등으로 19일차와 20일차를 동시에 밴드에 게재하고자 합니다.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 등 계속]/ 무곡
상기의 청계공의 聯句시를
살펴보면,
정경달 목사와 명장 여응종도
함께 등장합니다.
명량해전 관련 책을 집필하는 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청계공 후손분들(위경돈님, 위승렬회장님,위종훈님,위순섭님,위운량님,위창복님, 위성암님, 위송금님,위경옥님, 위성유님등)도 참고하세요./ 무곡
당시 문학의 한장르인 賦는 잘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청계공의 속상왕부병서를 읽고나서 그 글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①단어의 선택, ②기승전결의 집중, ③아내에 대한 애뜻한 사랑 등에 매료되었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청계할아버지 자손 중 예술가적 DNA가 많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벽천
아! 그렇군요!
위씨는 문무가 두루두루
겸비된 것 같습니다.
중국의 晋문공을 19년간 모시고
한 위주는 무인입니다만,
그 8대손에 가서는 魏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위문후왕이 그 후손으로 제1대 왕입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 통틀어 4명의 군자가운데
한명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魏나라의 신릉군입니다./ 무곡
무곡 위상환 님
청계공께서 여응종과 수창한 곳이 경상도 선산이면 지금의 구미지역이 아닐까요?/ 벽천
碧泉 위윤기!
그럼죠
김천근방이면서
구미 선산이면 거의 같은 지역이죠
박정희대통령 고향도 엄밀히
말하면 구미보다 선산쪽이죠/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