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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초기(사환기仕宦期) 산문에 대하여
1. 다산 작가론과 사환기仕宦期 산문 연구
주지하다시피, 문장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는 매우 경직된 외피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문장론인 「오학론五學論3」은 일견 문장 무용론에 가깝다. 「오학론3」의 극단적인 입장에서 다소 물러나더라도, 그의 문장론에서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구도가 견고하게 유지된다. 그간의 연구는 정약용의 문학론이 갖는 성격에 대해 ‘문文이 도道에 봉사하는’ 사유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도’의 실질적인 내용이 달라진 것이라고 정리한다. 이때 달라진 ‘도’의 내용은 “인간의 사회적 실천윤리의 가장 올바른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론적 입장에 관한 한, 정약용의 문학에선 가볍고 사소한 일상의 감각을 다루는 서정 산문이나 섬세하고 기발한 미의식, 문예미의 배타적 추구 같은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형이상학적인 진리 대신 사회적 실천윤리로 ‘도’의 내용이 대체되었다 해도, 그가 추구하는 ‘도’란 여전히 매우 무거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당대 조선에 유행한 소품이나 소설체 등에 대한 그의 배격은 잘 알려진 것이다.
실천적인 면에서도 그의 문장은 대부분 실용과 경세의 문장들이다. 학문적 관심과 현실적인 목적의식을 위주로 하는 무거운 글들이 주류다. 따라서 정약용 산문의 특징이라면 그 내용의 사회ㆍ역사적 가치에 있지, 문예적 가치에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각 분야의 연구 자료로는 유명한 글들이 많지만, 문학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으로 다루어진 산문은 별로 없는 것도, 그만큼 내용상의 가치가 문예적 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 산문들에선 이상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경쾌한 서정산문들이 발견된다. 이 산문들의 ‘가벼운’ 특징은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정약용 산문 전체의 성격과 일견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초기 사환기에 집중되어 있다. 본고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산문들을 정리할 필요를 발견한다. 특정 시기에 작가 자신의 문학론과 배치되는 성향의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작가로서의 정약용을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정약용 작가론의 일환으로 초기-사환기 산문의 성격을 정리하려 한다.
2. 감각적 서정산문의 세계
- 「국영시서菊影詩序」의 분석을 중심으로
이 시기 정약용의 산문들 중에 그림자를 소재로 한 글이 두 편 있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소재로 한 「국영시서」와 초보적인 사진기의 원리를 다룬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이다. 이 두 편의 글은 그림자라는 독특한 소재와 표현방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제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정약용 산문의 특징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만한 단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두 편의 산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1) 「국영시서」 분석
「국영시서」는 죽란서옥 시절인 1794년 무렵의 작품이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시회가 그의 집에서 베풀어졌는데, 「국영시서」는 이 시회에 붙여진 시서詩序 혹은 연서宴序다.
(1) 국화가 여러 꽃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이 네 가지 있다. 늦게 피는 것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하나이고, 향기로운 것이 하나이고,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은 것이 하나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하기로 이름나서 국화의 취미를 안다고 자부하는 자도 사랑하는 것이 이 네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특별히 촛불 앞의 국화 그림자를 취하였다. 밤마다 그것을 위하여 담장 벽을 쓸고 등잔불을 켜고 쓸쓸히 그 가운데 앉아서 홀로 즐겼다.
(2) 하루는 남고 윤이서에게 들러 “오늘 저녁에 그대가 나에게 와서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구경하세.”하였다. 윤이서는 “국화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어찌 밤에 구경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몸이 아프다 핑계하고 사양하였다. 내가 “구경만 한번 해 보게.”하고 굳이 청하여 함께 돌아왔다.①
저녁이 되어, 동자를 시켜 일부러 촛불을 국화 한 송이에 바싹 갖다 대게하고는, 남고를 인도하여 보이면서, “기이하지 않은가?”하였다. 남고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자네의 말이 이상하군. 나는 이것이 기이한 줄을 모르겠네.”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렇지.”라고 하였다.②
한참 뒤에 다시 동자를 시켜 법식대로 하였다. 이에 옷걸이ㆍ책상 등 모든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물건을 제거하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촛불이 비추기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서 밝히게 하였다.③-1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홀연히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에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과 같고, 그 다음의 것은,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서, 마치 달이 동녘에서 떠오를 제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았다. 그 중 멀리 있는 것은, 산만하고 흐릿하여, 마치 가늘고 엷은 구름이나 놀과 같고, 사라져 없어지거나 소용돌이치는 것은, 마치 질펀하게 나뒤치는 파도와 같아, 번쩍번쩍 서로 엇비슷해서, 그것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③-2
그러자 이서彝敍가 큰 소리를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면서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기이하구나! 희한하구나! 천하의 절승이로다!”하였다.③-3
(3)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내오게 하고, 술이 취하자 서로 시를 읊으며 즐겼다. 그때 주신ㆍ해보ㆍ무구도 같이 모였다.
이 시서의 독특한 점은 무엇보다도 제재의 기발함 자체에 있을 것이다. (1)에서 제시되는 국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네 가지는 국화의 생태적 특징이지만, 십중팔구 관념적 의론으로 전개될 만한 소재이다. 국화를 관념적인 해석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다. 한편 화훼를 가꾸고 완상하는 취향이 범람하였던 18세기 후반의 문화적 분위기라면, 국화의 즉물적 아름다움이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발견한 것은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의 아름다움’이다. 국화의 관념성이나 생태적 특성 혹은 그로부터 야기되는 정취가 아니라 그림자라는, 소재의 기상천외한 측면과 그로부터 연유하는 정취이다.
일반적으로 설득하기 힘든 이 기발한 흥취를 설득하는 과정이 글의 나머지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독특한 글쓰기 전략이 채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序’라면 글 혹은 시의 배경이나 의도, 시론 등을 진술하는 글이다. 이 글처럼 여럿이 모여 가진 모임과 그 모임에서 지어진 시를 두고 짓는 서라면 모임의 취지와 참가자들을 기록할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방식으론 진술이나 의론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글이 사용한 것은 서사를 이용하여 극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부각시키는 방식이다.
이 글의 중심부인 (2)는 ①-②-③으로 진행되면서, 발단-전개-절정ㆍ결말의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즉 ①에서는 ‘국화 그림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가 제시되면서, 작품 내 서술자인 나와 주인공인 남고 간의 갈등이 발단으로 제시된다. 시간의 진행 축을 따라 서사적 장면이 진행되지만, ②는 전개이면서 일종의 서사적 지연의 역할을 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설정되지만, 국화 그림자 감상에 시큰둥한 남고 측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절정은 지연된다. ②에서의 이러한 지연은 (3)에서 순식간에 반전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②에서의 지연은 ③의 절정의 느낌을 고조시키기 위한 응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문장 작법으로 바꿔 이야기한다면 억양과 파란의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응축은 ③-2에서 한 번 더 이루어진다. 국화 그림자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부분은 이미 절정부에 도입해 있으면서 절정의 순간을 연장시킨다. 그리고는 ③-3에 와서 “기이하구나! 희한하구나! 천하의 절승이로다!”[奇哉 異哉 天下之絶勝也]라는 격렬한 감탄으로 폭발적인 절정과 동시에 결말을 맞이한다. 즉 이 글은 남고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간의 경과에 따라 벌어지는 내면적 변화를 서사적 장면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매우 응축성이 강한 역동적인 장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내세워지는 것은 서사적 경과가 아니다. 응축성이 강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전경화 되는 것은 절정 부분의 ‘흥분’ 그 자체이다. 즉 서사성이 강한 장면 제시적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서정적 흥분이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③-2 부분에 쓰이는 배비구와 대우구이다. 이 부분은 국화 그림자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다른 부분과는 다른 구법句法을 구사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其□者 □□□□ 若□□□□□’의 문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반복한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4자구가 중심이 된 배비구가 구사된다. 이러한 4자구와 동일한 문장 패턴의 반복과 변주는 이 부분에 매우 유려한 율동감을 부여한다. 절정이자 결말에 해당하는 ③-3에 이르기 직전에 배치된 이 부분은 이러한 율동감에 힘입어 서사의 긴장을 잃지 않고 절정의 순간을 연장한다. 이 부분의 율동감이 갖는 보다 중요한 기능은 서정적인 색채를 이 부분에 부여하는 것이다. 서사 속에 삽입된 이러한 서정적 지속은 서사적 경과의 절정에 있으면서 서사적 시간의 바깥에 존재한다. 한 순간의 깨달음과 환희를 음미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적인 순간인 것이다.
이 글은 일반적 서序의 서술과는 다른 서사적 밀도와, 서정적 밀도를 결합함으로써 절정의 순간을 일종의 미학적 열반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이 순간의 흥취를 전경화 하고 있다. 즉 소재를 파악하는 시선의 기발함에서 비롯되는 ‘기발한 흥취’를 설득하기 위해,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드라마틱한 장면의 제시를 통해 보여주는 서사와 서정적 흥취를 결합하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2) 순간의 감각적 포착과 미적 승화
「국영시서」에서 다루는 것은 국화의 ‘보편적인 의미나 항구적인 성질’이 아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라는 찰나적 현상과 여기에 결합된 미학적 열락이다. 즉 특수하고 감각적인 순간이다. 이런 소재 파악 방식은 이 시기 정약용의 산문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는 세검정의 일반적인 경관이 아니라,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만 펼쳐지는 특별한 흥취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전경화하고 있다. 「제강릉최군시권題江陵崔君(秉浩)詩卷」에서는 독서를 통해 독자와 시인의 영혼이 교섭하는 순간을 잡아내고 있다. 사환기가 끝나는 지점에 지어지는 「수오재기守吾齋記」는 훨씬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여하튼 또 다른 깨달음의 ‘순간’을 전경화 한다. 이처럼 그의 초기산문 작품들은 종종 스쳐가는 인생의 한 장면을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소재 대상의 특별한 순간이 포착된다는 사실은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특별히 예민해진 주체를 전제로 한다. 세검정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하여 장대비 속을 달려가는 「유세검정기」의 주인공이나, 벽면에 비친 국화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국영시서」의 시선은 매우 예민해진 감각과 호사가적 탐닉의 태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부류의 글들에서, 주체는 정서적으로도 몹시 예민해서 다음의 척독 같은 것들에서는 정서적 과잉의 기미조차 발견된다.
남고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을 때에는 신선처럼 까마득하여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가도, 막상 오시면 모습도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고 말씀도 시용時用에 맞지 않아 전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도 남고께서 가시고 나면 신선이 훌쩍 혼자 떠나버린 것 같아, 짝 잃은 학처럼 외로워지고 상갓집 개 마냥 기가 죽습니다. 마음은 쓸쓸해지고 기운이 없어집니다. 아아! 당신 자신도 그 까닭은 모르실 겁니다.
극히 짧은 편지이지만, 사람 사이의 미묘한 그리움과 사모의 감정을 잡아내는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놓고 있다.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속어를 서슴지 않는 그리움의 고백에선 감상적 과잉의 기미조차 느껴진다. 그 자신 다른 편지에서 “아, 우리 두 사람은 연燕이나 조趙의 비가悲歌를 부르던 선비들의 처지도 아닌데 그 기미氣味와 풍운風韻의 어둡고 격렬함이 어찌하여 그처럼 심한 겁니까?”라고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듯이, 이런 편지들에 깔린 것은 균형 잡힌 정서의 단정함이 아니라 정서적 과잉상태이다. 이처럼 주체의 정서적 과잉상태가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호사가적 탐닉의 태도와 함께 긍정의 대상이 되면서 소재 대상이 지닌 특수한 순간의 비일상적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국영시서」 같은 글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민한 주체와 대상은 ‘폭발하듯’ 만난다. 「국영시서」에서 그것은 마치 주체 내면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폭발하는 순간처럼 묘사된다. 「제강릉최군시권題江陵崔君詩卷」이나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 「수오재기守吾齋記」 등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폭발적 순간을 전경화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일종의 극적 클라이맥스를 형성하는 서사적 글쓰기 방식이다.
여름날 한가로이 있는데, 종제 공권公權이 시 1권을 부쳐 보내고 또, “이는 강릉 최 군의 작품인데, 품평을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남의 시집을 열람한 것이 백을 헤아릴 정도이다. 헐뜯을 것인가?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칭찬을 해야 하는가? 이는 내가 싫다. 그러니 이 물건을 만나면 벌써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며 눈썹이 곤두선다.
이에 시권을 천천히 당겨 흘낏 곁눈으로 보았다. 몇 편을 읽고 나자 눈썹이 펴지고 눈이 크게 떠지며, 나도 모르게 목에서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이 뛰어, 흔연히 마치 능운부凌雲賦를 읽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람됨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급히 그가 묵고 있는 곳을 물어 손수 말을 몰아 찾아가서 보았다.
최 군은 마침 여러 선비들과 모여 있었다. 모인 자는 모두 우아하고 빼어난 인물들이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떨어진 갓에 해진 베옷을 입고서 거칠고 허술한 차림이었다. 물어 보니 과연 최 군이었다. 그와 교제를 맺고 돌아와 그 시권에 이렇게 기록하여 돌려보낸다.
「제강릉최군시권」의 전문이다. 짐짓 시를 품평하는 고역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아 내면적 갈등을 드러낸 다음 그것이 한순간에 역전되는 경험을 숨 가쁘게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배비구를 사용한 율동감을 통해 절정의 순간을 연장시키며, 서정적 색채를 입히는 「국영시서」의 방식 역시 정약용 초기 산문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 「유세검정기」는 비올 조짐을 보고 출발해서 재빨리 세검정을 향해 달리는 동안 소나기가 점차 거세지고, 마침내 세검정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거센 소나기가 몰아치는 경과를 묘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서술의 경과에 따라 글의 정서적 긴장은 급격히 고조되는데, 세찬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불어난 세검정의 장한 물살을 표현하는 부분이 이 글의 서술상ㆍ정서상의 절정이다. 이 부분은 연속된 4자구가 열 번이나 반복되는 구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 끝에서 ‘떨려라, 안정할 수가 없구나!’[凜乎 其不能安也]라는 감탄을 터트리며 절정을 이루고 있다. 소나기 속의 세검정의 거센 물결이라는 장관과 주체가 만나는 순간을 폭발적인 흥분의 어조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수오재기」에서는 이 극적 구성이 매우 인상적인 경지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는 두 개의 자아가 갈등하는 두 개의 인물로 입체화 되어 화면 속에 등장한다.
이렇게 개괄을 하고 보면, 다산 초년기의 산문에는 의외의 측면이 존재하는 셈이다. 즉 「국영시서」로 대표되는 산문들 속에는 형이상학적인 진리이든 사회적 실천윤리이든 간에 ‘도’로 불릴 만한 것과는 상관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런 의미나 쓸모가 없는 것들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세계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항구적인 의미와 균형 잡힌 정서 대신 기발한 감수성과 호사가적 탐닉, 감상적 정서 과잉이 존재한다. 의미 대신 미학적인 감수성이 중심에 온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낭만적인 격정으로 향유되고, 섬세하게 고안된 문예적 배려를 통해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낭만적’이다.
이 시기에 지어진 「장천용전張天慵傳」에서는 이런 ‘낭만적’ 태도가 일종의 예술가론으로 나타난다. 「장천용전」에서 묘사되는 장천용은 관장의 부름에 인사불성으로 취하여 파관한 채로 나타나며, 상주의 지팡이를 훔쳐 피리를 만드는 기행을 태연하게 자행하는 인물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 가운데 아비 복服을 입은 자가 있었는데, 천용이 그 상장喪杖이 기이한 대나무로서 특별한 소리가 나리란 것을 알고는 밤에 그것을 훔쳐다가 구멍을 뚫어 퉁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태백산성太白山城 가운데 봉우리의 꼭대기에 올라가 밤새도록 퉁소를 불다가 돌아왔다.
즉 장천용은 일체의 사회적 권위나 인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창작 세계에만 몰두하는 자유인인데, 정약용은 이를 ‘예술의 이름 하에’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장천용의 그림은 “모두 창경蒼勁ㆍ괴기怪奇하여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예술적인 평가도 장천용이라는 천재 예술가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즉 그의 예술이나 인간이 모두 ‘기괴한 것’으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결국 다산은 일체를 초월하는 특권적이고, 비일상적 존재로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장천용전」에서 확인하게 되는 예술/예술가의 독자적인 위치에 대한 낭만적 인식은 「국영시서」 계열의 산문들이 보여주는 ‘낭만성’과 근본적으로 동궤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3. 일상성의 견제
-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의 분석을 중심으로
정약용 초기 산문에는 「국영시서」처럼 비일상적ㆍ순문예적 취향의 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비일상적, 순문예적 관점을 어디까지 끌고 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제한적인 언급을 요한다. 그림자를 소재로 하는 또 하나의 산문인 「칠실관화설」이 이 문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1) 「칠실관화설」 분석
(1)집을 산과 호수 사이에 지었더니, 아름다운 물가와 산봉우리가 양편으로 두르며 얼비추고, 대나무와 꽃과 바위가 떨기를 짓고 쌓여있고, 누각과 울타리는 죽 둘러 있다.
(2)맑고 좋은 날을 골라 방을 닫고는, 들창이라든가 창문같이 바깥의 빛을 받아들일 만한 것은 모두 틀어막아서 방안을 칠흑 같게 한다. 오직 구멍 한 개만 남겨놓고 돋보기를 하나 가져다 구멍에 맞추어 놓는다. 그리고는 눈처럼 하얀 종이판을 가져다 돋보기로부터 두어 자 떨어진 곳에 두어(돋보기의 볼록한 정도에 따라 거리는 달라진다.) 비치는 빛을 받는다.
(3)그러면, 아름다운 물가와 산봉우리, 여울과 산봉우리의 아름다움, 떨기를 지어 쌓인 대나무나 꽃과 바위들, 죽 둘린 누각이나 울타리들이 모두 종이 판 위에 와서 떨어진다. 짙은 청색과 옅은 초록은 그 빛깔 그대로요, 성근 가지와 빽빽한 잎사귀는 그 모양 그대로다. 짜임새가 분명하고, 위치도 가지런하여,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니, 실낱이나 터럭처럼 세밀하다. 고개지顧凱之ㆍ육탐미陸探微라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대개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이다. 애석한 것은 바람이 부는 나뭇가지는 흔들려서 묘사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사물의 형상이 거꾸로 비치므로 감상하려면 어지럽다는 점이다.
(4)지금 어떤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되 터럭 하나도 다르지 않게 하고 싶다면, 이 방법 말고는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뜰 가운데 진흙으로 빚은 사람마냥 꼼짝도 않고 단정히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묘사하기 어려운 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說’의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 ‘說’은 기본적으로 설명문 혹은 의론문이다. 다산의 설은 모두 종두법이나 성제城制, 돋보기가 불을 일으키는 원리에 대한 건조한 설명문이거나, ‘誠’자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해설을 펼치는 「성자설誠字說」과 같은 의론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說’이라는 문체에 대한 다산의 기본적인 해석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이 건조한 설명문들 사이에서 이채를 띠는 것이 「칠실관화설」이다.
「칠실관화설」 역시 기본적으로는 초보적인 사진기의 원리를 해설하는 설명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설들과 달리 서정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글이 다른 글들과 달리 서정적인 감흥을 갖는 것은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그것의 발현인 글쓰기의 특징에서 연유한다. 「칠실관화설」의 주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그것은 암실을 만들고 빛을 응집시켜 볼록렌즈를 통해 투과시킴으로서 사물의 형상을 터럭 하나의 오차도 없이 종이 위에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즉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과, 그것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으로, 천하의 기관이다!’라고 감탄하는 미학적 진술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글의 주지는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즉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태도에는 ‘천하의 기관’으로 대상을 향유하는 미학적 태도와 과학자적 관찰의 시선이 혼합되어 있다. 이 글이 서정적 감흥을 갖는 것은 이처럼 과학자적 관찰의 시선이 미학적 향유의 태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이런 이중적 태도는 글쓰기의 특징을 통해 실현된다. 일단 이 글이 ‘설’의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진기 원리를 설명하겠다는 설명문적 의도에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글의 실제 서술은 여타의 설명문[說]이 지닌 ‘건조한 투명성’이라는 문체적 특징과는 사뭇 다른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1), (3)과 (2), (4)의 문체적 성격이 다르다.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뼈대에 해당하는 (2), (4)는 대체로 지시적 성격의 진술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비해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전체 구성의 한 부분이지만, (1), (3)의 문체는 확연히 다르다.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하면 외물의 형상이 정확하게 종이판 위에 맺힌다. 다만 흔들리는 물체는 묘사하기 어렵고 상이 거꾸로 맺히는 점이 한계이다’라고 진술되어야 할 부분이다. 설명의 명징성을 위해서는 이런 서술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글은 이 부분을 섬세한 문예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묘사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즉 대상에 대한 개념적 설명 대신 색채와 형태를 동원한 장황한 묘사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설명문으로서 (3)이 갖는 비경제성은 (3)부분이 정교한 문예적 장치를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2), (4)가 산구散句로 처리된 것과 달리 (1), (3)은 배비구와 대우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3)은 전체적으로 다양한 자수의 배비구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시적으로 보면 7자구를 중심으로 한 변주인 “洲渚巖巒之麗 與夫竹樹花石之叢疊 樓閣藩籬之邐迤者”로 시작해서, “深靑淺綠如其色 疎柯密葉如其形”에서는 정교한 대우구 겸 7자의 배비구로 바뀌고, 다시 “間架昭森 位置齊整 天成一幅 細如絲髮”의 좀 더 호흡이 짧고 여러 번 반복되는 4ㆍ4ㆍ4ㆍ4의 배비구를 구사해 율동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율동감이 가장 고조된 이 부분에 이 글의 문안文眼에 해당하는 “대개 천하의 기관이다”[蓋天下之奇觀也]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다 ‘애석한 것은’[所嗟]을 두어 문장의 어세를 돌리는 돈좌의 기법을 구사하고, 다시 “風梢活動 描寫崎艱也 物形倒植 覽賞恍忽也”의 9(4ㆍ5)ㆍ9(4ㆍ5)의 배비구로 연결하여 좀 더 완만한 율동감을 회복하며 마무리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이러한 율동감은 (3)의 전체적 분위기를 고조시켜 이 부분이 이 글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즉 (3)은 돈좌의 수법을 사용하여 문장의 굴절을 의도하고, 배비구와 대우구를 이용해 율동감을 형성하면서 정서적 고저를 형성하도록 배려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적 고려는 명백히 문예적인 것이고, 이러한 문예적 배려에 의해 마련된 정서적 고저와 율동감이 이 글을 단순한 정보 전달의 기능만을 지니지 않고 정서적 감흥을 지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율동감의 최고조에 있는 ‘천하의 기관’[天下之奇觀]이라는 미학적 진술이 자연스럽게 정보 전달적 진술 사이에 위치하도록 마련되는 것이다.
결국 이 글에서 ‘설’의 문체를 선택하는 것은 과학자적 관찰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에서 유래하지만, 문장의 구법에서 율문적 리듬감을 구사하면서 묘사적 진술을 진술 방식에 삽입하는 것은 그것이 미학적 향유대상이기도 한 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글의 가장 큰 특징은, 작가의 태도와 글쓰기의 방식에서 과학과 미학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서정적 감흥 속에 통합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 글의 ‘서정’은 독특한 내용을 지닌 것이 된다. 즉 일종의 ‘과학적 서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칠실관화설」의 이러한 분석 결과는 「국영시서」 부류의 산문들이 보여주는 비일상적ㆍ순문예적 관심이 극단적으로 추구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제한되고 견인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영시서」에 보이는 기발한 발상은 충분히 기궤奇詭의 추구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칠실관화설」에 보이는 ‘과학적 서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정약용 초기 산문이 극단적으로 문예적인 취향으로 치달리지 않도록 견제하고 있는 첫 번째 요소는 「칠실관화설」이 보여주는 과학적 관심이라는 방향일 것이다.
2) ‘일상성’의 추구
「초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烟波釣叟之家記」는 ‘부가범택浮家泛宅’의 꿈을 서술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원굉도를 거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굉도는 말하길, 천금을 주고 배 한 척을 사서 배 안에다 북과 피리 관현악 등 여러 가지 즐길 거리들을 갖추어 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노닐다가, 비록 이것 때문에 패가망신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이런 것은 미치광이나 탕자들이나 할 짓이지, 내 뜻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원굉도의 글은 「공유장선생龔惟長先生」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인생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 대하여 논하며, “천금으로 배를 한 척 사서, 배 안에는 북과 피리 한 부를 설치하고, 기첩 몇 사람과 한가한 몇 사람으로 더불어 부가범택泛家浮宅으로 노닐면서 장차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그러다가 “일신이 낭패하여 아침에 저녁거리가 없고 기생집에서 밥을 빌고 고아나 늙은이의 상에서 밥을 나누어 먹게 되어도”, 그러고도 전혀 태연하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쾌활快活한’ 일이라고 하였다. 일견 쾌락 지상주의 패륜아의 발언처럼 들리지만, 원굉도는 극단적 환락을 통해 오히려 세속을 초월하는 경지를 묘사해내고 있다. 그러므로 ‘환락을 궁극에까지 밀고 갔으니, 「칠발七發」에 비교할 수 있어, 사람의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다.
원굉도의 태도는 일상성의 극단적인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정약용은 ‘미치광이나 탕자들이나 할 짓이지, 내 뜻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배척하는 태도를 밝힌다. 즉 정약용이 비록 일정하게 비일상적 미적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으나, 동시에 극단적인 비일상성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배척의 태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신 정약용 초기 산문의 방향을 견인하는 것은 견실한 생활인의 정서-일상성이다.
나는 적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 놓고, 또 솥과 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섭생에 필요한 기구를 준비하며 방 한 칸을 만들어 온돌을 놓고 싶다.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 그리고 어린 종 한 명을 이끌고 부가범택浮家汎宅으로 수종산과 초천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오계奧溪의 연못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석호石湖에서 낚시질하며, 또 그 다음날은 문암門巖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때때로 짤막짤막한 시가詩歌를 지어 스스로 기구한 정회를 읊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그가 구상하는 부가범택엔 기녀 대신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풍류악기 대신 부엌살림이 놓이고, 난방용 온돌이 놓인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양강우어자楊江遇漁者」의 내용을 통해 본다면 사정은 보다 확연해진다. 여기에는 가족이 포함될 뿐 아니라 어로작업의 노동과 수확물을 시장에 파는 교환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
황혼에 그물 걷어 유랑에 배를 대고
땅바닥에 고기를 털어내자 비린내 진동한다.
관솔불에 잘 세어선 버들가지에다 꿰는데
관솔불 빛 물에 비쳐 길게 너울대네.
촌사람과 장사꾼들 다투어 와서 보고
쟁그랑쟁그랑 돈 던지니 상자에 그득하다.
黃昏收網泊柳浪, 摘魚落地聞魚香.
松鐙細數柳條貫, 鐙光照水銅龍長.
野夫估客爭來看, 鏗鏗擲錢錢滿筐.
즉 그가 구상하는 부가범택은 일상의 초월을 지향하는 원굉도 식 의식과는 반대로 일상의 삶을 추구하는 생활인의 정서와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정약용 초기 산문들의 방향을 제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엘리트 관료의식이다. 이 시기 정약용의 문학 활동에 중심이 되는 것은 죽란시사竹欄詩社인데, 이 모임의 시사첩詩社帖에 붙여진 것이 「죽란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이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인다.
모임 때마다 술ㆍ안주ㆍ붓ㆍ벼루 등을 마련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모임은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마련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되,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한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품계가 승진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이 글은 모임의 취지와 사원社員의 명단, 사약社約의 내용을 서술한 전형적인 서序인데, 인용된 부분은 ‘사약社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사약’ 부분은 인생과 자연의 매순간들을 흡족하게 향유하는 경쾌한 흥취를 내보인다. 이 모임의 성격 자체가 시회와 친목회를 겸하였던 만큼 매우 서정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방향은 일상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흥취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의 「남고춘약南皐春約」과 비교해보면, 이러한 서정의 방향은 보다 분명해진다.
일(一) : 조그만 잔으로 술을 돌리되, 나이대로 돌린다. 이미 술이 술잔에 따라졌으면 예법에 사양할 수 없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차례가 오면 술잔을 잡아 꽃 아래 붓고 머리를 조아리며 꽃을 향해 사죄하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꽃의 신께서는 주량을 밝게 헤아리시리니 실로 주량이 적어 땅에 붓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함께 노는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 곤경을 면해준다. 만약 술을 조금만 채운다거나 오래 머물게 할 생각만 하는 자라면 다음과 같이 벌을 준다.
봄놀이의 약속을 정하면서 마치 향약鄕約처럼 조条ㆍ목目을 정하고, 위반 시 죄과의 등급에 대한 판결과 벌의 내용을 정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에 비해 내용은 인용에서 보듯 극히 서정적인 것이다. 즉 「남고춘약」은 ‘시적인 산문을 써야할 곳에서 문서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서 거꾸로 신선한 충격과 색다른 감각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남고춘약」에서 드러나는 서정은 봄놀이의 흥취에 방해되는 모든 일상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공령문功令文을 함께 연마한다는 이유로 모인 이 모임에서 ‘제3조 : 표表 짓기’에는 단 하나의 항목만이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과표科表를 열심히 짓는다.’가 아니라 ‘과표를 짓는 데 몰두해서 밥 먹기 전에 빨리 마치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조항이다. 이처럼 제거되는 일상의 자리에는 대신 꽃의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극히 낭만적인 유희의 태도가 자리 잡는다. 이 세계에서는 이 봄날의 유희가 바로 법률에 해당하는 무게를 지닌다. 그것이 이 글이 지닌 문서의 형식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몰두를 위해서는 유가의 경전조차 문학적 유희의 도구로 동원된다. 이처럼 「남고춘약」은 희작의 태도를 빌려 모든 일상적인 생활의 세계-관직과 학문의 세계를 포함-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봄날의 서정적 흥취에만 몰두한다.
「죽란시사첩서」의 서정은 「남고춘약」의 방향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 열다섯 사람은 서로 비슷한 나이로,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지방에 살면서 태평한 시대에 출세하여 모두 사적仕籍에 이름이 오르고, 그 지취志趣의 귀착되는 것도 서로 같으니, 모임을 만들어 즐기면서 태평 세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죽란시사첩서」는 ‘수령으로 나가거나 승진을 하는’ 등 현실세계에서 ‘출세한’ 자들이 ‘태평성대’의 조화로운 시절을 즐기고 그것을 구가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모임 자체가 태평성대를 장식하는 하나의 꽃이라고 자부한다. 따라서 이들의 모임에 계기를 제공하는 자연이나 인사의 계기들은 결코 일상-관료생활의 범위를 초탈하지 않는 것이다. 즉 「죽란시사첩서」에 드러나는 것은 일종의 ‘관료적 서정’이다. ‘과표를 짓느라 꾸물거리지 말라’는 「남고춘약」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보다 초년에 지어진 것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어려 독서하던 절을 찾아 유락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유수종사기遊水鐘寺記」 역시 비슷한 엘리트적 자부심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엘리트적 관료의식이 정약용의 초기산문을 ‘한갓 곤드레만드레하여 떠드는 것만 일삼는’-순수한 유희에의 몰두-일상을 초탈하는 경지나 순문예적 지향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분석한 「칠실관화설」의 ‘과학적 서정’이나 「죽란시사첩서」가 보여주는 ‘관료적 서정’은 모두 ‘일상성’의 또 다른 얼굴이다. 즉 가족과 노동과 교환경제의 세계처럼 과학적 관심이나 관료의식 역시 일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의식하면서 추구하는 세속적 방식이다. 원굉도나 「남고춘약」의 유희적 태도는 일상을 무의미하고 지루한 반복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초월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일상을 통해 그것을 관통하는 원리에 대한 성찰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소위 ‘성리학적 일상’이다. 정약용의 태도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제3의 것으로, 일상에 대한 소위 ‘실학적’ 태도라고 할 것이다. 정약용의 산문에서는 이런 태도가 일종의 ‘서정’으로 승화되어 있다. 정약용은 후일 정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계를 위해 양계에 종사하면서도 양계의 개선 방법을 연구해보고 때로 양계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하도록 당부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즉 이 편지글은 과학과 미학과 생활을 통합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정약용 초기 산문의 소품적 경향 역시 이러한 의식에 의해 견제되고 있는 것이다.
4. 정약용 초기 사환기 산문의 성격과 배경
「국영시서」 부류의 산문들은 사실상 당대에 유행한 소품적 경향에 상당히 접근하는 것이다. 「국영시서」에 보이는 경향이 「칠실관화설」로 대변되는 방향에 의해 일정하게 통제를 받고 그것이 정약용다운 특성을 형성하지만, 정약용의 초기 산문에 「국영시서」 유의 소품적 경향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적 감수성이란 그의 의식적 지향과 상관없이 일정부분 생활적 토대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글들의 배경에는 동인적 집단이 있다. 「죽란시사첩서」뿐 아니라 「국영시서」나 「칠실관화설」 등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국영시서」는 거칠고 졸렬하여 부끄럽습니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마땅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남고 형제와 주신ㆍ이숙 등이 모두 이미 약속을 하였으니 형도 와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릉二陵(정릉과 소릉)의 여러 어른들이 흉내 내고자 하십니다만, 국화 화분이 대여섯에 불과하니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서너 집이 합하여 십여 매가 된다한들, 어찌 우리 집의 국화 그림자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싸늘해진 눈이 더워지지 않습니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시회가 정약용의 집에서 베풀어지던 모습은 「남고윤참의묘지명南皐尹參議墓誌銘」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복암이기양묘지명伏菴李基讓墓誌銘」 부견한화조附見閑話條의 기록은 사진기의 초보 원리가 실제로 실험되고 있었던 현장을 보여준다. 즉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취미’처럼, 사진기의 원리를 실험하는 관심이 동인적 집단에서 공유되었던 것이다. 인용된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약용이 시작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모임이 당대 경화사족층에 유행으로 번져가는 현상이다. 호사가적인 기발한 아취를 추구하는 정열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문화를 보여준다. 결국 「국영시서」이든 「칠실관화설」이든, 정약용 개인적 취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당대 경화 사족층의 남인들 간에 공유되던 문화적 취향인 것이다.
다음의 편지는 그러한 문화적 취향과 정열이 상업 경제와 맞붙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려서 보여주신 난초와 국화 한 폭은 그림 내용이 고상하고 정결하여 기천岐川의 노선도老仙圖에 견주면 연석燕石과 공벽拱璧의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점수를 매긴다면 반드시 상등을 차지할 것입니다. 또 골동갱과 침수단으로 한 차례 배를 채우시겠습니다. 오사五沙께서는 언제나 광통교 위에 걸려있는 되지못한 그림을 사다가 사중社中을 제압하려 하시니, 이러한 사실을 시험관에게 알려야겠습니다. 껄껄.
즉 광통교 위에서 파는 그림을 사서 몰래 그림 품평에 참여할 만큼, 일정 정도 발달한 도시의 상업문화가 예술품의 대중적(?) 유통까지 성립시키고 있는 시기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정약용이 경험한 것은 상업 경제의 발달과 맞물린 문화의 소재지로서의 서울인 것이다.
사환기 정약용의 생활방식이나 자의식이 경화 지향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췌언이 필요 없을 것이다. “도성都城 문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이며, 경화는 문명의 장소라는 것이 경화사족으로서 정약용이 갖는 자의식의 기저이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누누이 도성의 문화적 안목과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경험 내용을 증명한다. 그 한가운데 정약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이 시기 정약용의 감수성이란 필연적 도시적-경화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품문이란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일정 정도 발달한 도시 문화를 전제로 자라난 것이다. 그만큼 도시적 서정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경화사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정약용의 문학이, 비록 다른 요인에 의해 견제되더라도, 소품적 경향을 일정정도 지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더구나 당대의 소품적 경향을 선도했던 작가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생활환경을 지니기도 했었던 것이 이 시기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 정약용이 속했던 동인적 집단이 남인 관료문인들의 집단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죽란시사첩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첨가되어 있다.
번옹樊翁께서 이 일을 듣고 크게 감탄하시기를, “훌륭하다, 이 모임이여!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이런 모임이 있을 수 있었으랴. 이는 모두 우리 성상께서 20년 동안 선비를 기르고 성취시키신 효과이다. 늘 모일 적마다 성상의 은택을 읊어서 보답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한갓 곤드레만드레하여 떠드는 것만 일삼지 말라.”하셨다.
사환기 정약용의 시작활동은 죽란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죽란시사는 사원들 15명 중 9명이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인 남인 엘리트 관료집단의 모임이다. 인용에서 보이듯, 이 모임을 주선하고 끌어간 것은 정약용이지만, 뒤에는 정조대 관료 남인들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이 있다. 정약용은 이 무렵에 지어진 「발화앵첩跋畫櫻帖」에서 채제공이 자신을 ‘우리 당 시맥[吾黨詩脈]의 적전嫡傳’으로 지목하면서 면려하였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채제공이 제시한 소위 ‘우리 당의 시맥’이란 사실상 ‘남인 출신 관인들의 시맥’이다. 즉 정약용은 남인 시맥의 적전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태평한 시대에 출세하여 모두 사적仕籍에 이름이 올랐으니 …… 모임을 만들어 즐기면서 태평 세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라고 죽란시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정약용의 의식적 지향은 바로 이런 엘리트 남인 관료로서의 자부심이다. 이러한 의식적 지향은 문체에 대한 정조의 질문에 ‘문체란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전하의 인사권으로 문체를 바로잡으라.’고 가장 정책적인 답을 했던 정약용의 태도와 같은 방향의 것이다.
정약용의 초기 산문이 소품적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경향이 ‘일상성’을 중심으로 견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남인 관료로서의 동인 집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실에서 득의한 엘리트 관료로서 기성질서의 핵심에 존재하는 작가가 일상에서의 극단적인 초월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 시기 소품문의 유행은 ‘지배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대부 작가의 증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품의 유행은 기성사회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다. 엘리트 남인 관료로서의 의식을 지녔고, 그러한 동인 집단을 배경으로 창작된 산문들이 소품이 갖는 ‘정치적’ 성격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다만 정약용의 경우 그 방향이 ‘관료적’일 뿐 아니라 ‘과학적’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다운 특성일 것이다. 이 점은 일상에 대한 그의 근실한 태도와 맞물려 후기까지 이어지면서 정약용 산문의 기본 방향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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