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울림-이야기를 품은 글
2012 《에세이21》여름호를 읽고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은 작가의 단순한 체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의미를 창출해 낼 때 작품이 된다. 어떤 학자는 현대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인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의 반대 개념으로 호모 나랜스(Homo-narrans)라 지칭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야기 곧 서사는 독자가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떠올릴 수 있고 작가가 의도하는 감정까지도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어난 일의 시간 흐름에 따른 서술’이기보다 '어떤 행위가 줄거리를 갖추면서 시간적인 흐름을 갖는 구조'로 이야기를 품을 때 독자에겐 공감이 되고 울림의 감동도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삶에 경건해지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까지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소리까지도 들으면서 자연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수필은 그런 관조의 문학이다. 하지만 볼 것을 볼 줄 알고, 들을 것을 들을 줄 안다는 것은 어떤 경지다. 때가 되어야만 가능하고 수많은 노력 후에야 할 수 있다. 이런 귀와 눈과 마음이 맑은 글도 쓰게 한다. 수필은 내 마음의 작은 물결이 읽는 이에게로 퍼져나가 그 마음에도 나만큼의 물결을 일으키며 그와 내가 하나가 되는 공감의 결과물이다.
운수재를 오래 떠나지 못한 것은 - 솔밭에 집을 지어 몇 그루의 소나무가 뜰에 서있는 것도 운치가 있고, 옥상에 올라서면 인수(仁壽), 백운(白雲), 만경(萬景) 등 삼각산이 바로 눈앞에 건너다보일 뿐만 아니라, 멀리 오봉(五峰)이며 도봉(道峰)까지 바라다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손수 뜰에 심어 기르는 감나무며 매화나무 그리고 모란들과 더불어 사는 일이 여간 즐겁지가 않았다. 임보의 <운수재(韻壽齋)> 중
노 시인의 이런 안목과 관조, 물론 오래 같이 살면 정(情)이 든다. 하지만 정도 내가 먼저 주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운수재>에는 작자의 사랑이 그만큼 젖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작가가 준 정이 가 닿아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함께 사는 것이 즐겁다.
아침에 끌어내고 저녁에 들여놓고 온종일 지키기를 일주일이나 하게 된 것이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략)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을 드니 폐지덩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가져갔을까. 말 한마디 없이. 잠깐 허전했지만 이내 후련해졌다. 누가 가져갔든 그 사람에게 좋으면 좋을 것이지. 그래 잘 됐다. 해피 앤딩이다. 허창옥 <해피앤딩> 중
놓치면 큰일이다 싶지만 막상 그리 되면 또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게 인간이다. 그것 아니면 큰 일 날 것 같지만 정작 일이 터지면 방도가 보이고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허창옥은 놓아버리는 것이 비로소 나답게 하는 일인 것을 한 사건을 통해 깨닫는다. 나를 놓아버릴 때 나도 자유로워짐이다.
삶의 흐름이 멈춘 기슭에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여 버린 낡은 선체 같은 몸을 견뎌 내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삶의 물살을 가르느라 마디마디 옹이가 박힌 힘센 손이었지만 이제는 수저도 들지 못한다. (중략)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다 흘러갔다고 정신을 놓기 시작하는 어머니. 아흔일곱이면 오래 살아주셨다. 그러나 죽음이 목전에 놓이자 삶이 언제 있었던가 싶다. 하늘의 파수꾼이 이승의 인연은 다했노라고 어머니를 바람처럼 데리고 가버릴 것 같아 나날이 불안하고 절박하다. 이필영의 <꽃자리> 중
아흔일곱이면 오래 살아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찌 그만하면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인가. 작자가 더욱 불안하고 절박한 심정인 것은 이만큼이나 사셨기에 떠날 시간이 더 가까웠다는 인식이다. 삶은 붙잡기로 놓치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작가는 이제 그만 놓아야 할 때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있다.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일까.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기다림이다. <보너스 인생> <아직도 여행 중> <봄꿈을 꾸어라>는 바로 그런 기다림의 미학이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끈들을 부여잡고 살아온 것 같다. 때론 느슨하게 놓아버릴 줄도 알고 버리지 못한 욕망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때가 지금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나보다. 보너스로 받은 삶인데 뭐 그리 까탈을 부리며 움켜만 쥐고 살 일인가.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일어나자. 새롭게 맞는 봄을 느껴보자. 민남혜의 <보너스 인생>중
봄은 생명이요 새 세계다. 그러나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새로이’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전의 나를 벗어야 새로운 나가 된다. 움켜쥐려고만 했던 삶을 벗어버릴 때 새로운 삶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지금 삶이 보너스’라고 느끼자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달라진다. 새롭게 보이면 의미도 다르게 다가온다.
다 무너지고 헐려서 없어질 이 동네의 낡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있는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해 두고 싶어서, 나는 아직도 동네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다. 박미령의 <아직도 여행 중>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은 다르다. 오래된 것엔 고상함과 품위와 은은함이 있다. 냄새가 다르다. 묵은 김치 맛 같은 그만의 맛과 냄새는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 박미령의 여행은 기다림을 통한 새로운 보기요 찾기다. 그만의 눈, 그만의 청각과 후각으로 찾아내기이다. 그런 마음이기에 맑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다림의 자리도 넉넉히 마련된다. 바쁜 현대인을 향한 그가 맛본 맛에 대한 메시지다.
우리 집 매화에 꽃눈이 매달리고 난초가 묻혀있는 땅이 말랑말랑해지면 나의 심심풀이 화투 놀이도 끝이 날 것 같다. 정혜옥 <봄꿈을 꾸어라>
매화는 겨울의 끝마루에서 핀다. 그러나 매화가 피면 이미 봄이다. 삶에도 작은 사계절이 반복된다. 기다림만큼 맞이하는 기쁨과 열매도 크고 값지다. 삶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작가이기에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알뜰하다. 겨울을 겪어야 봄이다. 화투놀이도 기다림이다. 큰 것, 화려한 것이 아닌 심심풀이 놀이 같은 가벼움으로 보내는 기다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작가는 우리 귀에다 소근 대고 있다.
안타깝게도 변해명(1939.3.30-2012.5.8)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수필에 대한 그 분의 열정과 사랑을 이제 어디서 찾을까. 가시는 날까지도 자신의 삶을 수필처럼 추스르시던 분, <오아시스와 신기루>는 어쩌면 남은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메시지 같다.
장관이었다. 지평선을 덮은 그 큰 호수의 정경은 사막을 여행하며 지친 나그네에겐 호수를 향해 그대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주기에 충분할 것 같은 신기루였다. (중략)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 없는 저같은 신기루를 좇아 끝없는 방황을 마지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지. 월아천 같은 작은 샘물을 찾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향해 달려가려는 우리에게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 큰 신기루라는 생각을 해 본다. 변해명의 <오이시스와 신기루> 중
변해명 선생도 신기루와 오아시스를 번갈아 만나는 삶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선생도 우리에게 신기루와 오아시스였다. 그래서 우린 선생이 남겨놓은 작품들에서 더욱 선생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구활의 <겨울바다,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겨울바다의 은유다. 몽환적인, 베토벤의 ‘운명’ 야외 공연장, 노천미술관 같은 겨울 바다를 작가는 왜 찾았을까.
‘집으로 돌아가도 완연한 봄이 올 때까지 이곳 겨울바다에서 연주되고 있는 ’적막을 위하여‘란 심포니가 귓가에 계속 들려올 것만 같다.’ 겨울바다는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기억이 아닌 소리로 현실을 열고자 한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는 시인처럼 외로운 그는 가슴으로 음악을 켜며 봄을 기다린다.
이난호의 <그때 그들을 안을 수 있을까>의 ‘온몸으로 퍼지던 저림’은 절절한 어머니의 사랑 마음이다. ‘춥네’ 하고 온 몸으로 퍼지는 저림, ‘두어 번은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가볍게 했고 두 번은 아릿하게 했’던 저림, 어머니는 ‘일곱 살배기 손자를 업은 게 아니라 일곱 살배기 아들을 안아본 거’라는 저림, ‘내가 두 형제를 서울학생 만들겠다며 남편을 시골 하숙방에 떨굴때 어머님은 내력이구나’ 하시던 저림, ‘내가 뒤늦게 어머님의 살림요령이나 내림손맛에 솔깃해질 즈음 어머님은 맨 정신을 놓으셨다.’는 저림. 모든 것은 떠난다. 떠나는 것도 자연현상이다. 마음도 정신도 몸도 떠나간다. 그러나 나만 두고 떠나면 그 그리움은 어떻게 감당할까.
수필의 서사(이야기)는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속내이다. 그것을 듣는 이가 즐겨 들을 수 있도록 하면서 공감케 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주제가 명확하고 구성이 명료하면 이야기의 전달력도 높아져서 맛깔스러운 얘기로 쉽게 공감도 된다. 큰 공감이 울림으로 감동이 된다. 지면상 놓친 김민숙의 <이 봄날이 길어도 좋겠다>도 좋은 수필이다. 이야기가 되는 글, 이야기를 품은 글이면서 주제화와 의미화가 잘 된 수필이 좋은 수필이다.《에세이21》여름 호에선 글쓴이들의 진정과 진실이 전해져와 읽는 내내 행복했다.
1206/에세이21 2012. 여름호 계간평/
최원현 essaykorea.net
《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등 1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