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는 J 선생님의 글이 발단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다녀와서 쓴 그분의 글이 내 맘에 불씨를 지피지 않았다면, 14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 여행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분의 글 속에는 영혼의 울림이 있었고 그 흔적을 좇아가면 나 역시 글쓰기에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발걸음을 부추겼다.
재즈 발상지인 뉴올리언스 여행에 대한 워밍업으로, 떠나기 전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수십 번 듣고 따라 불렀다. 일행 세 사람이 모두 문인이라 여행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환승하는 비행기 표를 끊을 때도, 숙소를 예약할 때도 다소 불편함이 있더라도 감성 여행을 하겠다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특히 매일 밤 좋은 수필 한 편을 읽고 토론하자는 것에 뜻을 모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증폭시켰다.
2월의 뉴올리언스 기후는 캐나다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도착한 다음 날, 온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멀리 외출하기가 마땅찮아 숙소에서 가까운 오듀본 공원(Audubon Park)을 산책하기로 했다. 수령이 족히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참나무들로 울창한 공원이었다. 나무들은 웬일인지 반듯하기보다는 뿌리가 땅 속에 내리지 못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온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뻗은 가지들도 예사롭지 않게 얽히고설켜 그것들이 이루는 조합이 차마 웅장하다거나 멋지다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불현듯 오래전 노예 상인들에게 포획되어 이 땅에 끌려 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모습이 나무와 함께 오버랩 되었다. 그들이 목화밭에서 착취당하며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그때, 나무들 또한 고통에 동참하듯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사십여 년 전 미국 드라마에서 보았던, 알렉스 헤일리 원작 '뿌리'가 생각났다. 높은 아치형 기둥으로 둘러싸인 저택에서 백인 농장주가 뛰어나와, 도망치다 잡힌 자신의 노예를 사정없이 채찍으로 휘두르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참나무에 매달린 노예는 종일 음식도,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려 살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빗물을 받아 마시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또다시 노예로서의 삶은 계속될 터이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비에 젖은 산책길을 은근히 불평하던 내 모습이 괜스레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공원 중앙 호숫가에는 주황색 부리를 가진 오리 떼가 그런 일에 아랑곳없다는 듯 유유자적하게 노닐고 있었다.
뉴올리언스의 명물 구역,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는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뉴올리언스는 1803년까지 스페인과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미국에 합병된 땅이다. 이 구역은 당시 유럽풍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피해 때문인지, 대체로 습한 기후 때문인지 몰라도 곳곳에 곰팡이가 덮인 건물들이 즐비했다. 한 달 가량 펼쳐지는 기독교 축제인 마르디 그라(Mardi Gras) 덕분에 현란한 장식들이 건물을 가려주고 있어 음침한 거리가 화사해 보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커피와 도넛으로 유명한 157년 된 카페 뒤 몽드(Cafe du Monde)는 미시시피강 증기 유람선을 찾아가는 길목에 있었다. 꽤 이른 시각인데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제법 길었다.
프랑스 오를레앙의 지명을 따서 뉴올리언스라 이름지었다는 이 도시는 미국도 아닌 듯, 프랑스도 아닌 듯 묘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J 선생님이 보았다는 증기 유람선, 나체즈(Natchez)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미시시피강 선착장에 거대한 몸집으로 정박해 있는 선박 꼭대기 증기 오르간에서 재즈풍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광장 전체를 뒤흔드는 울림이었다. 공교롭게 푯말에서 1718년,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이곳을 통해 아프리카 흑인 451명이 처음으로 노예선을 타고 팔려 왔다는 안내문을 읽었다. 그때부터 100여년 동안 흑인 노예무역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미국 최대의 노예무역항이었다니. 불과 200여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이 자리에서 소나 말처럼 경매에 의해 백인농장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오듀본 공원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슬며시 살아났다.
프렌치 쿼터에 매료된 관광객들이 저마다 재즈 리듬에 들썩이며 거리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유유히 흐르는 미시시피강 위에 노예선을 닮은 증기선은, 비싼 가격을 붙인 브런치• 디너 크루즈 광고로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마르디 그라 축제로 거리 곳곳의 곰팡이 낀 건물이 화려한 장식 뒤에 가려져 있듯이 프렌치 쿼터 전체에 넘쳐 흐르는 자유분방함 뒤에 흑인들의 참담한 역사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잭슨 광장에서 흑인들로 이뤄진 길거리 악단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흥겨움의 몸놀림을 하며 공연을 감상한 답례로 돈 몇 푼을 기부 통에다 집어넣었다. 재즈를 이해하는 사람이 진정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들이 뿜어내는 노래와 몸짓은 한 인간으로서 속박에 저항하는 외침이며 자유를 부르짖는 몸부림이리라. 문득 오래전 죄책감 없이 노예제도를 누리던 백인들이 찬양했던 하느님과 흑인 노예들이 생사의 문턱에서 붙잡고 매달렸던 하느님은 어떤 차이인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음악은 신나게 연주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율이 나에게 다가와 '너희가 재즈를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