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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13-15절. 방탕하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you were called to freedom, brethren; only do not turn your freedom into an opportunity for the flesh, but through love serve one another.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Ὑμεῖς γὰρ ἐπ’ ἐλευθερίᾳ ἐκλήθητε, ἀδελφοί·
you for for freedom you were called, brothers
직역하면 ‘왜냐하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너희가’(Ὑμεῖς: 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부름을 입었다’(ἐκλήθητε)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you were called) 과거에 확실히 부름 받았던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μόνον μὴ τὴν ἐλευθερίαν εἰς ἀφορμὴν τῇ σαρκί,
but not the freedom for opportunity of the flesh
‘삼지 말고’란 동사는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ἀλλὰ διὰ τῆς ἀγάπης, δουλεύετε ἀλλήλοις.
but through the love, serve one another
‘종노릇하라’(δουλεύετ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serve) 항상 종처럼 섬기라는 뜻입니다.
1. ‘너희가 자유를 위해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율법과 죄와 마귀와 죽음에 얽매고 종노릇 한데서 예수님 은혜로 해방되어 성령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 천국에 가게 된 자유와 해방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의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의와 성령님과 영생이라는 큰 축복을 받아서,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주님께 헌신했는지 모릅니다.
2.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은 정죄와 마귀와 지옥 형벌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육체적인 방탕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와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얻었으니,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해방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 은혜에 감격 감사해서, 가난한 동족을 종 삼지 말고 7년 후에는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잊지 말고, 잘 돌보고 매 3년마다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3.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시는 대로 우리도 낭비나 방탕하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겨야 합니다.
성령님이 은혜 주시는 대로 우리도 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마귀에게서 벗어나서 성령님 은혜 속에서 살도록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4. ‘형제들아’라는 것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애정어린 마음으로 호칭한 것입니다.
5.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죄와 저주와 사망과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부패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율법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직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침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이 라틴역본(Vulgate Latin version)에는 ‘성령의 사랑으로(by the love of the Spirit) 종노릇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6. ‘서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서로 연락하고, 격려해주고, 할 수 있으면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7.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으로 잘못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은혜의 교리가 도덕폐기론으로 잘못 오해된 경향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 당시에도 일부 고린도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못 인식해서 계모를 데리고 산 교인이 있었습니다(고전 5:1)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죄짓게 만들고 부패한 육체의 정욕에 따라 방탕하지 말아야 합니다.
8.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종노릇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 있고, 자발적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안내원이라도 의무적으로 안내하는 사람은 전화하는 사람이나 방문자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로써 안내하는 사람은 전화하는 사람이나 방문자에게 행복감을 주게 됩니다.
이와같이 서로 사랑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율법’(law of Christian freedom)을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English Standard Version: For the whole law is fulfilled in one wor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온 율법은--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ὁ γὰρ πᾶς νόμος ἐν ἑνὶ λόγῳ πεπλήρωται, ἐν τῷ
the for all law in one word has been fulfilled, in this
직역하면 ‘왜냐하면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 안에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이루어졌나니’(πεπλήρωται)는 완료수동태로서(has been fulfilled) 이미 이루어져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Ἀγαπήσεις τὸν πλησίον σου ὡς σεαυτόν.
You shall love neighbor of you as yourself
직역하면,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할지니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Ἀγαπήσεις)는 미래형으로서(You shall love) 장차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40).
그리고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나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롬 13:8).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완성한 자라”고 했습니다(롬 13:10).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동족에게만 국한시켰고, 이방인들은 처결해야 할 원수들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은 이웃 사랑의 대상을 유대인에 한정하지 않고,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에서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원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은 이웃 사랑입니다.’( the love of God is the cause, and so the evidence of love to the neighbour). by Gill's Exposition.
3. 유대인 율법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613개 명령들을 주셨다고 했고, 다윗은 이것을 11개로 축소했고(시 15편), 이사야는 6개로 축소했고(사 33:15) 미가는 3개로 축소했고(믹 6:8), 아모스는 하나로 축소했고(암 5:4), 하박국은 다시 하나로 축소했는데(2:4),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Gill's Exposition
4. 사랑은 율럽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f you bite and devour one another, take care that you are not consumed by one another.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εἰ δὲ ἀλλήλους δάκνετε καὶ κατεσθίετε,
if however one another you bite and you devour
직역하면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이란 뜻입니다.
‘물고’(δάκνετε)는 현재형으로서(you bite) 현재 물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먹으면’(κατεσθίετε)도 현재형으로서(you devour) 현재 삼키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βλέπετε, μὴ ὑπ’ ἀλλήλων ἀναλωθῆτε.
take heed, not by one another you might be consumed
직역하면 ‘피차에 의해서 너희들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멸망당하지 않도록’에서 동사(ἀναλωθῆτε)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you might be consumed) 완전히 멸망당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조심하라’(βλέπετ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take heed) 항상 조심하라는 뜻이고, 원형( βλέπω)은 ‘바라보다, 분간하다’(look, discern)란 뜻인데, 명령형에서는 ‘경계하라, 조심하라’(be alert, take heed)란 뜻으로 쓰입니다.
1. 교회 내에 분열과 싸움이 있으면, 피차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 이런 분열과 내분이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서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6:52).
피차 물고 먹는 모습은 맹수들이 싸우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분열과 싸움이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이 싸움은 맹수들(wild beasts)과 같은 싸움인데,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두 파가 싸우는 것은 유대주의(율법주의) 추종자들과 복음주의 성도들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3. ‘피차 물고 먹는 모습’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분열과 다툼의 틈을 기워주는 아교풀과 같은 것입니다(love is the cement of it).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성령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정과 교회와 기관에 평화와 행복이 깃든 생활을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