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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즉 영도대교는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이며,
일제강점기인 1932년 4월 20일 착공되어 1935년 3월 준공되었다.
자갈치 약재 방 거리에서 영도 수상서(현 영도 경찰서) 입구를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유일한 일엽식 도개교이다.
처음 명칭은 부산대교였으나, 부산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준공된
1982년 2월에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1935년 다리 위에 전차궤도(電車軌道)를 설치하여 남항동 전차 종점까지
전차가 운행하기도 하였으며, 하루 6회 씩 다리의 한쪽을 들어올려
1,000톤 급 선박이 다리를 통과해 지나 가도록 연출하며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1966년 9월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도개를 중단하고 전차궤도도 철거되었다.
구. 부산시청/경찰청 부지에 롯데 복합 건물이 건축 계획되어,
교통량 수요 예측 평가에 의해, 기존 다리를 철거하고 넓고 튼튼한 다리를
건설코자 하였으나, 역사적인 가치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되어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확장 복원 공사를 착수하였다.
2011년 4월 완전 철거한 뒤 길이 214.7m, 너비 25.3m의 왕복 6차로로 확장하고,
도개 기능도 복원하여 2013년 7월 준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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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정확히 부산시 영도구 봉래동 5가 79번지...
지금 현재 위치로는 "한진중공업" 맞은편 변전소 입구 촤측 끝 자락 이다.
유, 소년기 시절, 당시 그 시대의 살림살이가 다 그러 하였 듯,
쉽지않은 살림살이 덕에 이사를 밥 먹듯 하든 시절,
아리랑 고개 며 6번 종점 아래 골목이며,
봉래동 파출소 뒤 언덕, 봉래동 4가로 등등....
물론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동무들을 뒤로하며, 보따리 짐을 꾸려 옮길때 마다,
나의 소중한 보물(?)들도 보따리에 동여맨 체로,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무력한 존재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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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되돌아 보면,
양철 지붕에 쏟아지는 따발총 같은 빗소리가 무지 그립고,
콜탈 루핑 지붕사이로 부터 새어 들어 온 빗 물을 받는다고
세숫대야며 양동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조그만 방 안을
된줄도 모르고 쉴틈없이 하루종일 오가던 행동들이.....
당시 별다른 놀이 시설이 없던 환경이었기에...
봉래동 바닷길을 끼고 있었던 "도기공장(삼영타일?)"에서 나온
불량 타일을 몇 장씩 줏어들곤 바닷물 표면을 위해 던지는 "탕치기" 놀이로
즐거웠던 시절이며...
여름이면 팬티 바람으로 영도다리에 올라,
무지막한 다이빙...배치기로 바닷물에 내 배를 온통 맞부딪히는...
그래서 집에 돌아온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배앓이를 하던 그 시절들이...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온 식구가 된장찌게 하나로 저녁을 함께 하던,
나에게도 그리운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냥 반갑게 느껴진다.
31년을 살았던 영도를 떠나있는 지금,
그래도 어디보다 제일 편안하고 푸근하게 느껴지는 '影島'
잔잔한 추억을 떠 올리며, 한번 씩 영도 기행을 할때마다,
카메라에 어린 시절 추억의 흔적을 담아 보았다.
동판으로 부착되어 있는 영도다리(영도대교) 명판
매축지 안내 표지석
시내 방면에서 영도 방면으로 바라보며
철거 후 새롭게 복원키 위하여 영도다리 바로 옆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차량을 우회시켜,
현재 이 다리로는 차량 통행을 차단한 상태...
조용(?)이 해서 너무 좋다...
낮게 엎드려 고생한 다리 도로 표면에 입맞춤으로 위로하면서...낮게 살고자...
교황이 세계 각 나라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이 땅에 입맞춤 하는 것이란 생각도 떠 올라...
일엽식(一葉式/한쪽만 가동하여)으로 도개키 위한 상부 구조물...
당시는 철 구조물을 연결 시키기 위해 용접 대신 리벳팅 작업을 많이 하였다...
어렸을적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때 불 피운 화덕에 리벳 못을 집어넣어 발갛게 달군 뒤,
한 작업자가 집게로 이걸 집어 바람에 눈썹이 날리도록(쏜살같이) 달려
철판을 잇대는 작업장에 옮기면, 다른 작업자가 이걸 받아 미리 뚫어 놓은 구멍 사이에
집어 넣고,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작업자가 서로 망치로 리벳 머리를 두드려 고정시키는 광경을
참 많이 보았었다.
겨울엔 아주 좋은 직업인데...여름엔?
나두 어릴 적 다리가 들리는 모습을 약초 방 쪽에서 한 두어본 본 기억이 난다.
교통 순경이 호각을 불어 지나가는 차를(전차 포함) 정지 시키고,
싸이렌 소리가 나면서 곧 이어 다리가 서서히 드리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전차 통행을 위해 위 쪽으로 철탑의 있었으며, 여기에 전선이 걸려 있었는데
다리가 들어 올려지면서 전기가 끊기는 순간 피지직, 반짝하면서 스파크가
일어나곤 하였다...
다리가 다 들리면 사람들은 점 집 쪽으로 하여, 큰 배가 지나가는 모습을
좋은 구경거리 마냥 쳐다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다리위에서 울 어머니와 같이 찍었던 사진도 어디 있는데...
철거 할거라고 소문이 나니...
흉한 낙서가 출현해 졌다...
가까이서 보면 애틋한 사연들이 참 많은데..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 오던 시절,
부산에 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들 하였답니다.
하지만 만나자고 하였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사람을 찾느라 다리가 장터되었던 시절...
정국이 어수선하고, 난리 중이어서 실종되고 행방 불명된 사람들이 많다보니,
답답한 마음에 점(占)에 의지하여 행방이나 생사를 알고자...오로지 "점 괘"애만 의지하여
당시 다리 밑에는 무수히 많은 점집들이 생겨났고, 결국엔 다리 아래의 점집으로
영도다리 밑은 또 다른 명성(?)을 얻게 되었었죠...
얼마지나지 않아 철거 될 운명이라,
지금은 거의 다 폐업을 하고 두~세 집 정도만 남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데....
아직도 인생사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이 있네요...
세월을 슬레이트로 덧 되어서...비도 피하고...바람도 피하고...이름모를 영혼들의 아우성도 피하고...
뒷모습에서 애타는 심정이 묻어 나옵니다...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하겠건만...
수도가 없었던 시절, 바다 근처이다 보니 우물을 팔 수도 없었고, 우물을 파도 짠 물이 나오니...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물지게로 팔아 먹었다면...
이곳 자갈치 일대는 인력 물수레(?)로 식수를 공급 받아 사용 하였답니다.
이젠 거의 수도가 보급되어, 별도 식수 공급을 받지 않아도 되다보니,
수레꾼은 사라지고, 빈 물수레만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씩 작은 어선 등에는 아직도 이 수레로 급수를 해 준다고 합니다...
다리 위에서 내항을 바라다 보며...멀리 천마산이 보이고...좌, 우로 영도와 자갈치, 충무동 입니다.
영도 대평동을 바라보면서...
STX 조선 영도조선소의 갠츄리(Gantry) 크레인이 영도가 조선 공업의 시발점이자
산실 이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곧 해체될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지...인도 바닥의 거친 표면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자갈치 전경...야간에 통행 선박들을 안내하기 위한 "부표"가 인상적이다...
대평동 물양장을 바라보면서...
이젠 40Km 속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걷는 걸음이 이 보다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부산 타워는 부산의 상징인데...이것도 없앤다니....
높은 사람들의 머릿 속 생각들은 왜 그런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차없는 영도다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유유자적한 걸음 걸이가 오히려 평화스러워 보인다.
다리 상판에 설치된 선박의 안전 운항을 보조하기 위한 황색 점멸 교통 신호기...
항공기, 배 등은 일반 도로와 마찬가지로 우측 통행이다...
황색 신호로 보아 중립 지역, 즉 중앙분리대 역활을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항 유람선...해운대...자갈치...충무동...송도...태종대...오륙도...해운대...
새우깡 한 봉 사들고, 이 유람선을 타고서는 태종대 근처를 지나면서 던지면...끼룩 끼룩 하면서 갈매기 떼가 모여든다.
요즘 내항을 항행하는 선박들이 많이 줄었다...
특히 남포동과 영도 대평동을 이어주는 통통배(도선)이 없어지고 난 뒤엔 더욱 그런 것 같다.
말 그대로 바다가 텅 비었다...
부산-고현간 여객선이니, 이 사진 찍은 시점이 거가대로 개통 전 인걸 알려준다.
이젠 이 항로 객선 마저도 없어졌으니...
1988년 내가 수리 책임을 맡았던 원양운반선 "동방88호(G/T 1,500통 급)"에 승선하여
대마도 앞 해상으로 시운전 후 감천항으로 돌아 오면서,
거제에서 부산으로 항행하던 여객선 "서경호"와 정면 충돌 하였던 일이 있었다.
놀라 기관실에 있다 갑판으로 단숨에 올라 내려다 보니, 서경호가 30도 이상 기울더니만
바로 복원되었고, 여객들이 우~하고 갑판으로 나오더니만...다시 객실로 달려간 뒤,
전부 구명 조끼 착용하여 다시 갑판으로 나오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교길,,,여학생들이 무리지어 시내 방면으로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우측에 부산하고는 별 친하지도 않은 "롯데"란 괴물이 우뚝 버티고 있다...
좀더 있으면 더한 괴물이 자리잡고 있겠지만...
그래도 시내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우뚝하게 쏟아있는 부산타워를 보면서,
너 밖에 없다는 최면을 걸어본다.
피난민의 애환을 노래한 대표적인 노래 "굳세어라 福順아"를 노래하신 "현인" 선생의 노래비 및 동상
옆에 걸터앉아 손을 잡으면 노래가 자동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노래가 나오질 않아...
지나가는 행인들 아랑곳 하지않고, 무반주로 쌩 노래 함 불러보았다...
울 福順이 생각에 노래 내내 목이 메이었다...福順아 어디있노?
서기1935년 3월 준공
원래부터 구멍(?) 사이로 엿보는 좋은 버릇이 발동하여...
여기 더하여 "무성한 풀"까지 있어 아주 좋은 것이여...
물이 없어...쩝...아쉽다...
영도 다리 아래서 건너편 자갈치를 바라다 보며...
지나가는 배는 묘박지에 있는 원양선까지 선원들을 태워주는 배...세관 페리?
영도 하부 다리 전경...
롯데란 괴물이 다리를 짓 누르고 있다...곧 무너질 것 같다...
다리 아래로 하여 대평동 물양장 쪽으로 걸어 가면서...
각종 그물이며, 선용품들이 길 양편을 점령하고 있다...
물양장에 계류중인 선박들...
대체적인 선박의 외형만 보면, 어떤 용도의 선박이란 걸 알 수 있는 경지(?)에 다다라 있다.
맨 앞의 배(청해호)는 급유선이고 그 뒤 파란 호스가 있는배는 급수선 이다...
영도 경찰서를 가로 막고 있는 건물...공사하다 중단한 지 7~8년...흉측스럽게 느껴진다.
참, 영도경찰서 옛 이름이 "수상서(水上署), 즉 물위에 지어진 경찰서란 이야기인데...
바로 바닷가에 인접하여 지어지다 보니 그렇게 불렀나 라고 예측해 본다....
어릴적 이 근처를 지나면서 지하 감옥소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인두로 지지고...물고문 하고...줄에 묶어 거꾸로 매달고...
바로 옆 낮은 아파트는 영도 최초로 지어진 고층아파트인 대동대교 맨션...
다리 아래를 들여다 보면 70여년을 버텨 온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물론 노동 착취로 인해 만들어 졌지만,
당시의 설계 기술로도 오랜 세월동안 굳건히 버티도록 설계되어진 사실에 감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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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철거보다는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옛날처럼 하루에 몇번 들어 올리고 저속 전철을 설치히고 차량 통행을 금지 시키면 좋으련만...
아쉽네요 우리나라 행정은 철거하고 매몰하여 옛것은 없애기만 하는지 참! 한심합니다
형님때문에 영도다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네요
감사합니다
잔잔한 추억을 더듬게 합니다. 세월속에 사라질날도 얼마남지 않았는데...언제 한번 둘러보아야 겠읍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나마 보니 좋네요? 감사 합니다.
잊고 있었던... 아련한 추억에 취해봅니다. 귀한 자료 갑사합니다.
영도도다리주변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야릇한 추억의 공간이죠 ~
나이가 들수록 행님 나와바리의 지난 추억에 목이 메이는 듯 싶어 보이네요.^^.
햐~~현장 르뽀...다큐멘타리네요...ㅋㅋ...영도다리보면 생각나는거.....유오성의 "친구야~~~~"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