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8 : 시로 쓰는 四季
천수만의 겨울과 철새떼
정 호
(시인·여행가)
일상에 쫓기다 보면 세월이 가는지 네월이 오는지 모른 채 지나기 일쑤다. 어느 날 점심을 위해 식당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면 교정에 낙엽이 이저리 깔린 것을 보고 비로소 가을도 끝나가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금년도 다 지나고, 이러다 금방 겨울이 되겠거니 하는 체념뿐, 그러고는 또 일상에 묻히다 보면 계절감을 잃는다. 쌀쌀해진 날씨를 피부로 느끼게 되면 장롱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두툼한 옷을 꺼내게 된다.
그렇게 무심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이다. TV화면에 눈을 돌리니 뉴스시간의 말미에 철새들 떼 지어 내려앉는 화면이 뜨고 있다. 철새도래지역에 탐조여행을 위한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주말나들이 차량이 몰려들고 있다는 뉴스였다.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탐조하는 장면과 함께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도 나온다. 때가 때인 만큼 이른바 생태관광(에코투어리즘) 열풍이 불고 있다고 앵커의 열띤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어서 추위에 굶주린 철새들에게 먹이를 뿌려주는 환경단체도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친 생태관광은 또 다른 환경질서의 파괴로 이어진다. 탐조를 위해 도로를 개설하거나 관광버스 진입, 자연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탐조용 콘크리트 누각설치 등으로 동물과 철새들의 불안심리를 가중시키고 있다. 겨울철 먹이주기 행사는 야생조류들의 자연습성적 생존 본능을 잃어버리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신중하지 못한 배려는 자연생태계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그들에겐 자칫 위해(危害)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 다니던 시절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乙淑島)는 에덴공원이라 불렸다. 시내버스도 거기가 종점이었으니 가난한 젊은이들의 미팅장소로는 거기가 딱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초겨울날 단체미팅이 시내에서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2차로 버스를 타고 을숙도로 달려갔다. 막걸리로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철새들 군무가 시작되는 저녁무렵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갈대꽃을 보며, 함께 갈대 숲길을 걸으며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던 걸까? 짧은 겨울해에 금방 어둑살이 짙어와서 아쉬운 발걸음을 되돌려 나왔다. 그때 우리가 갈새라고 부르던 갈대숲속의 합창단 개개비떼들은 우리에게 한껏 축복의 노래를 우짖어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더러는 이렇게 야유를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디 한번 지지고 볶고 살아봐라. 까갈갈~. 삶이 얼마나 매운가를... 까갈갈~. 알 까고 새끼들 키워보니 알겠더라. 까갈갈~. 어휴~ 조생(鳥生) 한번 힘들어라... 까갈갈~.”
철원들판에 진객들 날아든다
뚝방길 논둑길로 망원경 손에 든 사람들
얼었다 녹는 진흙덩이들이 신발짝에 더께더께 들러붙고
바짓가랭이도 흙범벅이다
밤새 불법 밀렵이 횡행해도
쇠기러기 재두루미 흰꼬리수리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더니
천통리 철새들 금싸라기 논밭에 합법적으로
탐조여행 관광도로가 났다
그 길로, 또 경운기 털털거리던 농로로
승용차 뒷꽁무니 오리궁둥이처럼 뒤뚱거리며
첫사랑 추억을 더듬어간다
꽃시절, 을숙도 우거진 갈대숲에서
금지된 갈증을 축이던 저녁 무렵
갑자기 후두두둑 날아오르던
청둥오리떼의 팡파르
그 추억 팡, 팡, 찍어보고 싶은데
훨씬 수월해진 길, 사람들 떼거리로 몰려들지만
철새들 군무는 사라지고 없다
재두루미 몇 마리만 설 땅 잃어 허둥댈 뿐
첫사랑의 추억도 날 줄 몰라 허둥댈 뿐
- 졸시, 『다시 팡, 팡,』전문
겨울방학에 들어가는 날 교직원연수가 있었다. 종업식을 마친 직후 전세버스를 타고 태안반도로 달려가는데, 가는 중간에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게 된다. 우리는 천수만의 철새떼를 보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천수만은 한자로 淺水灣이다. 물이 얕은 만이라는 뜻이다. 그 너른 서해바다에서 수심이 제일 깊은 곳이 고작 80m이니 천수만 연안은 물이 빠지면 온통 갯벌이고 물이 들어와도 수심이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곳이다. 그랬기에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1980년에 천수만을 가로지르는 물막이 공사를 벌였고, 그렇게 개간한 간척지에 작물을 심어 가을 수확이 끝나고 나면 그 떨어진 알곡 이삭를 주워먹으려고 철새들이 몰려든다. 천수만 방조제 안쪽인 간월호와 부남호엔 수많은 담수어종이, 방조제 바깥의 서해바다엔 수많은 해양생물의 서식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천수만은 그야말로 철새들의 낙원이 된 셈이다. 멸종 위기 동물로 지정된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해, 큰기러기, 쇠기러기, 검둥오리, 가창오리 등 100여종 200여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우리나라 제일의 철새도래지역이다. 도요, 물떼새 등은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멀리 타이나 미얀마까지 날아가서 월동을 하는데, 그 중간기착지로서 힘을 비축하기 위해 쉬어가기도 하는 곳이다. 쇠기러기, 가창오리처럼 시베리아에서 날아와서 아예 한살림을 차리고 겨울을 나는 놈들도 있다.
그날 우리가 천수만에 도착한 때는 정오를 지난 무렵이었다. 천수만을 조망하고 또 탐조전망대에 올라 철새들을 관측하지만 쇠기러기와 재두루미들 몇 무리뿐 사진에서 익히 보아오던 철새들 군무는 볼 수 없었다. 근처에서 어구(漁具)를 손질하고 있는 나이든 어부에게 물어보니 지금 낮시간에는 새떼들이 어딘가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가 해질녘이나 아침녘에는 무리를 지어 날아든다고 한다. 겨울엔 천수만에 가기만 하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을 실컷 볼 수 있겠거니 했었는데 완전 기우였다.
우리는 간월도에 가서 점심으로 굴밥을 먹고는 태안반도로 달려갔다. 꽃지해변의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앞에서 낙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할 때, 우리 주변에서 꺅꺅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은 바닷가라면 사시사철 으레 볼 수 있는 갈매기들뿐이었다.
연수를 다녀온 며칠 후였다. 무심코 TV를 켜는데 때마침 천수만의 겨울저녁이 저물고 있었다. 노을진 하늘 가득 철새들이 떼 지어 내려앉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여름날 남녘하늘에 검은 비구름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하늘이 컴컴해지고 비를 뿌리듯이, 혹은 대보름날 달집태우기를 할 때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라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듯이, 혹은...
그렇다! 해거름녘 천수만 곳곳에 몇몇 정찰기들이 편대비행으로 내려앉는 것을 시작으로 뒤이어 수십 수백, 삽시간에 수천 수만의 전투기들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최신예 미사일이 난무하는 천수만은 격전지 그 자체였다. 끼~륵 끼~륵, 캬~윽 캬~윽, 굉음소리도 요란한 전쟁의 도가니였다. 이런 게 바로 시가 아닐까. 느낌이 있는 시, 그것은 순간의 한 장면이다. 순간의 느낌을 화자의 타이밍에 맞춰 감각적으로 캡쳐하는 일이다.
동지섣달엔 천수만淺水灣 가지마라
저녁 무렵 천수만은 융단폭격 투하장이다 새까맣게 하늘 뒤덮는 포탄들이 갯벌이며 갈대밭에 무차별 낙하하고 있다 붉은 혀 날름거리는 노을 속으로 최신예 탄도미사일들 난무한다 포탄이 비 퍼붓듯 내리꽂히는 한반도 최대 격전지역 천수만,
온통 불길이고 붉덩물이 된 바다는 부글부글 들끓는 유전이다 쇠기러기 재두루미 흑도요 저어새 가창오리탄들 떼 지어 투하되는 소리 끼~륵 끼~륵, 캬~윽 캬~윽, 핏빛 하늘에 경음으로 부딪치고 격음으로 부서진다 갯벌이며 갈대밭에 깨알 같은 자음들이 유탄으로 곤두박질친다 바람에 거꾸러지고 파도에 휩쓸려나간다 온통 불타고 있는 천수만은 곧 거먕빛 암흑에 묻히리라 그대여 동지섣달 저녁 무렵엔 천수만 가지마라 굳이 유탄에 을씨년스런 가슴 한쪽 내주려든
눈감고 귀막고 가라
- 졸시, 『천수만 가지마라』전문
첫댓글 "도가 지나친 생태관광은 또 다른 환경질서의 파괴로 이어진다. 탐조를 위해 도로를 개설하거나 관광버스 진입, 자연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탐조용 콘크리트 누각설치 등으로 동물과 철새들의 불안심리를 가중시키고 있다. 겨울철 먹이주기 행사는 야생조류들의 자연습성적 생존 본능을 잃어버리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신중하지 못한 배려는 자연생태계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그들에겐 자칫 위해(危害)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삿갓 마을에 온갖 인위적인 시설물 심지어 김삿갓 기념관까지 노루목밖으로 옮기자는 글의 내용하며 윗글의 내용하며 산수님은 글자 그대로 100프로 완전 산수! 자연이군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