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법사 현장스님은(601~664) 중국의 4대번역가 중 특히 구마라습 삼장三藏과 불교역사상 불후의 공적을 쌓은 대 삼장이었다. 현장의 속성은 진陳씨이고 이름은 위緯이다.
그는 12세 때 법상종의 낙양 정토사에 출가하여 중이 된 후 혜경 보천 법상 도심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분들의 말이 서로 모순이 있어 629년 당 정관 3월8일 29세에 서역의 스님들에게 직접 공부를 해야 겠다는 뜻을 세웠다.
현장은 당나라 태종시대의 사람으로서 청년시절 재지才智가 뛰어나서 당은 그를 나라의 국보라고 받들 정도의 일대 위인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천축의 원서와 한문의 경전을 독파하였다.
그래서 현장은 인도에 가서 원서인 범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래야 아직 중국에서 번역되지 않은 대 반야경을 위시하여 수많은 경전들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인도 유학의 장지壯志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문화 여건으로서는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중동 아세아를 거쳐서 험준하고 머나먼 길을 보행으로 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자나 호랑이 이리 때와 같은 맹수들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독충들이 많은 준령을 넘어야 했고, 건너기 힘든 강물도 많았다.
무더운 날씨에 숨이 막히는 사막의 고원을 걸어서 천축으로 가는 길은 생사를 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고행이나 위험 따위는 염두에도 없고, 오직 인도 구법의 일념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나라 태종이 나라의 국보로 여기는 현장의 인도유학을 허락 할리가 없었다.
현장과 같은 위인을 다른 나라에 빼앗겨서도 안 되지만, 만약 여행 중에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결사반대했다. 현장은 당 태종의 완강한 반대에 당면하자 몰래 한밤중에 단신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생명을 걸고 스승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 40여명을 데리고 떠나기에 앞서 주석하던 사찰의 부처님께 송별의 축원을 올린다.
"저 이제 이 서쪽나라 천축을 가오니, 길이 험하여 목숨을 잃고, 천축에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 나라 불교를 부처님께서 천년만년 지켜주옵소서" 하며 각오를 다짐하며, 제자 40인을 대동하고 한달 두달 석달 인도를 향한 고행의 길을 계속하였다.
식수나 기후가 맞지 않아 병을 얻고, 먹지 못하여 탈진하고, 독충에 물려 죽어가는 제자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강물에 빠져서 변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때마다 제자들은 "이러다가는 천축에 당도하기도 전에 모두가 다 죽고 말 것이니 더 이상 무모한 구법의 길을 멈춰야 한다."고 건의 하였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하여 서역의 관문인 엄빈국 국경에 이르렀을 때는 40여명의 제자 가운데 살아 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현장법사 한 분 뿐이었다. 현장법사는 구법의 장도에 목숨을 바친 40명의 제자들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다.
"내 이제 이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구법의 길을 헛되게 하랴," 굳게 다짐하곤 하였다. 이렇게 홀로 엄빈국의 접경지역에 이르렀을 때 큰 강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룻배도 보이지 않고 인적도 보기 힘든 외진 곳이었는데, 상류로부터 큰 통나무들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민이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며 상류를 따라 올라가보니 산 속에 폐허가 된 절 하나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잡초로 무성해 있고 무너져가는 건물의 내에는 거미줄이 엉켜 흉가였는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현장법사가 소리를 따라 가보니 노승 한 분이 온몸에서 피고름이 흘리며 흉한 모습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얼른 봐도 문둥병이 틀림없었다. "소승은 중국에서 온 현장이라 하옵니다. 노화상께서는 중병에 드신 듯한데, 무슨 연유로 이 폐사에서 간병하는 이도 없이 홀로 이러고 계십니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본래는 혼자가 아니었는데, 못된 전염병을 앓다보니 도반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버리고 이렇게 혼자 있다오. 이제 나의 생명은 내일이 될지, 모래 죽게 될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목숨입니다."
비참한 이야기를 들은 현장법사는 아무리 구법이 중요하지만 자비를 생명으로 여기는 불교에서 이토록 중병에 걸린 노승만을 홀로 둔 채 떠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구법의 길을 멈추고 노승의 병구원에 전력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위급할 때 쓰려고 생명처럼 비장해오던 약을 먹이고 발라 주면서 극진히 간병을 한 법사의 정성에 약효험이 있어서 노승의 중병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기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완전히 쾌유하게 되었다. 현장법사는 그때서야 다시 천축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노승에게 고별의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노승은 감격하면서 "나를 정성으로 간병하여 난치병을 완치시켜 주었으니 은혜의 보답으로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작은 경전 한 권을 스님에게 드리겠습니다."하며 품속에서 범어로 된 책 한권을 주었다.
그러자 현장은 "뜻하지 않게 노화상을 뵈옵게 되었고 아직 천축국에 가기도 전인데 범서 경전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최상의 기쁨입니다." 현장은 이후부터 구법의 길을 계속하여 수개월 뒤에 천축 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은 그 범서를 받아 몸에 지니고 배독하면서 부터는 어떠한 장애나 어려움 없이 멀고, 험한 천축국에 무사히 당도 하게 되었고, 당시 세계 최고대학이던 나란타 대학에서 열심히 수업을 닦은 결과 부총장과 대학원장의 직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현장법사가 수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천축의 보배"라며 놓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다년간 노력한 끝에 불상과 많은 범서 장경을 모시고 돌아오는 귀국 길에 처음 인도에 들어올 때 만났던 엄빈국의 노승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쓰러져가던 절도 그 노승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약초를 캐는 노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이곳에는 본래부터 절도 터도 없었다오." 하였다.
순간 현장법사에게 스쳐오는 것이 있었다.
"아! 부처님께서 문둥병 환자의 모습을 하시고 나의 자비심과 근기를 시험해 보셨구나" 하며, 천축에 와서 불법에 대한 학문적인 수확도 크지만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감동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현장법사는 본국으로 귀국한 후 수많은 경전 가운데서 그때 노승으로부터 선물 받은 작은 범서경문을 제일 먼저 번역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불자들이 가장 많이 읽고 봉독하는 "반야 바라밀다 심경" 이다.
현장법사가 번역한 경전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대반야 75부등 1335 과, 대당서역 기 12권 등 불교경전 역경사에 큰 공적을 이룩하신 대 삼장이었다. 현장법사는 일생을 두고 경전 번역에 몸 바치다 서안 의 대자은사 에서 63세의 나이로 열반하셨다
글 흥륜사 주지 정법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