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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孝公墓誌銘」
양효공 묘지명
* 양효良孝 : ‘양良’은 ‘따뜻하고 어질어 좋아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하다(溫良好樂曰良)’는 뜻이고, ‘효孝’는 ‘자혜로워 어버이를 사랑하다(慈惠愛親曰孝)’라는 뜻이다. 『일주서逸周書』 「시법諡法」.
* 정익貞翼 : 참고로 정익공의 시호를 여기에 풀어둔다. ‘貞’은 ‘크게 사려하여 능히 다스림(大慮克就)’이란 뜻이며, ‘翼’은 ‘사려가 깊고 뜻이 원대함(思慮深遠)’이란 뜻이다. 『일주서逸周書』 「시법諡法」.
崇祿大夫行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致仕奉朝賀贈諡良孝洪公墓誌銘 幷序
숭록대부행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치사봉조하증시양효홍공묘지명 병서
聖上卽位之三十八年庚辰正月丙寅 上出御明政殿月臺 召見耆社諸臣 宣饌訖 前判書洪公進伏下前曰 老臣不死 獲瞻耿光 今雖退塡溝壑 更無餘憾 臣之父子受國厚恩 致位崇班 常懷懍懍之憂 惟先臣休致之請 終爲未遂之恨 臣若乞骸以退則亦可以卒 先臣志事而歸報於地下矣 上曰 意甚媺矣 予當時循卿願 遂命致仕奉朝賀 親製四言詩八句以御筆書下 公進前擎受 感極嗚咽 仍命月致米肉 公上箋陳謝 先是上以貞翼公受知明陵未及大用 累下敎於筵中 不數年擢公上卿 至是又許其休致 俾述遺志 殊恩異渥曠絶臣潾 是豈無所以而然哉 昔宋臣王素以文正季子受知仁宗 又以工書致仕 今公遭遇與之相類 亦安知聖意之隆 摯不出於追念 世舊別有相感而然耶 盛世君臣之會 可以匹休於百世之下 嗚呼 休哉
성상(영조)이 즉위한 지 38년째인 경진년(1760년) 정월 병인 날에 주상께서 직접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기로소의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내렸다. 전 공조판서 홍공이 주상 앞에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노신이 죽지 않고 우러러 훌륭한 선조의 덕을 받았으니 지금 비록 물러나 죽어도 다시는 여한이 없겠습니다. 신의 부자父子가 나라의 후한 은덕을 받아 존숭 받는 반열에 올랐으니 늘 위태위태한 근심을 품었습니다. 오직 제 아버지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이를 이루지 못한 한이 있었습니다. 신이 사직을 청하여 물러나 또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저승에 돌아가 보답하고자 합니다.”하였다.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공의 뜻이 매우 아름답구나. 짐이 때에 맞춰 공이 원하는 바를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를 삼을 것을 명하노라.”하였다. 주상이 직접 사언시 8구를 지어 어필御筆로 써서 내려주시니 공이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받아 매우 감격하며 오열을 하였다. 이어 달마다 쌀과 고기를 내려주기를 명하였는데 공이 이에 공문을 올려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익공은 숙종이 알아주었으나 크게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경연 중에 여러 번 하교를 하여 몇 년이 안 되어 정익공을 상경上卿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사직함을 허락하였으니 더하여 정익공이 남긴 뜻을 적는다. 주상의 특별하고도 유례가 없는 은총에 신은 마음이 맑고 밝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옛날 송나라의 신하 왕소王素는 문정계자文正季子로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 공조판서의 직을 물러난다고 하니 오늘 공은 왕소와 같은 이를 만나는 것이니 어찌 성상의 큰 뜻을 알아 공경히 추념함을 드러내지 않고 대대로 오래된 각별한 감정임을 알겠는가? 태평성대에 임금과 신하의 만남은 백세百世 이후에도 훌륭한 짝이다. 아아, 훌륭하도다!
* 왕소王素, 417~471 : 송나라 인종 때 사람으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성품이 꾸밈이 없었다. 곧은 지조와 담박한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이해를 다투지 않았고, 농사짓는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았다고 한다. 벼슬은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이르렀다.
公諱重徵字錫予號梧泉 我洪籍豐山始祖諱之慶麗朝魁文科官國學直學 其後軒冕蟬聯 高祖諱履祥大司憲贈領議政號慕堂以經術德行爲穆陵名臣 曾祖諱탁通政府使贈左參贊 祖諡柱天縣監贈左贊成 考諱萬朝判敦寧府使贈領議政諡貞翼號晩退堂世稱淸德完名妣安東權氏贈吏議瑱之女吉城尉大任之孫以壬戌十二月生 公幼而儁偉器度異凡兒 貞翼公常曰 大吾門者 必此兒也
공의 휘諱는 중징重徵이요 자는 석여錫予이며 호는 오천梧泉이다. 우리 풍산 홍문의 시조 휘 지경之慶은 고려조에 문과 장원으로 벼슬은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냈으며, 그 뒤에 조정의 관원을 잇달아 배출하였다. 고조 휘 이상履祥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영의정으로 추봉되었고 호는 모당慕堂으로 경서의 학문으로 선조宣祖때 명신이었다. 증조 휘 탁𩆸은 통정부사通政府使로 사후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추봉되었고, 할아버지 휘 주천柱天은 현감으로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추봉되었다. 아버지 휘 만조萬朝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를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시호는 정익공貞翼으로 호는 만퇴당晩退堂이니 세상 사람에게 맑은 덕으로 칭송 받았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이조참의로 추봉된 진瑱의 따님이며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의 후손이다. 임술년(1682년) 12월 태어난 공은 어려서 용모가 뛰어나고 헌걸차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니 정익공은 늘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自少立心行己一於誠實 無一毫虛僞 常以司馬公平生所爲未嘗有不可 對人言者爲法 辛卯登進士 癸巳擢增廣甲科例付直長 乙未陞典籍通持憲 內則騎郞知製敎掌令司成司僕正宗簿正掌樂正刑議兵議承旨右尹副摠管刑曹參判戶曹參判知中樞工曹判書入耆社外則龍仁朔寧順天濟州江陵鳳山 掌令時當戊申逆變 自鄕奔問疏陳設防制治之策營鎭疎虞之弊 上嘉納之 亂稍平 上下哀痛 詔公疏論良役變通之宜 請今朝臣會議朝堂 如天章故事 因請擇守令嚴選法 又曰 天理人欲之分 國家存亡之機 無一本於殿下之一心 宮房折受之罷 諸道物産之減 次第命下 是心之發 卽天理之所發也 願殿下恒持此心 擴而充之 勿謂寇亂之已平生 民之粗集而動靜施措一裁以義理則古所謂殷憂啓聖 多難興邦 此其機也 責勉君德 言多激切 上優批嘉獎 公夙負儁望 朝夕騰顯而剛方 自持不與世推移爲當路者 所忌 故榮途華貫一不及焉
어려서부터 마음가짐을 오롯이 하고 몸을 단속하기를 진실하고 헛되이 하지 않아 한 터럭도 허망하거나 거짓이 없었으니 늘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것처럼 ‘평생토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여 모범이 되었다. 신묘년(1711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계사년(1713년)에 증광시增廣試 갑과에 등제하여 직장直長이 주어졌다. 을미년(1715년)에 전적典籍에 올라 내직으로는 지평持平·병조의 낭청騎郞·지제교知製敎·장령掌令·사성司成·사복정司僕正·종부정宗簿正·장악정掌樂正·형조참의刑議·병조참의兵議·승지承旨·우윤右尹·부총관副摠管·형조참판刑曹參判·호조참판戶曹參判·지중추知中樞·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외직으로는 용인·삭녕·순천·제주·강릉·봉산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인 ‘무신역변戊申逆變’을 맞아 시골에서 달려가 성상의 문후를 여쭙는 상소를 올리며 역적의 무리를 막아 제압하여 다스리는 계책과 군영과 군진의 방어가 소홀한 폐단을 지적하여 말하니 주상이 가상히 여겨 이를 받아들였다. 난이 조금은 평정되니 상하의 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주상이 공의 상소에 조서를 내려 양역良役을 융통성 있게 하는 방안을 논의케 하니 공이 오늘 아침 신하들을 조정에 모이기를 청하여 하늘이 내린 문장처럼 달변으로 의논하였다. 이로써 수령을 엄정하게 선출하는 법을 세우길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구분하는 일은 나라의 존망存亡의 기틀이니 전하의 한 마음에 하나의 근본을 둔 게 아닙니다. 임금으로부터 땅이나 논밭의 넓이에 따라 매기던 곳에서 나온 세금을 자기 몫으로 잘라 받는 것折受을 없애고 각 도에서 올리는 진상품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차례차례 하도록 어명을 내리십시오. 이러한 마음이 이는 것은 곧 천리가 이는 것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늘 이러한 마음을 지니소서. 더 부연하여 말씀드리면 역적의 무리들이 일으킨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백성이 사방에서 모이면 그 움직임을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로써 한 번에 마무리 지어야 하니 옛날에 나라가 혼미하거나 밝은 시대를 맞거나 많은 어려움이 있거나 나라를 흥하게 함은 오늘에 달려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굳건히 하는 기틀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에 힘쓰소서! 주상께서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게 저의 간절한 심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공의 상소에 가상하다는 비답을 내려 장려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뛰어난 인물이어서 조석으로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랐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하여 스스로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자 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기피를 하였으니 영화榮華가 공에게 미치지 않았다.
* 하늘이 내린 문장처럼 : “공은 옛날에 용을 타고 백운의 제향帝鄕에 노닐면서, 손으로 은하수를 퍼 담아 하늘의 문장을 분담했다(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라고 하여 한유韓愈의 문장을 기렸다. 소식蘇軾이 지은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
公議莫不嗟惜而公則泊然不以爲芥 庚戌自順天解歸 卜居溫陽先墓下 書史自娛爲終老計 公居郡 輒有來暮之誦 在耽羅多異政 至於浙江漂人 亦皆感歎頌德而服公淸操 周年治化大行 御史褒聞大臣薦公才諝 請召用 上曰 予見繡啓 已知其如此矣 秋遆歸中流遇風 船幾危 舟人服栗而公夷然端坐 若在齋閣 人比之呂正惠之檣折讀書 己巳左相趙顯命筵白吳光運洪景輔 死後宜拔其自中 可爲標準者別爲擢用 上問 誰也 相臣對曰 天鑑想已知其人矣 上曰 然則故判書洪某之子也 吏判鄭羽良 亦稱其人甚忠實 秋上親政擢爲亞尹
조정에서의 신하들 간의 공의公議는 아쉬움과 탄식을 자아냈고 공은 무심해져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없는 처지였다. 경술년(1730년) 순천 부사에서 돌아와 온양의 정익공 산소 아래에 터를 잡고 경서와 역사서를 즐겨 읽으며 노년을 마치려고 하였다. 공이 온양에 있을 때 문득 내모來暮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제주도에 있을 때는 괴이한 정사가 있었으니 청나라 상선이 좌초되어 표류하여 온 상인들이 이르렀는데 또한 이들 모두가 공의 덕에 감탄하여 칭송하였고 공의 맑은 지조에 감복하였다. 1년 사이에 백성을 다스려 교화함이 크게 행해지니 어사御史 가 이를 기리고 조정의 대신들이 공의 재주와 지혜를 보아 천거하여 쓰기를 청하니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짐이 어사의 논계論啓를 보니 이러한 줄 알았노라.”라고 하였다. 이 해 가을에 제주목사에서 물러나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기울 지경이었는데 뱃사람들은 두려워 떠는데 공은 마음 편히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집안에 있는 듯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여정혜呂正惠가 돛대가 부러졌는데도 글을 읽은 것에 견주었다. 기사년(1749년) 좌상左相 조현명趙顯命이 경연에서 오광운吳光運과 홍경보洪景輔에게 사후에 마땅히 그 가운데 표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발탁하여 쓰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묻기를 “누구냐?”라고 하니 상신相臣들이 답하기를 “주상께서는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예전의 판서 홍만조의 아들이구나.”라고 하였다.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 또한 그 사람은 매우 충실忠實하다고 칭찬하였다. 가을에 주상이 친히 곧 공을 발탁하여 한성부의 종2품인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 내모來暮의 노랫소리 : 백성들이 어진 정치에 감복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동한東漢의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여,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는 것과 야간 통행금지 등의 옛 법규를 고쳐 백성을 편케 하고자하자 백성들이 “우리 염숙도여 왜 이리 늦게 오셨는가. 불을 금하지 않으시어 백성 편하게 되었나니, 평생토록 저고리 하나 없다가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이라네(廉叔度 來何暮 不禁火 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31 「염범열전廉范列傳」.
自是上深知公忠藎可仗不次超遷 五年中至正卿 甲戌特拜工曹判書 引見璿源殿役所宣醞 以公兩世陪兩朝入耆社 聖敎眷眷 別賜二酌以侈之 公不勝感泣陳書小朝以申謝意兼辭敦匠錫馬之典 冬差七陵碑役都監堂上役訖 陞正憲階 丙子以慈聖七旬 推恩加崇政階 仍命圖像作帖 藏于靈壽閣西樓 亦異數也
이로부터 주상께서는 공의 충성심을 알아 의지할 만 하였기에 관등을 뛰어넘어 공을 발탁하였다. 5년 안에 판서와 한성부의 장관인 판윤에 해당하는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갑술년(1754년)에 특별히 공조판서를 제수하였고 선원전璿源殿을 개수하는 자리에서 직접 공을 만나 음식을 내렸다. 이로써 공의 아버지와 공은 숙종과 영조를 모시는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상이 잘 보살피라는 교서를 내리고 특별히 술 두 잔을 가득 채워 내리니 공은 이를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소조小朝, 영조를 말함에게 글을 올려 “신은 고마움을 표하며 아울러 장인匠人들이 공들여 만든 물품을 임금이 내려주는 은전은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7능의 비석을 개수하는 일에 차출되어 도감당상都監堂上을 맡아 일을 마친 뒤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병자년(1756년)에 인원왕후의 칠순에 주상의 은전이 베풀어져 종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높여졌으며, 이어 공의 초상을 그려 그림첩을 만들고 이를 영수각靈壽閣 서루西樓에 보관케 하였으니 또한 남들이 누리지 못한 운세였다.
戊寅冬引見 上讀大學第一章使陳文義曰 此亦乞言之意也 公釋明明德三字曰 本明之德又明之從 古聖賢皆從這裏用工 上嘉納 庚申春 承命入對陳懇 有許休之命 翌日上謂筵臣曰 洪某可貴 其處義有終始矣 時公精力尙强 上眷日隆而卽日乞骸 不復低佪 可見公執手之嚴不以衰老而或改 辛巳以年滿八十 階崇祿 七月十九日考終于正寢 訃聞停朝市二日 賜弔祭庀葬如例 初葬龍仁地 移定于溫陽自隱橋貞翼公墓東甲坐之原後 贈諡良孝公 公天資厚重識量弘深 群居寡言 笑喜怒不形 氣像磊落 雖當憂慼拂亂之境 泰然若無事 立朝遇事毅然 守正不以利害爲趍捨 性好廉儉 累典州郡 家無甔石 或至屢空而處之宴如孝友篤
무인년(1758년) 겨울에 주상의 부름에 가니 주상이 『대학』 제1장을 읽고서 그 뜻을 공에게 말하라고 하면서 “이 또한 좋은 의견을 들으라는 뜻이다.”라고 하니 공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이란 세 글자를 풀기를 “본명지덕本明之德이 있는데 또 이를 밝히어 따르는데 옛날의 성현들이 모두 이를 자세히 살펴 따랐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경신년(1740년) 봄에 주상의 명을 받들어 입대하여 공의 간절함을 장계로 올리니 주상께서 이를 허락한다는 명을 내렸다. 다음 날 주상께서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홍모는 소중한 사람이다 의義를 행함에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여전히 근력과 기운이 굳세어서 주상께서 공을 보살핌이 날로 극진하고 바로 그날 공이 사직을 하려하니 되돌릴 수 없었다. 공의 고집이 엄정하여 몸이 약하고 늙어도 바꿀 수 없었다. 신사년(1761년) 공의 나이 만 80세에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에 올랐다. 이 해 7월 19일 공은 거처하는 방에서 돌아가시니 부음을 듣고 조정의 조회가 2일이나 멈추었다. 이에 나라에서 공을 기리는 제사를 받들고 장례에 소모되는 물자를 예에 따라 내렸다. 처음에는 용인 땅에 장사지냈으나 나중에 온양의 정익공 묘의 동쪽 동북동 방향을 등지고 앉은 좌향인 갑좌甲坐 언덕 뒤에 이장을 하였다,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였으며 견식이 매우 깊고 넓었다. 무리들과 있을 때는 말수가 적었고 웃고 즐거움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기상이 우뚝하여 비록 근심과 슬픔에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도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였다. 조정의 일은 굳센 의지로 처리하였고 바름을 지켜 이해관계를 따져서 나서거나 물러나지를 않았다. 성품은 청렴함과 검소함을 좋아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면서도 집안엔 한 두 섬의 곡식도 없었다. 혹 집에 자주 쌀독이 비더라도 이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극히 돈독하게 하는 편안한 것으로 여겼다.
至事貞翼公怡愉侍側 父子間許爲知己 甚愛諸兄 有春津之風 寡妹嘗遘癘 公操湯藥不去 竟不幸則哀號治喪旣殯而出人以爲難 世之知公者 或高其行誼 或推其文學 或多其政事 若其忠義之性 堅確之操可以臨大節而不可奪者 則當求之古人世未必盡知之 文學汪洋 有氣力一時以文名者 皆自以爲不及 晩喜廬陵 紆餘婉曲 硏精易學 所著有玩樂編三卷窺斑錄一卷經史證易二卷左易叅證二卷 皆發揮微奧 讀之可以見公之學有本源 又有史評二卷詩文若干卷藏于家
정익공을 지극한 정성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해드렸다. 부자간에 서로 벗을 삼는 것을 허락하고 형들을 매우 아끼어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좋았다. 과부가 된 작은 누님이 일찍이 역병에 거려 공이 약을 다려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죽어 상을 치르고 염을 한 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세상에 공을 아는 이들 중에 어떤 사람은 공의 바른 행동을 높이고, 어떤 사람은 공의 문장과 학문을 추켜올리고, 어떤 사람은 공의 나랏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도량이 넓다고 하였다. 충의忠義의 성정을 말할 것 같으면 확고부동한 지조는 큰일을 당해도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니 옛사람에게서나 구할수 있을지 세상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를 것이다. 글과 학문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어 한 번에 힘을 써서 문명文名을 날렸으니 모두 공에 미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여릉廬陵을 좋아하여 문장의 내용이 넉넉하면서도 완곡하였다. 『주역』을 정밀히 연구하여 펴낸 글이 『완락편玩樂編』 3권·『규반록窺斑錄』 1권·『경사증역經史證易』 2권·『좌역참증左易叅證』 2권이 있는데 모두 『주역』의 오묘한 이치를 드러내어 읽어보면 공의 학문의 근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평史評』 2권이 있으며 시문을 모은 약간의 책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좋았다 : 춘진春津을 이른다. 또는 춘진椿津으로도 쓴다. 남북조 시대 후위後魏의 양춘楊椿과 양진楊津 형제를 이르는 말인데, 두 형제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양진이 자사刺史로 있을 때 사시사철 좋은 음식이 있으면 매번 서울에 있는 형인 양춘에게 사람을 통해 음식을 보냈으며 만약 보내지 못했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북사北史』 卷41 「양파열전楊播列傳」.
* 여릉廬陵 : 여릉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한유韓愈에게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매요신梅堯臣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이 났다. 저서에 『집고록集古錄』이 있다.
配東萊鄭氏學生琱之女右議政彦信之後也 婦德甚偹 事舅姑以孝 相君子以淸儉 先公十九年 卒於癸亥四月初六日 追封貞敬夫人 初葬溫陽梧村 後移祔公墓左 男純輔生員魯城縣監 女適士人睦聖履 孫男克浩生員文科叅議生一女幼 梯漢早卒 取再從兄授漢之子羲一爲後 旭浩蔭戶曹參判生三子一女幼 孫女適李趾漢生一子基崧文科翰林 睦聖履子祖興女姜允謙 縣監君以重一於羣第中事公最久 稔知事行屬以誌幽之文 不敢辭謹叙而系以銘曰
부인은 동래 정씨 학생學生 조琱의 따님이며 우의정을 지낸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효로서 섬기고 공을 맑고도 검소함으로 도왔다. 공보다 19년 먼저 계해년(1743년) 4월 초엿새에 가셨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봉되어 처음엔 온양의 오촌梧村에 장사지냈으나 뒤에 공의 묘 왼쪽에 옮겨 합장하였다. 아들 순보純輔는 생원生員으로 노성현감魯城縣監, 충남 논산 지역을 지냈고, 따님은 사인士人 목성리睦聖履에게 시집을 갔고, 손자 극호克浩는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따님이 있으나 어렸다. 제한梯漢은 어려서 죽어 재종형 수한授漢의 아들 희일羲一을 입양하여 후사를 이었다. 욱호旭浩는 음직蔭職으로 호조참판이 되고 3남 1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손녀는 이지한李趾漢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기숭基崧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목성리睦聖履의 아들 조흥祖興의 딸은 강윤겸姜允謙에게 시집을 갔다. 현감군縣監君, 홍순보이 중일重一을 여럿 중에 공을 제일 오래 모셨다고 하였다. 지사 임기 1년에 떠나갈 즈음에 묘지명을 써달라고 하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지어 공의 뜻과 업적을 묘지명에 남긴다.
* 정언신鄭彦信, 1527~1591 :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이다. 우의정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 때 갑산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이 되었다.
猗昔貞翼 邦之楨 公濟厥美振顯聲 學博材鉅器又宏 而阨于時淹晉程 全我素履歸于耕 亢志陶陶遠利名 實德彰外輿望傾 相君曰都世忠貞 躋之上卿我后明 臣老請骸述先章 王曰 媺哉 予其成有爛雲章垂百齡 諡在太常 像耆英 維古賢儁困乃亨 有如不信考斯銘
三從弟嘉善大夫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事 重一撰
아, 옛날 정익공貞翼公이 나라의 기둥이었던 것처럼! 양효공은 명성을 아름답게 널리 드러내어 세상에 떨치었고 널리 배운 큰 인재로 도량이 넓었네. 당시에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도 진정晉程에 머물렀네. 평소에도 자신을 온전히 하여 전원으로 돌아갔네. 높은 뜻 도도하여 이해와 명성을 멀리하고 참으로 덕성을 밖으로 드러내어 백성이 우러렀네. 임금을 도와 말하기를 “한낱 마음을 다하고 곧아야 한다.”라고 하였네. 상경上卿의 자리에 오르니 나의 후손들이 밝게 되나 늙은 신하가 먼저 사직을 청하는 간략한 상소를 올리니 주상이 이르시길 “공의 뜻이 아름답구나! 짐이 찬란한 빛을 받은 구름을 드리워 백세까지 살게 하리라.” 하였네. 봉상시奉常寺를 통해 시호를 내리고 기로소의 영수각에 공의 초상을 그려 기렸네. 옛날의 어질고 빼어난 이들은 처음엔 곤궁하다가도 운수가 펴졌으니 이 묘지명을 살펴보면 곤궁했던 어질고 빼어난 이들의 운수가 펴지는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종제 가선대부한성부우윤겸동지의금부사 중일 짓다.
* 진정晉程 : 백성을 어질게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진晉나라 정정程鄭이 죽으니, 정나라 명재상인 자산子産은 비로소 연명然明을 알아보고서 그에게 정사를 묻자, 연명이 대답하기를 “백성을 자식처럼 보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거든 목을 베어 죽이기를 새매가 참새를 채듯이 하라(視民如子 見不仁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고 하니, 이에 자산은 기뻐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양공魯·襄公 25년. 기원전 548년.
* 중일重一 : 홍중일洪重一, 1700~?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수이壽爾. 홍영洪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홍주국洪柱國이고, 아버지는 홍만적洪萬迪이며, 어머니는 이경억李慶億의 딸이다. 좌윤,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