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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배출한 최고의 천재로 화이트 해드를 들 수 있다. 대단한 석학이었던 그는, 영국에 있는 옥스프드대학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는 나름대로 성공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자부심도 있고 인생에 대한 체계적인 시스템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인격까지 훌륭했다. 온화, 배려, 만점짜리 인생 같았다. 자동차를 몰고 가던 어느 날, 어떤 아주머니가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고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자동차를 태워주었다. 자동차에 올라탄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걸 보니까, 예수님을 믿으시나 봐요." 이에 화이트헤드가 “아니에요 성숙한 인격만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철학적인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며 자율적인 인간상과 득도한 인간이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품위 있는 인격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아주머니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며 내렸답니다. "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 지긋이 먹은 주제에 예수님 안 믿고 죽으려면 어쩌려고 그래?" 이 말은 화이트헤드를 설득하자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도, 논쟁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머니 속에 있는 신앙과 인격에서부터 나오는 고백이며 아주머니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외침이었다. 아주머니에겐 석학이든 철학자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아주머니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오직 이것이었다. “예수님” 예수님! 이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렇게 공부한 사람이건만 화이트헤드는 그때 당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무슨 책을 본다든지 식사를 할 때도 아주머니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거울 앞에 섰을 때 희끗희끗한 머리가 눈에 들어 오면 "나이 지긋이 먹은 주제에 예수님 안 믿고 죽으려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다음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옥스퍼드에 있는 대학 채플에 갔다. 이번에는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계적인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예배에 왔기에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설교를 제쳐두고 화이트헤드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설교를 한 것이다. 그다음 주에도 화이트헤드가 예배를 드리러 오자, 목사님이 의기양양해졌다. '오~나의 철학적인 설교가 감명 깊었나 보군. 우리 교회에 화이트헤드가 다시 나오다니.' 목사님은 그렇게 몇 주 동안 계속 철학책을 뒤져가면서 설교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목사님과 화이트헤드가 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생겼다. 목사님이 "철학적인 제 설교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라는 뉘앙스로 말을 꺼내자, 그가 이같이 답했다. "나는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철학 이야기를 들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에게 예수를 전하던 아주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렇게 평안 속에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아주머니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버렸던 신앙을 찾고, 잃었던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사람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같아야 하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당장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자존심 다 내버리고, 원래 성격보다 훨씬 친절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자매와 결혼하기 위해서 더 좋은 인상, 친절, 배려, 관심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변했어!” 변한게 아니라 원래가 그랬는데 잠시 변했었던 모습을 봤을 뿐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화이트헤드의 이야기에서는 두 가지 오해가 등장합니다. 1.친절을 베푼 화이트헤드가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는 아주머니의 오해, 2.굉장한 석학의 화이트헤드가 철학적인 설교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라는 목사님의 오해! 이 두 오해는 겉모습만 본채 속마음을 알 수 없이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겠지만 아주머니의 오해를 통한 계기가 천재 화이트헤드를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하게 만들고, 과거에 버렸던 신앙을 찾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금식에 대한 오해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나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악의적인 의도로 물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태도가 바람직한 것 같은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이 율법에 정한 금식의 날이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 월요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전통적인 금식일도 지키지 않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있는 사실에 대해 다소 인간적인 눈으로는 분을 품은 것을 표출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신랑 예화 / 생베 조각 예화 / 그리고 새 포도주 예화를 통하여 금식의 본질을 설명하시며, 천국 백성의 새로운 삶의 원리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으로 인하여 천국 백성이 되셨나요?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는 백성의 태도가 아닌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신랑과 혼인 집 손님들 예화[마9:15절]
이 예화에서는 ‘메시야 환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혼인 집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여기 혼인 집 손님들이 상징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고대하던 메시야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까요? 슬퍼해야 할까요? 물으나 마나한 질문입니다. 당연히 기쁨으로 가득차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혼인 집 손님들은 그냥 잠시 왔다가는 손님들은 아닙니다. 원어로 직역을 하면 ‘신부 방의 아들들’ 어떤 성경에서는 ‘신부 집의 아이들’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속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저와 여러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천국 백성입니다.
결혼식은 어떻습니까? 아주 즐겁습니다. 특히 신랑의 얼굴에 함박 웃음 뿐만이 아니라 두 광대뼈가 하늘로 치솟습니다. 우는 사람이 있을까요? 뭐~ 신랑을 사모했던 신부가 아닌 다른 여인이나, 신부를 사모했던 신랑이 아닌 다른 남성이 울 수도,,, 제가 결혼할 때에는 누가 울었을까요? 제 사모가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좋은 날! 미스테리입니다! 아직까지 묻지 않았습니다. 한번 물어볼까요? 아~~ 너무 좋아서?^^
실제 유대인들은 금식인인 월요일이나 목요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날이 결혼 예식 기간중이면 금식하지 않았답니다. 결혼의 기쁨이 금식으로 인하여 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금식을 한다는 것은 기쁨이 깨질 수도 있고, 지금은 금식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금식해야 할까요? 신랑이 잠시 빼앗기는 그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날에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상의 헛되고 헛된 일시적인 명예, 부, 인간관계가 아닌가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신랑이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쓰여진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서 월, 목이 아닌 수요일과 금요일날 금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듭니다. 즉 금식의 본질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치우친 금식에 대해서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금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한 금식은 회개함으로 자신의 삶의 변화되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사야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의 본질은 인본적인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함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금욕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기도와 은사의 능력을 더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 논쟁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첫 번째 삶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금식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금식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가 나와 같은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토요일날 성전을 청소하시는 권사님들, 주일날 예배를 섬기고 식사봉사를 하시는 모든 분들은 이러한 ‘사랑’을 담아 하고 계십니다. ‘왜 나만하지?’, ‘더 젊은 저들은 왜 안해’, ‘으이그 힘들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청소할 수 있구나, 예배드릴 때 하나님과 성도들이 좋아하겠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니 기쁘다, 내게 이런 건강을 주셔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것이 진짜 금식의 본질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기쁨을 나누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기쁨을 증거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생베 조각의 예화[마9:16절]
생베 조각은 표백을 하거나 제단을 하지 않는 천, 즉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새 천을 말합니다. 이러한 새 천은 낡은 옷에 붙이지 않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멋이 없습니다. 오래된 낡은 옷이 빵꾸가 나거나, 찢어졌다고 깨끗한 새 천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새 천의 가치가 떨어지고 아까워지겠죠? 멋이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한때는 그것을 멋이라고 일부러 새것을 찢거나, 헌 것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어울리진 않습니다.
2)옷이 망가집니다.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일 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옷에 주름이 잡히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생베 조각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낡은 옷’인 구약의 율법으로서 99% 본질은 부족하고, 형식적으로만 지켰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사고와 ‘생베 조각’인 예수님의 복음이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율법을 무시하고, 질서와 규범의 기초를 파괴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고 이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정한 신앙 생활의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셨습니다. 일주일에 무조건 두 번씩 하는 금식 규례 같은 것은 오히려 신앙을 망치는 요소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2:22절에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인간들이 만든 형식적인 종교 규례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합니다.
이사야64:4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여기서 ‘더러운 옷’은 지저분한 것이 묻은 옷이 아닌 ‘걸레가 된 너덜너덜한 상태’를 말합니다. 걸레를 세탁소에 맡기는 분은 없습니다. 걸레를 아무리 삶고 수선해도 걸레입니다. 그것을 걸치면 거지꼴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율법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지킬 수도 없고, 형식적으로만 지키다보니 의의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구속의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저와 여러분에게 더러운 옷을 벗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두 번째 새로운 삶은 이것입니다. 따라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더러운 옷’이 아닌 ‘의의 옷’을 입혀주셨기에, 그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인 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여 거룩한 ‘흰 빛깔’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진실된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죄가 우리 마음에 입은 ‘의의 옷’을 더럽히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새 포도주 예화[마9:17절]
새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그 부피가 팽창합니다. 그래서 신축성이 없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뻥~~~~” 터져서 새 포도주도 쏟아져 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도 버려야 합니다.
당시 포도주에 대한 개념, 가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포도주가 맛있다고 해서 그것이 음료처럼 생각하고 먹었다가 바로 뱉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포도주는 그저 술의 개념입니다. 요새는 요리에도 사용하지만 분위기를 잡고 취하고자 하는 것에 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는 제물을 드릴 때 마지막으로 부었습니다. 이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또한 십일조의 한 물품이었고,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한 음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첫 번째 사건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포도주는 술의 문화가 아닌 석회질이 많은 물 대신 먹었던 음료입니다. 우리 나라야 부어라 마셔라 죽자고 먹지만, 그들의 문화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주는 오래 묵으면 좋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면 포도주의 맛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주류 제조업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습도 온도를 아주 정성스럽게 맞춰 보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포도주보다는 새 포도주가 그 효능이 살아있는 포도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맛 잃은 소금과 같은 맛 잃은 포도주’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하고, 사람들에게도 유익함을 줄 수 없는 무익한 자들이었습니다. 묵은 신앙 전통과 규례만으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 배만 불렸던 악한 자들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러한 역할을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제물로 바쳐집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병을 고치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이웃에게 덕이 되고, 득이 되는 산 신앙인들, 유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이 ‘나 오래 신앙생활 했다. 이게 정답이야’ 묵은 전통만을 강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자꾸 발효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로는 감당이 안됩니다. 새 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날마다 새로운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드릴 때 날마다 새롭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고 넘치며 주위에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새로운 삶의 원리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따라합니다. “예수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 즉 오직 예수로만 사는 인생!
천재 철학자이자 수학자 블랙헤드가 아주머니가 툭 던진 한마디 “예수 안 믿고 죽으려면 어쩌려고 그래?”, 오직 예수님만을 진리로 삼은 그 복음으로 날마다 넘치는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천국 백성으로 사는 청년을 소개하면서, 우리모두 믿음의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 믿는 청년 – 김건희]
천국 백성의 기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 거룩한 삶 / 예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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