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무작정 걸어보기
(나마스카 5월)
둘째 아들이 혼자 순례 길을 나섰다. 우리 집 아파트에서 순천 시청까지 텐트와 배낭을 벗 삼아 걸었다. 순천까지 4박 5일 걸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걷고 싶었다.
4월 말 석가탄신일, 노동절, 주말 연휴가 이어 졌다. 앞으로 세상은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인간 시스템이 강제 종료 되었다. 인간들 욕망에 신호를 보낸다. 코로나로 세상과 인간이 변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밀집 장소를 피하고 날씨도 좋다 하니 걷기 좋은 곳은 만경강 길이다. 코로나로 중단했던 독서모임에서 책 선정을 위해 네 사람이 만났다. 토론이 끝난 후,“만경강 무작정 걸어보자”끼니는 번거러우니까 사 먹고, 잠은 나이 들어 힘드니 모텔을 이용하기로 했다. 석가탄신일날. 봉동 다리에서 9시쯤 만나자고 대충 이야기 했다. 이후 모임에 관련된 공지는 없었다. ‘네 사람 중 한사람만 걸어도 함께 걸으면 되지’
4월 29일 석가탄신일
첫날 9시 10분쯤. 남님, 진아가 오고 영희네 가족 남편과 아들 둘이 함께 갔다. 영희는
“연락이 없어서 가족들이랑 지리산 둘레길 가려다 이리로 왔어”말했다. 성인 5명에 초등6, 고2 학생이 추가 되어 7명이 모였다. 여럿이 함께 걸으니 발걸음이 즐겁다. 목포에 살 때 도법 스님 따라 평화 순례를 했던 지역이 전주천 이였다. 그때가 떠올랐다.
만경강은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하여 완주, 전주, 익산, 김제, 군산을 거쳐 새만금으로 흘러간다. 전라북도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100키로를 적시고 서해바다로 흐른다. 만경강 물이 흐르고 주변에 습지나 갈대 풀이 있다. 그 옆에 자전거 도로도 있다. 강둑길로 올라오면 네비만 모르고 아는 사람들만 다니는 2차선 도로가 있다.
우리는 강둑 아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여 걷기 시작했다. 봉동 터미널 봉신교에서 9시 20분에 출발했다. 가까운 마그네 다리 정류장이 있는 봉동교를 지났다. 고산천교에서 소양천이 만난다. 삼봉 장례식장쪽 회포대교을 지났다. 삼례 하리쪽 하리교 다음에 삼례교가 나온다. 점심때 쯤, 삼례 비비정 정자가 있는 만경강 철교 밑에서 영주언니가 합류를 했다. 영희 생일이라고 영희 남편이 푸짐한 도시락을 가져 오셨다. 모두 먹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복 입은 분이 등장했다.“철교 밑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했다. 영희 남편은 전주 동산역 역장이시란다.
완주 삼례읍 후정리. 만경강과 전주천이 만나는 곳이다. 비비정 예술 열차에 올라탔다. 비비정 예술열차 아래로는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구 만경강 폐 철교가 있다. 1928년 일본에서 호남지방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당시 한강철도 다음으로 2번째로 긴 교량이다.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제579호로 등록 되었다. 완주군은 이곳에 4량의 새마을호 폐 열차를 구입해 리모델링하여 비비정 예술열차로 개장하였다.(한국관광공사)
“여기가 노을로 유명 하는데 오늘 처음 와 봤네. 가족들이랑 함께 와야 겠다.”
비비 정부터는 어린 초록 벚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걸었다. 아름다운 벚꽃을 회상하며 걸었다. 해전 리에서 만경강과 익산천이 만나는 곳이다. 익산교 다리를 건너 익산 춘포면 용연리에 도착했다. 춘포문학마당 표지판을 보고 걸었다. 문학에 관련된 시설물이 있겠지? 도착해 보니 작은 주차장과 정자. 중요한 화장실이 있었다.
5시쯤. 숙소를 정하기 위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었다. 춘포면 소재지 모텔은 폐업했고 민박집은 멀고 게스트 하우스도 폐업중 이었다. 농촌 마을 인구수가 줄어드니 빈집이 늘어나고 상권이 사라지고 있다. 한시간 정도 여기 저기 전화를 하면서 고민 했다. 면 소재지에서 익산 인화동 가는 버스를 타고 이마트에서 내렸다. 남부 공원 맞은 편 호텔로 들어갔다. 3인실 숙소가 65000원 이였다. 모텔촌 동네에서 동태 탕에 밥과 수제비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몇 년만에 마트야”며 마트 구경을 했다. 피곤함은 수다에 장애가 될 수 없다. 숙소가 모텔이여서 그런가? 우리들 밤은 부부의 세계와 섹스로 끝없이 이어졌다.
5월 1일 노동절 130주년
두 번째 날은 5월 1일 노동절 이다. 뉴스를 검색하니. 4월 28일은 국제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다음날인 29일 이천 물류 센터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황금연휴로 들떠 있던 날 38명의 일용직, 이주 노동자들이 사망소식이 들려와 슬펐다.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거나 죽지 않는 세상이 오길 기도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지난밤이 길게 느껴졌다. 차광 시트지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창문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고 아름다운 오월이 빛나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러 누룽지와 김치를 챙겼다. 우리는 호텔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아침 메뉴을 예약하면 요리를 해준다는 것이다.“이래서 사람들은 돌아다녀 봐야 되”우리 머리는 90년대식 숙박업소에서 발전을 멈췄다.
진아 남편이 진아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우리도 그 차를 타고 되돌아서 걷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목천포천을 찾아 나섰다. 다시 만경강을 만나 삼례 쪽으로 걸었다. 진아 남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왔다. 엄마를 만난 아들 미소가 행복 해 보인다. 삼례읍 퓨전 식당에서 각종 메뉴를 주문하여 먹었다. 상수 샘은 우리를 화포 대교 쪽에 내려 주었다.
우리 넷은 다시 쉬며 걸으며 을 반복하였다. 삼례쪽은 강둑길 마을 마다 정자가 있었다. 걸을 때 반드시 앉아만 할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정자을 외면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쉬려고 정자를 보았다. 정자 입구를 자가용이 막고 있었다. 마루에는 텐트가 쳐져 있고 아이가 놀고 있었다. 앞쪽에는 남성이 우리를 외면하며 스마트폰 질을 하고 있었다. 레이져를 쏴 보았지만 일절 반응이 없다. 포기하고 강둑으로 올라왔다. 무식하고 이기적 이고 시민의식이 없다고 성토 했다. 경찰차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다음에는 경찰에 신고를 해보면 어떨까?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은 눈과 귀로만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만 만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심히 차단막을 넘어 강물을 걸었다. 지압도 되고 시원하다.
강둑길을 걷다 다시 자전거 도로로 내려오니 봉동교가 보였다. 진아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우린 영희네 집에 이박을 하기로 했다. 영희 남편과 아들들이 숯불에 고기를 굽고 각종 텃밭 야채를 씻어 놓았다. 맛있는 김치와 장아찌. 빠지지 않는 마실 거리. 거기에 진아 가족과 남림 남편과 딸이 합류 했다. 유쾌하고 즐거운 저녁 만찬이다. 오랜만에 도보 여행과 다른 가족들 만남으로 나도 고산 지역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마신 여러 가지 음료수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와 영주언니는 다시 이야기를 고개를 넘다가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다.
5월 2일 토요일
오월 아침은 상쾌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웠다. 영희 남편은 아침 밥상도 대령하였다. 시래기 된장국에 생선구이. 다른 집 남편이 차린 아침 밥상을 받으니 감사하고 송구스러웠다. 식사 후 영주언니는 남편과 함께 천호성지로 떠났다. 남은 우리들 넷은 화암사로 향했다. 화암사 입구부터 나무들이 초록 초록 하고 있었다. 청량한 바람. 새소리, 아기 다람쥐. 계곡소리를 들으며 화암사에 올라갔다. 활짝핀 모란꽃, 금낭화 꽃잔디가 빛나고 있었다. 하산길에 점심메뉴는 국수와 부침개로 낙찰됐다. 다시 진아네 가족이 소환되고 남림 남편도 오셨다. 맛나게 먹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낮잠 잘 권리가 주어졌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들은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아무 계획없이 걸었다. 먹을 것도 잠잘곳도 정하지 않고 다가오는 대로 대응했다. 몸은 반응했다. 오후 부터 허벅지 안쪽이 아프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상쾌한 날씨가 우리 여행을 뒷받침 해주었다.
유유자적. 아무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걸었던 감사하고 충만한 여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