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라고 부르기
강 동 구
부부가 서로를 호칭할 때 다양한 표현이 있다.
예전에는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들은 아내를 부를 때 임자 할멈 등으로 불렀고 할머니들은 남편을 부를 때 흔히 영감~ 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이런 표현들이 사라졌지만, 그 시절에는 왠지 부르기에 따라서 따듯하고 훈훈한 정감이 가는 느낌이 든다.
영감이라는 말은 높은 벼슬이나 중요한 공직에 종사하는 남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지만 지금은 노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마누라도 원래는 마노라라는 여자 상전을 높여 부르는 극 존칭어였으나 자기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한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음성으로 부르냐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영감이나 마누라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영감! 이라고 하대하듯 말하면 듣기가 거북하지만, 영감님 또는 김 영감님이라고 존칭을 쓰면 높여 부르는 말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마누라라고 말하면 조금은 상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마누라~ 하고 정감있게 부드럽게 부르면 사랑스럽게 들린다.
지금은 배우자를 호칭할 때 젊은 사람들이나 중년 노년층에도 여보 당신이 대세다. 여보 라는 말은 여기 보세요. 여보세요라는 말이 배우자를 부르는 줄임말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설이 있다. 배우자를 여보 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오십여 년 전 내가 결혼하던 1970년대에는 연세 높으신 어른이 간혹 배우자를 호칭할 때 여보 라는 호칭을 썼지만, 젊은이들은 여보 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이가 조금 든 중년도 부모나 웃어른들 앞에서는 여보 라는 호칭을 삼가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여보 라는 호칭이 나이와 상관없이 배우자를 부르는 보편적인 호칭이 되었다. 큰아들이 결혼하자마자 며느리는 시부모 앞에서 여보 라는 호칭을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럼없이 부르는 것을 보고 당혹스러워 한 적이 있다.
아들 내외는 지극히 상식적인 당연한 표현이라 생각하겠지만 듣는 나는 얼른 받아들이기가 싶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반백 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까지 서로에게 여보 라는 호칭을 해본 적이 없다.
결혼 초에는 이봐 이봐요 등으로 호칭하다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누구 엄마 누구 아버지로 부르다 보니 아들은 이제 중년에 이르렀고 우리는 산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부부간에 호칭을 새롭게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세추이라 하지 않던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서 나도 여보 라는 말을 아내에게 하고 싶은데 아무리 용기를 내어보아도 도무지 어색하고 민망하여 입이 열리지를 않는다. 언어의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 안타깝다.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오십여 년 전 군 복무 시절 선임병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순간 튀어나온 말은 김 병장님 이게 얼마만 인가요? 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김 병장이다.
이처럼 어떤 말이 입에 익숙해지면 고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간혹 나이 육십 칠십이 된 노인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더러 볼 때가 있다.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일부러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상대에 대한 호칭도 나이에 걸맞아야 한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칠십 노인이 부모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면 부모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싶다. 부부간에도 나이에 합당하게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 하니 달링 누구 아빠 엄마라고 할 수 있지만, 노인들이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우스울까?
부모와 자식은 일 촌이요 형제 자매지간은 이촌이고 부부는 무 촌이라고 했다. 부부 사이는 가장 가까운 사이고 동등한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계이기에 더욱 예절이 필요하고 존중과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 부부간에도 서로를 호칭하는 말은 존중과 배려가 전제되어야 마땅하다.
부부간의 호칭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여보 당신이 제일 무난하고 합당할 것 같다. 나 역시 아내를 그렇게 부르고 싶고 아내도 나를 여보 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연습하면 그리 오래지 않아 익숙해지지 않을까?
말은 우리의 삶 속에 너무나도 소중한 소통 수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환경도 변하여 말도 무수한 변화를 겪으면서 새로운 신조어가 생겨나고 여러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난무하는 세상이다.
여보~ 당신 생각할수록 정겹게 느껴진다. 직접 불러보면 더욱 친밀감 있게 들릴 것 같다. 우리의 소중한 언어문화 언어습관을 잘 보전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여보 당신이 많이 회자되고 있지요. 오빠라는 신세대의 호칭이 왜 그렇게 희한한지 ㅎㅎ
참고로 보통 여자 16세를 파과나이라고 한다. 破瓜 오이를 깨트리는 나이, 참외를 깨트릴 나이, 예전엔 16세 때 경도가 있을 때라 여자의 몸이 깨트려진다고 하여 붙여진 게 파과지년 破瓜之年이다. 남자의 경우 64세를 파과나이라고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