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50 주년의 만남은 끝났지만
동기의 만남은 지속될 겁니다.
NMC 동기님들 그리고 NMC
영원히 사랑합니다.
우리가 터전으로 살고 있는 한반도의 지형은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이다..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그래서 동쪽에서 발원된 강줄기는 동에서 서로 흐른다. 川이라 부르는 물줄기는 동쪽 고원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강(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곳은 울산지방 태화강이 유일하다. 그리고 한반도의 동남서 면은 바다라서 동해, 남해, 서해라 부른다. 그리고 백두산에 근간을 둔 산맥은 한반도의 허리 중심은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으로 힘차게 금강산 줄기를 이어받아 설악권역에 진부, 미시령, 저항령. 마등령, 한계령 등 고산준령을 만들며 동쪽으로 치우쳐 남설악권역의 점봉산의 단목령으로 이어져 구룡령에서 오대산권역과 만나 노인봉, 선자령을 대관령을 넘어서 태백까지 이어진다. 태백에 접어들어 내륙으로 틀어 소백산을 만들고 속리산, 민주지산,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을 완성한다. 백두대간 산길을 걷다 보면 한반도는 산세가 유난히 수려하고 산천이 만나 금수강산을 이루고 있는 사실에 감탄하게 된다. 산을 넘지 않고서는 동에서 서로 서에 에서 동으로 오고 갈 수 없으며 또한 남에서 북으로 서로 오가려 할 때에도 고산준령을 넘어야 한다. 전 국토가 평야지역보다 산악지역이 많은 곳이 한반도다. 평야의 대부분은 서쪽으로 치우쳐 강을 끼고 있을 뿐이다.
내가 고산준령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10대 때였다. 당시 한독약품에서 자사 약품 광고를 하기 위하여 도봉산,, 북한산에 원형 노란색 철판 광고판을 세워 이정표를 만들고 구간의 거리표를 적어 놓고 그 위에 소화제 약 광고 그림을 그려 놓았다. 또한 대한적십자에서는 산악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붉은색 적십자 마크를 위험 지역 바위면에 그려 넣고 안전은 확보되었는가? 라고 적어 놓기도 하였다. 이러 시설물은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에 있었고 설억산에도 그런 시설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산을 다니다. 한국산악회에서 주관하는 오봉 암벽 강습회를 시작으로 암벽등반에 심취하게 된다. 이러한 강습회에서 습득한 산악활동지식은 결국 내가 재학하는 학교에 산악부 태동시키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적으로 있던 곳에서는 좀 더 활성화를 시키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은사님들 따라 설악에 오른 최초 코스는 내설악 외가평 등로였다. 외가평에서 내려 어두운 산길을 약 2시간 반을 걸어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암자 같은 규모의 백담사였다, 스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절부근에 막영을 한 후 늦은 밥을 챙긴 고 설거지를 하고 난 후 슬링핑백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햇살이 눈이 부셔 일어나서 텐트밖으로 나오자 백담계곡에서 흑선동계곡으로 이어진 계곡물과 수석사이로 물안개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숨이 막혀 왔다. 과히 절경이었다. 이 당시 이 기억하나로 계절마다 설악을 찾기 시작한다. 때로는 선배들과 때로는 동기들과 후배들과 함께 설악을 찾으며 능선마다 오르고 계곡마다 찾아 중청 대청을 올랐다.
당시 오를 때마다.설악산 곳곳에는 6.25 동란의 상혼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철모, 또는 수통 반합 등과 탄피도 능선상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며 한계리에서 남교리, 외가평, 진부령 간성으로 넘어가는 길은 외길이라 군인들이 양쪽 초소에서 군전화기로 서로 연락하여 교대로 차량을 소통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 동마장 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하여도 저녁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간성 이북으로는 갈 업두를 못 내던 시절이었다. 겨울철 철새 고니가 많이 잔류하는 곳이 화진포인데 이곳으로 성인이 된 후에야 마음 놓고 사진촬영을 다녔던 시기가 30대였다. 그러던 지역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남북 이산가족들도 금강산 지역에서 만나 상봉하고 금강산 관광을 하기 위하여 오고 가면서 통일의 조짐이 보이더니 다시 닫혀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비극의 현장이 바로 DMZ다. 강원도 도내 같은 군(郡)인 고성군, 전쟁 후 철책선이 쳐지면서 남한 고성군과 북한 고성군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의 상처다.
누구나 고국을 떠나 살게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조국을 그리워하게 되고 조국에서 살았을 때 함께 모여 살던 가족, 친지들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자란 옛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가고 나라의 안위에 대하여 각별하게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보통 자신의 고국을 떠나는 일은 더 깊은 학문을 습득하기 위하여 가는 유학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또는 자기가 선택한 나라로 생활과 생존의 바탕을 완전히 바꾸는 이민의 방법이 있으며 초청형식으로 나갔다가 그대로 놀러 앉아 사는 경우도 있다.
통일전망대에 모인 주인공들은 간호학을 전공하며 국비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후 소정의 시간을 메디칼 센터에서 근무하여 의무근무를 마친 후 해외로 떠난 동문들과 국내에 남아 국내 국립의료기관에서 재직하다 은퇴한 동문들이다. 이 중에서 여러명은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있어 각별하게 친교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외국에서 잠시 귀국한 동문들과는 여러차례 함께 여행을 해온 관계로 익숙한 관계이다. 통일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조국의 미래에 대하여 현재의 북한 모습에 많은 염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많은 질문을 나에게 하는 동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