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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을 위한 최저낙원
정기석
ARCADE 0022
2024년 12월 25일 발간
정가 24,000원
A5(138×210㎜)
273쪽
ISBN 979-11-91897-96-8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잠시’ 살아남는다
[연약을 위한 최저낙원]은 정기석 평론가의 첫 번째 신작 비평집으로, 「흘러내리는 불안과 한없는 연약함들」 「연약과 희박의 최저낙원에서 소멸을 성취하기」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차가운 땅속을 떠돌 동안」 등 22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정기석 평론가는 1982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집 [연약을 위한 최저낙원], 공저 [은유로서의 똥]을 썼다.
•― 책머리에
2010년대 이후의 시가 보여 주는, 약한 것들, 희미하고 희박한 것들에 대한 감각은 모든 존재에 내재한 공통성의 사유로 이어졌다. 동시대 시에서 흔하게 목도할 수 있는 ‘유령’이 이 사회 속 개인이 가진 존재론적 불안에 대한 형상화인 것은 기존에 조망받지 못한 비가시적인 삶에 대한 연대의 표명이면서, 존재론적 지반이 희박한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실존에 대한 가시화이기도 하다. 불안한 삶의 현재에 대한 적시와 이 세계에 가장 연약한 실존들은 여러모로 유령을 닮은 작금의 시 안에서 만난다.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의 상실에 맞닿은 세계적 실존이 가진 비존재성인 것이다. ‘너’의 희미함을 빌어 ‘우리’의 연약함을 가늠하게 하는 그림자의 옅은 빛이 ‘유령’으로 시화(詩化)된 것이다. 무수한 ‘네’가 유령인 곳에서, ‘너’와 다르지 않은 ‘나’도 함께 유령일 수밖에 없는 비(非)존재들의 구체성은 역으로 세계의 위태로움을 가파르게 현전시킨다.
유령성에 대한 사유, 즉 현재의 시간성을 어긋나게 하며 틈입한 비(非)시간적, 비(非)가시적 존재가 가진 이질성의 작성은 비존재를 제거하는 자본주의 및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시적 문제 제기일 수 있었다. 유령성의 시학은 비존재의 희미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희미하지만 확실한 어긋남을 통해 현세에 존재하기 어렵던 것의 존재 증명이 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연약함에 대한 다른 증거로서 숱한 ‘비인간’적 존재들, 예컨대 기계류나 동식물류 혹은 비인간적 혼종들은 ‘인간’에 대한 보완과 증강이 아니라 ‘인간’의 결여와 결핍을 드러내는 또 다른 환유이다. 미래 부재의 전망과 세계의 (불)가능성 속에서 ‘인간’의 결여, 그 연약함이 ‘비인간’적 존재를 현시한다. ‘인간’을 유지하기엔 미래와 세계가, 아니 ‘인간’ 자체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애초 인간/비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서로의 결핍 속에 얽혀 있다는 전망만이 미래와 세계의 연약함을 겨우 지탱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팬데믹 및 인류세 담론의 증가세와 함께 뚜렷한 흐름을 가지는 이러한 시류(詩類)는 마치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약한 것이 세계인 듯, 거의 희미하게 사라진 미래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와 이(異)세계를 서술한다. 다른 세계들의 이와 같은 생멸과 성패야말로 이 세계의 희미함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짊어져야 한다.
파울 첼란이 1970년에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저 구절을 보게 되면, 세계 상실의 상황에서 ‘내’가 ‘너’를 지탱하는 지반이 된다면, ‘내’가 디딜 세계의 지반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물음이 뒤따를 법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일단 미해결로 안고 있자. 이 미해결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지 모르니. 우선, 이때의 짊어짐, 즉 세계 없는 곳에서 ‘나’의 역할이란 다시 ‘세계’가 도래할 곳까지(다른 세계에 닿을 때까지) ‘너’를 운반하는 것이다. 이때 옮겨지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다. ‘너’를 지탱함으로써 ‘세계’의 도래까지 ‘내’가 옮겨진다. 그러므로 세계 부재의 상황에서 ‘나’와 ‘너’는 서로의 세계가 된다. 서로를 위한 세계 되기란 상실과 무(無)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 무게를 더하듯 ‘너’를 업고서야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의 짊어짐을 통해 지반 없는 세계를 건너가는 일에 있어, 상하의 위치는 역전된다. ‘나’는 ‘너’의 짊어짐을 딛고 부재의 세계를 지탱한다. 그러니까 끝없이 추락을 견디면서.
첼란은 시를 남기고 얼마 후 세느강에 몸을 던진다. 첼란의 투신이 세계 없는 세상에 ‘너’마저 부재했기 때문인지, 혹은 ‘너’를 짊어지고 아직 물속을 건너는 중인지(그래서 어떤 ‘세계’가 도래하면 다시 ‘너’와 함께 첼란이, 첼란의 시가 떠오를지) 알 수 없다. 다만 시는 이미 상실된 세계를 마감하지 않고 상실을 끝없이 반복하는 실패를 통해 세계의 짊어짐을 유보해 온 것이다. 마치, 첼란과 다른 시대이지만, 근래의 시들이 ‘나’의 연약함으로 ‘너’를 짊어지고, ‘너’의 희미함을 비춰 ‘나’의 희미함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 저자 소개
정기석
1982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집 [연약을 위한 최저낙원], 공저 [은유로서의 똥]을 썼다.
•― 차례
prologue
011 흘러내리는 불안과 한없는 연약함들
제1장 가장 연약한 것이 미래와 세계인 듯
023 연약과 희박의 최저낙원에서 소멸을 성취하기
045 시(詩)-공간 형성 실패의 사례들
064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차가운 땅속을 떠돌 동안
제2장 연약함이 대신 미래를 감싸안고
085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잠시’ 살아남는다
098 방치된 것들이 넘쳐 우리의 전부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106 함께 있기 불가능했던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미래다
116 재와 사랑의 고고연대학
124 세상은 이렇게 끝나네, 쾅 하고가 아니라 울먹이며
제3장 연약한 것끼리 세계의 진창을 대신하네
135 우리가 서로의 어깨를 붙들고 사소하게 붕괴되는 동안
143 엉망이라는 비질서와 진창이라는 바닥에서 우리 함께
156 꽃의 뒤, 여남은 분홍들의 시간
168 애도와 태도: 죽어 가는 이들과 함께 지금-여기
제4장 세계의 상처 속에 함께 머물기 위해
177 재실패화를 향한 헛스윙, 헛스윙
185 어긋난 늑골과 함께 견디는 것
193 어둠이 백 개의 꺼먼 눈알로 내다보는 곳에서
201 기억의 기원 그리고 다른 소문들
제5장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시하고 노래하네
215 보이저호에 대해 잘 알려진 사실과 덜 알려진 사실
224 가장자리에서 만난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
236 노래하는가, 노래했나, 노래할 것인가
243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
epilogue
263 비평, 난해하거나 불편하거나 쓸모없거나
발표 지면 272
•― 책 속으로
미셸 세르는 연약함이 시간을 만든다고 썼다. 연약함이 시를 만든다. 더불어 티머시 모튼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취약하고 섬세해야만 한다”고 썼다. “취약함과 섬세함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붕괴하고 마는 상태로 존재함을 뜻”한다, “세계는 부서지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세계가 작금처럼 부서지는 가운데 가장 단단한 존재 의의를 얻는 건 아닐까. 이때의 시는 시대적 저항을 위한 역동성이라기보다, 타자와 세계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 속에서 체념과 절망의 외피를 두른 희미함으로 현재의 시간을 만든다. 한없이 희미한 시들은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있다. 희미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이어짐을 만들고, 그 연약함이 무언가를 함께 있게 한다. 시는 ‘함께 있음’마저도 모조리 깨어질 때의 마지막 파열음으로도 작성된다. (「흘러내리는 불안과 한없는 연약함들」, p.20.)
연약함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음을, 또한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 및 환경과 상호 의존적인 얽힘의 네트워크 안에 있음을 말한다. 동시에 연악함은 감수성의 다른 말이다. 감수성, 즉 상처받기 쉬움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고,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무엇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컨대, 이전의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 자체가 아니거나, 혹은 그 어떤 (비)무엇(들)으로 변이하기 위한 최소한인 것이다.
상처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방어가 인간-정체성을 호두알보다 작은 세계 안에 고립시키고 그 속에서 달그락거리게 할 뿐이라면, 연약함의 얽힘은 최저낙원을 만든다. 연약함은 결코 혼자가 아닌 방식으로, 함께 얽혀 있는 다른 연약한 것들과 함께, 위태로움으로 얽혀 있는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될 수 있는 잠재태의 지대를 구성한다. 파기된 세계, ‘곤죽이 된 세계’는 물론 높은 확률로 ‘지금의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작고 꾸물거리는 벌레’ 같은 무언가 탄생하는 우주, 그때 성취되는 우주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연약과 희박의 최저낙원에서 소멸을 성취하기」, pp.42-43.)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 내쳐진 현대의 특질을 ‘유동하는 액체성’으로 정의한 바 있다. 발 디딜 곳이 흔들리는 지반의 위태로움으로 말미암은 유동성 불안이 한 시대를 정의하는 정체성이 되었다면, (“과포화 상태의 액체가 특정한 원료, 에너지, 정보 조건이 맞으면 고체화”되듯) 유동성 위에서 과포화된 불안은 일종의 유리-파편적 실존을 초래한 듯하다. 불안은 깨어질 듯 위태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발판이 된다. 타인이 들어설 곳 없는 좁디좁은 자신만의 파편에 웅크린 채, ‘나’의 동질화만 반복게 하는 액정 스크린 속 알고리즘만 붙든 채, 부서질 일만 남은 불안들이 웅크리고 있다. (「시(詩)-공간 형성 실패의 사례들」, pp.47-48.)
이 글을 쓰는 내내, 어떤 전쟁의 현장 앞에서 이런 글은 무슨 소용인가, 이 글은 실재하는 폭력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거칠한 불편감이 “동백꽃잎”처럼 등을 찔렀다. 존 버거의 문장을 빌려 본다. 이 글은 “부끄러운 밤의 한가운데서” 쓴 것이다. “전쟁 중이라면, 밤은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사랑하고 있다면, 그 밤은 우리 모두가 함께임을 확인해 준다.” 부끄러운 밤은 여전한데 함께인지는 알 수 없어, “가자시티, 다시 전쟁의 최전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는다. 모든 전쟁을 개개인 각자의 것으로 돌리는 때가 전쟁이 기어코 승리하는 순간이 아닌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차가운 땅속을 떠돌 동안」, p.81.)
‘연인’이란 바탕 없는 세계, 속도로 인해 무감각해진 세계에서 서로에게 감각과 발 디딜 곳이 되어 주는 존재이다. 연인은 어떤 대상에 대한 감각・지각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타자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연대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낡은 항구가 돼서 영원히 너의 이불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고, 바깥에 초인종이 울려도 “이불을 뒤집어”쓴 채 집에 없는 척할 수 있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잠시’ 살아남는다」, p.93.)
“온전한 것은 환상이다.” 사라 아메드는 ‘오멜라스’의 예에서 “행복의 약속이 얼마나 고통의 국지화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를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방치한 채, 그 ‘고통의 국지화’에 기대어 온전한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인은 방치된 것들, 어느 “건물 아래”에 묻힌 고통과 상처들에게로 돌아간다. 방치된 것들의 안부를 묻는다. 시는 그러한 감각과 감수성의 기록이다. ‘천천히 죽어 가는 소녀’를, 방치된 어느 곳에서 죽어 버린 이들을 감각하고, 공명한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둔감함의 벽을 두드린다. 뒤에 갇혀 있는 건, 기필코 ‘너’의 상처이기도 하다고. (「방치된 것들이 넘쳐 우리의 전부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pp.103-104.)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한다. 되풀이하자면,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도 반복해 쓰다 보면 실재하게 된다. 계속된 언어의 영향은 실재한다. 믿을 만한 것들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들이 현실을 만들어 내듯, 시작도 전에 시작하고 끝 이후에도 되풀이하는 사랑처럼, “하나의 과거와 하나의 현재로서가 아니라, 지속의 흐름 전체에 의해 분리된 양립할 수 없는 여러 순간들을 어떤 감각적인 동시성 속에서 공존하게 하는 어떤 동일한 현전”이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끝없이 오류를 되풀이하면 미래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미래가 오기까지, “가능성을 위해서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껴안는” 용기 속에서 ‘버티기(Standhalten)’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미래는 오고 가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와 서로를 헤매면서 함께 있는 게 아닐까. (「함께 있기 불가능했던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미래다」, p.114.)
빛은 장소를 특정하기 위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다. 빛이 지금 내린다는 것은 그때에도 내렸고 앞으로도 내린다는 의미이다. 시인의 시점이 과거나 미래를 오갈 때에도 시인이 지금-여기를 감각하는 것은 빛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아직 (그리고 나중의 어딘가에도) 오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동시적 편재에 가까운 이어짐이 시공의 경계를 지운다. 같은 빛을 공유하며 시간들은 동시(同時)의 장소에 도달한다. 포옹 안에서 ‘우리’는 같은 곳에 묻혀 있다.
그 “지나치고 원시적인 사랑이” “거실 풍경과 미래를 하나로 꿰어 방치시킨다.” ‘나’는 “가끔 내게 없는 삶을 기억해 내”지만, 이젠 “빛”이 “내게 없는 삶을 기억해” 낸다. 빛이 기억의 주어가 된다. 마치 재 속을 발굴하면, 시인 혹은 다른 누군가가 웅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만이 오롯이 홀로 눈뜨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듯. 발굴해야 할 것은 그뿐이라는 듯. (「재와 사랑의 고고연대학」, pp.122-123.)
데이비드 페리어는 시가 시간의 매듭이며, 물질과 감각과 기억의 복합체라고 썼다. 그에 따르면, 시는 인식의 순간을 확장하고 압축하여 ‘우리’를 감싸는 장구한 시간(deep time)의 스케일을 드러낸다. 즉, 시는 우리의 미래에 남겨진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우리가 잃을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우리가 미래에 잃을 모든 것을 미래에 남겨 둔다.
아마도 미래는 지금의 ‘인간’을 위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남은 인간의 슬픔은 무슨 소용일까. 그럼에도 시인이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을 고수하거나 지금 우리의 슬픔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힘에 대한 신뢰와, 여전히 다음을 살아갈 세대에 대한 예의에 가까울 것이다. 미래의 비전은 없어도 이어짐은 있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네, 쾅 하고가 아니라 울먹이며」, pp.129-130.)
울프의 문장을 변용하자면, 평범한 날의 평범한 마음속에는 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들이 모든 방향에서 무수한 원자의 소나기로 내리고, 그것들에 대한 인상이 우리의 삶을 구성할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그런 것들과 접촉하는 ‘시인’은 “발끝부터 새로워지려고 이름을 지우고 시를” 쓴다. 여기 임지은의 ‘시인’은 예술적 자각이나 자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쓸모없는 것의 곁을 오래 지켜서 같이 쓸모없어진, 실은 쓸모와 무관하게 편재해 있는 (보풀과 다르지 않는) 무엇일 뿐이다.
그러므로 임지은은 어떤 의미 부여나 명명에서가 아니라, 부사처럼 ‘쉽게 버려지는’ 것들, 잔해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단어를 핀셋으로 건져” 올리며, 그것들이 붕괴되어 가는 시간을, 그것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노출은 무감각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어떤 노출도 그것이 유효한 유통기한이 있다. 감각이 무뎌지는 것 역시 모든 와해만큼 필연적이다. 그러니 시인은 시작(詩作/始作)한다. 그것들과 같이 서로의 어깨를 붙들고 ‘다시’ 사라지기 위해서. 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끝내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의 어깨를 붙들고 사소하게 붕괴되는 동안」, pp.141-142.)
어떤 고통은 생명 일반의 보편적 문제에서 기인할 것이고, 어떤 고통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모든 고통이 온전히 개인의 몫일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납득과 체념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고통의 개인화는 고통에 대한 다른 물음들, 예컨대 고통에 관한 제도적이고 사회구조적인 연관성에 대한 물음을 소거시키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은 시인이 되찾으려고 했던 “새로운 답이 아닌/진부한 질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여전히 엉망진창인데,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 ‘페이크’를 쓰고 있지 않나. 엉망과 진창을 숨기고 그 속의 고통은 그저 각자의 몫인 양 시야를 막고 있지 않나. (「엉망이라는 비질서와 진창이라는 바닥에서 우리 함께」, pp.144-145.)
꽃은 앞에서 반짝인다. 꽃이 전경(前景)을 차지할 때, 꽃의 뒤는 앞을 지지하고 지탱한다. 그런데 꽃의 끝, 꽃이 낙상할 때 드러나는 꽃의 뒤란, 우리가 지금-여기까지 오느라 잃은 것들, 떨어진 꽃과 시간의 잔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을 감각하게 한다. 한 식물의 첨단이자 끝인 꽃은 그 나무의 시간을 품고 있다. 꽃을 밀어내는 힘은 그것이 지금까지 품고 온 나무의 시간에 있는 것이다. 시간은 순간의 잔여로 흩어지지 않는다. 매 순간들의 축적인 나무가 꽃을 기억하며 남아 있다. (「꽃의 뒤, 여남은 분홍들의 시간」, p.160.)
지구의 생태적 위험을 알리는 숱한 지표들과 우리가 당장 목도하고 있는 기후 위기 속에서,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미래는 없다(No Future)’고 말한다. 피셔의 표현은 중의적인데, 우선 이대로 세계가 지속된다면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며, 동시에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다음’의 기회 같은 건 없다라는 위급한 요청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미래 인지 감수성을 지닌 누군가들은 ‘가능한 모두’의 미래를 위해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유하면서, 모든 ‘지금’이 미래를 붙들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시급함에 쫓긴다. (「애도와 태도: 죽어 가는 이들과 함께 지금-여기」, p.168.)
실패는 “자본주의와 이성애적 규범 모두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기에 나쁜 출발점이 아닌” 것이다. ‘모든 나’와 같이, 부정과 결여의 존재들이 모여 있는 실패의 지대, 비존재의 세계로 나아간다. 위계와 억압을 조성하는 사회에서 유령이 된다는 것은 체제가 재단하는 “이분법의 몸”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유령’이 실제적 죽음이든 혹은 사회적 비존재에 대한 은유이든 간에, 실패에 대한 판정을 체제에 맡기지 않는다. “우리를 실패로 보는 사회의 규범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패를 세계나 사회체제에 맡기지 않는 능동적 오류가 되는 것이다. (「재실패화를 향한 헛스윙, 헛스윙」, p.182.)
슬픔의 기원을, 예컨대, ‘너’의 상실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너’는 지금 어디서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시간-현전의 좌표일 따름이다. 상실이 모든 ‘있던’ 것에 뒤따르는 필연성이라면, 슬픔은, 최초의 상실에서 기원했다 할지라도, 기원이 시간 속에서 소진된 이후 시간 그 자체에서 반복된다. 어떤 슬픔은 하나의 과거의 결절점에 속하는 게 아니라, 견딤의 시간을 반복하는 삶 자체에 가까워진다. 시는 슬픔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반복되도록 감수한다. (「어긋난 늑골과 함께 견디는 것」, p.189.)
우리의 ‘현실’이란 어떤 실재를 가린 얇은 가림막일지도 모른다. 덧붙여 그 ‘현실’이란 우리가 가진 인지 한계 내에서 삶을 편하게 영위하기 위해 “고도로 선택적인 스크린(차단막)에 의해” 맞춰 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완고한 필연성들로 뭉쳐진 강건한 벽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겨우 얇은 피막이라면, 그 뒤엔 무엇이 있는가? 화상이나 흉터는 우리가 “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는 세계”의 지칭일 뿐이다. 그 너머에는 무언가 있다. 꺼풀 뒤에 있는 것이 어떤 도달 불가능한 ‘실재’인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으슥한 곳에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평범성(banality)의 벙커”를 뒤흔든다. (「어둠이 백 개의 꺼먼 눈알로 내다보는 곳에서」, p.194.)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된다. 하지만 소년의 이야기 속 소년은 계속 소년으로 남아 이야기를 전한다. 소년은 이야기 속에서 미완을 완성한다. 역으로, 소년이 더 이상 소년으로 불리지 않는 세계는 세상 모든 사람이 소년인 곳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소년인 세계가 있다고 해도, 그중에 누군가는 자라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비소년이 소수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고아인 세계가 있다고 해도 고아와 고아가 만나 사랑을 하고, 두 명의 고아를 부모로 둔 누군가 태어난다. 그러니 끝내 소수(少數)가 차이로 남는다. 이 외로움의 순환 속에서 또다시 고아가 된 소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미래는 시로 미리 씌어졌다. 끝내 작은 차이로 남기 위해 기원이 불분명한 기억을 영원히 맴도는 작은 물음들. 작은 물음(小問)을 그치지 않으면서 어떤 경계선을 넘어 남겨지는 작은 미래들의 시로서.
양들은 경계를 넘지 않았다. 경계선이 양들을 갈라놨을 뿐. 고아들은 멀리 가지 않았다. 우리가 갇혀 있을 뿐. (「기억의 기원 그리고 다른 소문들」, pp.210-211.)
우주적 외로움은 우주의 시공간적 크기와의 대비에서 비롯된다. 상상 가능한 우주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 안에 내쳐진 인간은 먼지처럼 미소(微小)해진다. 우주의 크기가 상상 가능한 임계점을 넘어가면 우주적 외로움은 숭고를 획득한다. 우주 대 지구(혹은 인간)의 대비에 어떤 수치를 대입해도 거의 무한(無限) 대 1이라는 환산 불가능한 비율이 나온다. 우주란 일종의 크기의 불가능이다. 상상 불가능한 대비에 부딪힌 가련함의 고독에는 일종의 자학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여기에, 먼지같이 작은 ‘내’가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의 불가능이 더해진다. 먼지적(dustic) 외로움이다. (「보이저호에 대해 잘 알려진 사실과 덜 알려진 사실」, pp.215-216.)
언어는 정동으로 일어난다. 아니, 애초에 언어와 정동은 얽혀 있고 엉킨 채 발생한다. 언어-사물의 펼쳐짐은 활자를 넘어서 지금-여기의 정동에 잇닿는다. 물체나 신체에도 “정동적 얼룩”이 묻어 있고, 기호 역시 기호에 내재한 효과 속에서 정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컨대 “리을을 발음하지 못하는 병에 걸”리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역으로 다른 걸 적으면 거기에서 다른 기분이 피어날 것이다. 그것이 여기-어디를, 지금-다른 미래를 희박하게나마 이을 것이다. 시인은 ‘끝’을 ‘꽃’으로 잘못 썼다. 잘못 쓴 것은 열려 있다. (「가장자리에서 만난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 p.235)
제 몸 하나 불태우지 못할 겨우 그런 사랑으로 어떻게 ‘당신’이 노래(絶唱)가 될 수 있을까, 존재를 뒤흔들 가열함 없이 사랑이 어떻게 노래가 될까라는 것이다. 단순한 마찰이나 그로 인한 약간의 통증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온 존재를 뒤흔들겠다는 각오, 불타는 자동차에서 함께 탈 각오의 사랑은, ‘나’의 죽음마저 예감하는 통렬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강렬함에는 물론 고통, 통증, 상처가 뒤따른다. (「노래하는가, 노래했나, 노래할 것인가」, p.239.)
‘비(非)’와 ‘불(不)’로밖에 표현되지 않던 느낌을 인칭・형상화하는 것은 느낌이 지닌 규정 불가능에 형태를 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와 ‘불’의 속성과 다퉈 그것을 규정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이는 다만 인지적 이해의 어려움에 따라 쉽게 외면당하고 주변부화되었던 ‘비’와 ‘불’의 속성과 화해하기 위한 방법론, 즉 불가능과 비규정을 끌어안고 그것이 가진 곤란함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느낌의 ‘비’와 ‘불’의 속성에 대해서는 느낌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보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시편들을 통해 느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와 ‘불’의 곤란함과 어떻게 함께하는가.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 p.245.)
불편과 불일치가 없는 ‘나-세계’ 속에서 ‘내’게 모순되는 ‘내’가 제거될 때, ‘나-세계’가 가진 다발성과 창발성도 함께 사라진다.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과 종언이다. ‘나’는 잠재적 부피를 잃고 점차 점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 그것의 귀결은 생존경쟁의 포식적(捕食的) 욕구, 또는 생존 안전의 피식적(被食的) 열망만 남는 단세포 엔딩이다. 경쟁 우위에 서기 위해 타자를 잡아먹는 욕구만 남거나, 그런 폭력과 피로에서 멀어져 타자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 회피하는 (다른 가능성을 점차 상실한 작디작은) ‘나’만 남거나. (「비평, 난해하거나 불편하거나 쓸모없거나」, pp.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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