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브른 성을 나와 우리는 성 슈테판 성당으로 향했다. 20년 전 그곳 광장 앞 노천 맥주집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던 생각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제 갈 길로 무심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 시내에서 들었던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게른트너 거리를 얼마 동안 걷다보니 건물들 사이로 삐죽이 뾰족한 탑이 보였다.
성 슈테판 대성다의 첨탑이라 짐작되었다. 거리의 아파트들은 일정한 높이 제한이 있는지 대부분 5층을 넘지 않았다. 거리 이곳저곳에 눈길이 가 닿았으나 가이드는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다. 마침내 게른트너 거리 끝에 위치한 성 슈테판 대성당에 이르렀을 때는 20년 전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서 맥주를 마셨지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노천 맥주집이 있을만한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모두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성당의 외관은 마치 모래성을 쌓아올린 것처럼 아기자기했다. 대성다의 외관은 오랜 세월 탓인지 대체로 거뭇한 편이었으나 매우 화려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런 외관과 달리 실내는 다소 어두운 편으로 ‘기도드리기에 세계에서 가장 엄숙한 장소’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어둠조차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성당의 건축 양식은 바로크 양식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건물의 양식에 대해 구분을 못한다. 남쪽 탑은 고딕형의 최고 건축 기술로 유명하다는데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아픈 것을 제외하면 그 유명세를 실감할 길이 없다.
가이드는 성당 앞쪽의 설교단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며 설명했다. 설교단은 16세기 모라비아 출신의 ‘안톤 필그람’의 작품인 고딕형 설교단으로 선을 상징하는 개와 4명의 성직자, 그리고 악을 상징하는 도마뱀과 두꺼비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단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자 예배 공간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도록 해 놓아서 설교단 가까이로 가 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뒤편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성당 안은 여러 관광객들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성당의 천정은 매우 높았다. 대부분 지금까지 본 성당들도 천정은 하나 같이 높았다. 왜 그랬을까? 채광 때문일까 아니면 신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염원 때문일까. 궁금증 해결을 위해 여행이 끝나면 천주교라도 다녀야할 모양이다. 어떻든 성당 내부는 경건했고 장엄했으며, 관광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성 슈테판 대성당은 모차르트의 행복과 비극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아내와 결혼을 했다. 빈 대주교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모두 허용된 것은 아닐 것 같다. 모차르트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을 살았고 마침내 그가 결혼식을 올린 대성당에서 자기의 장례식도 치뤘다.
지금도 비엔나 시 외곽의 시립중앙묘지에 가면 묘지 한쪽에 음악가들의 묘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곳을 가보지 못했으나 20년 전에는 그곳을 들렀었다. 그곳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스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묘지가 빙 둘러서 있다. 당연히 모차르트의 묘지는 가묘라고 했던 것 같다. 사실 그 공동묘지는 유명 음악가들의 묘지보다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한 이름 모를 묘지가 더 기억된다. 불행하게도 묘지에 들어갈 때 그날 준비한 필림이 모두 동이 나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사진기도 필리을 사용해 찍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묘지는 관 위에 망인이 된 남자와 살아있는 그의 부인의 서로 부둥켜 않고 있는 조각상을 앉혀 놓았다.
죽음일지라도 서로를 갈라놓지 못하게 하는 듯 했다. 그 동안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왔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장례식은 당시의 매장 법에 따라 엄수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죽고 다음날 그의 유해는 이곳 성 슈테판 대성당으로 운구 되었고 이 성당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성당 바깥으로 나와 다시 성당의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벽면의 각종 장식물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나 알 길이 없었다. 날씨 탓일까 대성당 앞의 시내 투어용 마차는 손님을 태우지 못해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짧은 비엔나의 투어는 여기서 끝났다. 비엔나는 체코의 프라하로 가는 과정에서 그저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