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진 답사기 2 ■
- Tour란의 김현진(ZIPI@hitel.net)님의 글입니다.-
1~2㎞의 은은한 살빛 모래밭과 오염되지 않은 푸르른 겨울바다 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곡선의 철로가 절경을 이루는 강원도 동해바닷가, 정동진.서울에서 정동쪽에 위치했다해서 마을 이름이 정동진인 그곳은 우리나라 전국 철도역 중
바다와 제일 가까이 인접해 있는 그림같은 풍경의 정동진역, 그 자체가 여행지다.
알다시피 [모래시계]를 촬영한 장소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고, 특히 고현정이 촬영을 했다해서 [고현정 소나무]라고도 불리워지는 역사 앞 키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제법 감칠난 구경거리다.
에누리없이 쭈욱 뻗은 모랫사장 위엔 아직 바닷비린내 물씬한 조개껍데기들이 긴 그물을 펼쳐놓은 듯 하얗게 즐비하고, 그곳에서 기념으로 주머니 한가득 조개껍데기를 주워보는 것도 추억에 남을만한 일이다.
1
사실 아무런 계획없이 그저 여행을 떠나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갈만한 여행지를 찾아 우연히 들러보았던 이곳 tour란. 다른 여행지보다 꽤나 대중의 관심집중을 많이 받고 있는 [정동진]이란 여행지는 사실 tour란에 오기 전까지는 그런 곳이 있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저녘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는 그 겨울의 어둔 창문을 등뒤로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혼자 집을 나온 순간조차 나는 [정동진]이란 목적지로 가기위해 도대체 어떤 차편을 이용해야할지 몰라 그저 발길닿는 대로 청량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청량리에서 떠나는 마지막 열차인 밤 11시 강릉행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2
하염없이 하염없이 어둔 밤의 정막을 뚫고 질주하는 일률적인 열차바퀴소리가 경쾌하다.
승객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쥐죽은 듯이 고요한 차내는 오로지 고루한 숨소리만이 띄엄띄엄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졸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차창에 기대에 잠이 들었었으나, 잠든지 40분만에 이내 깨어버리고 말았다. 멍한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바라보며, 다만 새까만 어둠에 반사된 내 모습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그렇게 넋빼고 긴 시간을 달래고 있던 중 마침 지나가던 승무원 아저씨가 날 보고 한마디 건넨다.
"아니, 이 아가씨는 왜 자지도 않고 깨어있나? 안졸려워요? 아가씨?"
"안졸렵군요... 그래도 잠자긴 했어요. 목이 뻐근해서 곧 깨고 말았지만"
"허허, 그래도 잠은 좀 자놔야지. 그런데... 혼자 왔어요? 어디 여행이라도 가나보죠?"
"정동진에 바람쐬러 가려구요. 그런데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가만 있자~ 정동진이면... 묵호에서 내리셔서 비둘기호로 다시 갈아타고 가시면 되겠군요.
그런데 아가씨 혼자서 웬 정동진이죠? 애인과 헤어지기라도 했나요? 바람쐬러 그 먼곳까지 가게? "
하긴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야간 열차타고 혼자 좌석에 앉아 멀건히 창문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라면 당연히 그런 오해를 살만도 하겠지. (하지만 내가 운것은 절대 슬퍼서가 아니라 졸려서 하품하느라 나온 눈물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몇마디 주고받기 시작한게 계기가 되어 승무원 아저씨와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한참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새마을호서부터 무궁화호, 통일호 모두 타고 다니죠. 그런데 이 통일호야말로 형편없는 시장바닥이에요. 갖은 부류의 사람들이 타는 열차라 그럴만도 하겠지만 우리나라 국민의식수준이 여전히 멀었다는걸 절감할 수 있어요. 이 철이면 엠티다 뭐다 해서 70%이상이 젊은 층들이 통일호를 타는데, 도착해보면 열차 한칸에서 쓰레기가 100㎖ 쓰레기봉투로 4개가 다 차나와요. 이건 완전히 난지도 저리가라 식이죠. 그래도 배운층이라는 젊은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기본도덕이 없는지, 원 "슬며시 모자를 벗으며 눌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길게 한숨을 짓더니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러준다.
" 그래도 새마을호보단 통일호가 재미있긴 해요. 새마을호를 타면 마치 감금당해 있다는 기분이 들죠. 근엄히 자리에 앉아 도착지까지 딱 입다물고 가면 그만이에요. 마치 인간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직된 분위기죠. 통일호는 정말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나볼 수 있다는게 열차를 타는 재미에요.
지루하지 않냐는 아가씨 질문...
아까도 보셨죠? 양평이 집이라는 그 할아버지. 뭐, 그런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이 일의 재미를 느끼는 거지요, 후후 "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의 대화에 귀기울이던 내 옆으로 또다시 누군가가 지나쳐가다가 슬며시 자리에 앉았는데 유니폼에 달린 명찰에 [차창 박선영]이라고 씌여져 있다. 검은 구릿빛 피부 위로 깊게 패인 주름살들. 다소 비쩍 마른 듯한 인상의 그 아저씨 역시 이 긴 밤의 여로가 무척이나 지루하다는 표정이다.
" 아니 이 양반이 근무는 안하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군, 그려. 가만있자, 아가씨 지금 혼자 여행중이에요? 강릉행 열차 많이 타봤어요? "
듣기에 조금 낯설은 영동지방 사투리.
" 아뇨, 처음이에요 "
" 그럼 열차가 어떻게 달려나가는 중인지 잘 모르겠네요?
음... 그렇잖아도 10분 뒤에 열차가 스위치 빽 할껀데, 어때요? 함께 구경하겠어요? "
" 스위치 빽? 그게 뭐하는 건데요? "
" 가보면 알아요. 이거 아무나한테 안보여주는 건데 내 오늘은 아가씨한테만 특별히 구
경시켜주도록 하죠. 곧 시작될테니 함께 운전칸까지 가보도록 해요 "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못알아 들었지만
그래도 차장아저씨의 특별초청이라 일순간에 기분이 들떠왔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옷자락을 잡아끄는 차장 아저씨. 역시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무원 아저씨와 함께 종종종 화물칸으로~
처음 가보는 이 화물칸엔 음료수 박스고, 과자 박스고 잔뜩 쌓여져있다. 바로 여기서 차내에서 판매되는 각종 군것질 거리가 보충되어지는 것이다.
화물칸을 지나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열차의 전기부 핵심이라 일컬을 수 있는 기계실.
엔진소리가 심히 요란한 그곳에선 열차 안의 난방, 냉방, 전등, 방송 등 전기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관리, 조정하는 곳이다.
마치 아파트 보일러실을 연상시키게 하는 이 기계실 안은 몹시 어두컴컴했고 후덥지근했다.
이제 마지막 문을 열고 드디어 열차의 맨 끝칸까지 다다른 우리.
2평 남짓한 그 공간안에는 양쪽의 출입문과 전면의 또다른 출입문만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빈공간이다.
차장 아저씨가 전면의 출입문을 활짝 열자, 일순간에 차디찬 밤바람이 불어오면서 방금
지나온 철로가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바로 코앞에서 가까이 구경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열차가 속력을 줄이기 시작하더니 그 자리에서 정지.
그리고 드디어 그 [스위치 빽]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 상태 양호. 계속 진행 "
전면의 운전실과 연결되어 있는 무선 마이크를 통해 직접 철로상태를 확인해가면서 메세
지를 전달해주고 있는 차장아저씨가 수시로 상황보고를 하고 있다.
열차가 진행방향 반대로 달려가는 것, 다시 말해 꺼꾸로 열차가 달려가는 방식이 바로 이
[스위치 빽]이다.
철도 전문용어로는 [추진운전]이라 불리우는 이 운행방식은 강릉으로 향하는 도중 무려 3
번이나 경험할 수 있다.
" 운전실에서 철로상황을 볼 수 없으니, 여기서 대신 마이크로 알려주는 거에요.
철로 상태가 양호한지, 신호등 따위에 걸리지나 않는지.
혹은...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 예가 없는데 여름이면 철로가 시원하다고 간혹 철로에 누
워자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있나 미리 확인하는 거죠.
그 외에 통행로에서 철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나도 살펴보고...
야간열차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워낙 새벽이라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상
이거든요. "
이렇게 설명해주면서 여전히 마이크에 대고 운전실과 연락을 교환하고 있는 차장 아저씨의 두 눈동자가 잠시라도 철로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차장 아저씨의 시야를 가릴까봐 있는대로 허리를 굽혀 문밖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비록 5분간의 그 짧은 [스위치 빽]동안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나머지 연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실 그 마이크로 주고받는 내용까지 다 적어보고 싶지만 보아하니 전문용어 같아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이윽고 25㎞로 서행하던 [스위치 빽]이 끝나고 열차정지, 그리고 다시 제 진행방향으로 떠
나기 시작했다.
" 어때요? 재미있었어요? "
" 와아~ 와아~ 와아~~~~ "
" 그만 입 다물고 이만 자리로 돌아가죠 "
" 와아~ 와아~ 와아~~~~ "
아직 들떠있는 기분이 채 가시지 않은 나는
자리에서 돌아왔을 때까지 연실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시간이 새벽 5시 즈음.
벌써 열차를 탄지 6시간이나 지난 후였지만 의외로 나는 지루함을 전혀 모르고 여행한 셈이었다.
여전히 모두가 쥐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열차안에서 잠시 담배를 태우기 위해 통로를 지나
며 보니 잠들어있는 사람들 포즈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그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잠시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고 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이제 1시간만 남은 열차여행에서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는 모습을 창
밖으로 구경하며 그렇게 한참 넋빼고 있자니 어느덧 묵호역.
마침 정동진이 집이라는 한 총각이 같은 열차칸에 타있었기에 그의 안내로 제법 수월히
차편을 알아낼 수 있었다.
후아...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신선한 아침 공기가 일순간에 머리를 맑게 쐬여준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앞에 그 긴밤을 내내 함께 대화해주던 승무
원과 차장 아저씨가 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래요. 잘가요, 아가씨~ "
"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금방 왔군요. 언젠가 인연이 닿아서 다시 만나뵐 수 있길 바랄께요. 고마웠어요... "
조금은 아쉽지만 나 역시 가볍게 미소지으며 차장 아저씨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열차는 출발하기 시작했고, 떠나는 열차를 등뒤로 개찰구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이 훤히 밝은 뒤였다.
그곳에서 다시 정동진행 비둘기호 열차표를 끊은 다음 약 20분을 대기실에서 기다린 후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 그리고 단정히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함께 2칸짜리 비둘기호에 올랐다.
날씨는 그리 맑지는 않았으나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워낙이 바닷 구경을 못하고 지내왔는지라 창문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듯 달짝 붙어서 정신없이 바닷가를 구경하고 있자니 약 20분 후 열차가 멈춰선다.
4
" 이곳에서 내리시면 돼요 "
어젯밤부터 쭈욱 같은 열차를 타고 왔던 정동진이 집이라는 그 총각.
그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혹시 내가 헤맬까봐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아까부
터 내 주위에서 은근히 요목조목 챙겨주고 있었다.
" 아, 고마워요. 정말 덕분에 편하게 왔군요. 그런데... 그쪽은 안내리세요? 정동진이 집이라면서요? "
" 예에... 일이 있어서 잠시 강릉에 들렀다가 가려구요. 함께 여기서 내렸으면 내가 보다
자세히 구경을 시켜드릴 수도 있겠는데 나도 참 아쉽네요 "
총각이 머리에 쓴 하얀색 스포츠 모자를 벗으며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인다.아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열차가 떠나버릴새라 간단히 목례로 그와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아침공기가 일순간에 옷깃을 싸아하게 파고든다.
풀려져 있는 신발끈을 다시 매며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일순간 푸르른 수평선과 백색의 모래사장이 내 시야를 꽉 메운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그대로 그렇게 난 정동진에 도착해 있었다.
5
" 저기요... 저기 아저씨... "
그러나 그렇게 한없이 넋놓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열차에서 내리긴 했으나 도대체 어디로 구경을 가야할지 모르던 나는 일단 내 옆에 서서 깃발을 들고 있던 그곳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 제가 소문만 듣고 이곳에 처음 구경을 왔는데요. 대체 지금부터 어디를 다녀야할지 전혀 모르겠군요 "
그러자 그 아저씨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만 이내 씨익 웃으면서 친절히 답변해 주었다.
" 이곳 자체가 관광지에요. 바로 아가씨가 발디디고 선 곳을 말하는 게지요. 그런데 아가
씨 혼자 이 아침부터 웬 구경입니까? 새벽차 타고 왔나 보죠? "
" 네... 어젯밤 청량리에서 11시 열차를 타고 왔어요. 아침이라 혹여 해돋이라도 볼 수 있
을까 했는데 이미 날이 훤히 밝아버렸군요 "돋움">" 아가씨가 날을 잘못 택해서 오셨네요. 오늘 날씨가 별로 안좋아 이곳 정동진이 그다지
기억에 남지는 않겠어요. 하여간 왔으니 한번 둘러보세요. 뭐, 딱히 볼만한 것 없을 겁니
다. 그냥 모랫사장과 바다만 있을 뿐이지요. 아, 그건 그렇고 기념사진 찍어줄 사람은 있어
요? "
역내 아저씨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엔 오로지 그 아저씨와 나
이외에는 개미 한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기사 그 이른 아침부터 바람 몹시 거센 바닷
가에 누가 구경을 오랴. 그래서 곧 아저씨 질문에 담긴 배려를 알아채고 나는 가방안에서
서둘러 사진기를 꺼냈다.
" 정말 그렇네요.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가기란 너무 억울하겠죠? 그럼 좀 부탁드릴께요.
여기~ 사진기~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충 눈에 보이는 한그루의 소나무로 다가가 포즈를 취한 나.
가만 보아하니 아저씨가 멀찌감히 사진기로 구도를 잡는 모습이 한두번 사진찍은 솜씨가
아니다.
난 그저 소나무 배경으로 한장, 바닷배경으로 한장만 찍고 관두려는데 이 아저씨 마치 사
진작가를 연상시키듯 여기서봐라, 저기서봐라 하며 연실 셔터를 눌러대었다. 덕분에 아쉬울
것 없이 사진은 많이 찍을 수 있었지.
" 자, 이만하면 됐겠지요? 그럼 천천히 둘러보시길 바래요. 난 이만 안으로 근무하러 들
어가야겠습니다 "
사진기를 건네주며 역내 아저씨가 살짝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6
" 저기, 잠깐만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혹시 그 유명한 [고현정 소나무]란게 어느
나무죠? "
아까부터 진작이 묻고 싶었던 [고현정 소나무].
모래시계 촬영때 고현정이 그 소나무 아래서 촬영했다고 해서 나무 이름이 [고현정]이 되
버린 소나무.
하지만 철로를 따라 워낙이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에 도대체 어느 소나무를 말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 고현정 소나무요? 조오오오거~~~ "
아저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가락으로 가르킨 그 소나무를 본 순간, 나는 그만 그자리
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 푸하하하하하하!!!!!!!!!!!!!! "
" 아니? 왜 웃어요? "
역내 아저씨가 어리둥절하며 내게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어찌 안웃을 수 있겠는가.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런지 제 딴엔 '고현정'의 이미지와 비슷한 크고 풍만한, 그리고 멋드
러진 소나무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 비춰진 그 소나무는 그야말로 안스러울 정도로
초췌한 몰골에 나무기둥이 비쩍 휘어진 아주 작은 소나무였기 때문이다.
" (여전히 얼굴에 미소가 남아있는 채) 아니에요. 그윱?채) 아니에요. 그저 너무 의외라서. 이야~ 이 나무라
면 내가 아까 맨처음에 사진찍었던 나무인데,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사진찍는데만 정
신팔려 있었네요, 후후 "
" 하긴 모두 와서 저 소나무를 보고 실망했다고 한마디씩 하더라구요. 소문이 나무를 베
려놓았지, 허허 "
아저씨의 구수한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에 휘날린다. 이윽고 뒤뭬?아저씨가 철길을 건너
동화같이 조그맣고 예쁜 역 건물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나도 큰 심호흡을 하고는 가벼
운 발걸음으로 바닷가 모래사장과 이어진 조그만 돌계단을 총총총 밟고 내려갔다.
7
먼 산에 하얀 눈들이 풍경화처럼 아직 남아있는 그 곳 정동진.
그 때문인지 절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랫사장이 단단히 얼어붙어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게 더 재미있다.
신발 밑바닥의 무늬가 그대로 빼박혀진 발자국들은 방금 내가 걸어온 그 자리에도 내 작
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우선은 눈에 보이는 대로 오른편의 가까운 바위섬들을 향했지.
역전에서 약 100미터 가량 떨어져있는 그 바위섬들 가까이 아침 사냥을 하는 갈매기들이
떼지어 비상하고 있다.
갈매기........
해안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새들이야말로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상 풍경중의 하나겠
지만 내겐 더없이 신기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더라.
잿빛의 바위들을 조심스레 밟으며 이윽고 (그나마) 가장 높은 곳까지 다다른 나는 발밑으로 파도치는 바닷물의 비릿한 냄새를 한껏 음미하고 있다.
천천히 바다를 향해 한바퀴 둘러보았지.
잔뜩 흐려져있는 하늘 사이로 태양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바람에 넘실거리는 파도
들, 그 거대한 물의 일렁임이 제법 조화롭게 하늘과 맞닿아있다.
바다를 정면으로 왼쪽의 내 등뒤로 방금 내가 서있었던 정동진 역의 세모꼴 지붕은
마치 고향 옛집같은 정겨움을 불러일으켰고, 역시 등뒤 오른쪽으로는 저만치 겨울산을 돌
아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화물열차의 긴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아득히 바다위에 떠있는 한척의 고기잡이 배.
그리고 여전히 끼우끼우 대면서 창공을 맴돌고 있는 갈매기떼들, 아... 이래서 사람들은 겨
울바다를 보러오는겐가.
그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모든 광경들은 그야말로 한폭의 풍경화였다.
소설책이나 영화에서만 나올법한 꿈같은 풍경.
그 더없이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풍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이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한적한 바닷가에 그렇게 나혼자만이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다.
8
이제 바위섬에서 내려와 좀더 높이 보이는 저멀리의 또다른 바위섬, 멀찌감치 보니 그곳
엔 방파제가 놓여져 있다.
제법 한참을 걸어가야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어렵사리 찾아온 곳인데 포
기할 수 있나.
무거운 가방을 짊어매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가는 도중 발밑으로 아삭아삭 조개껍데기
가 밟힌다.
조개껍데기의 잔치라도 벌어졌을까. 아까부터 모랫사장을 따라 마치 하얀 실오라기 길이
라도 만든 것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조개껍데기들이 눈부시다.
당연히 허리숙여 요것조것 줍기 시작한 것이 정동진 역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
어왔을땐 이미 주머니에 한가득 두둑했다.
한참을 걸어도 생각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그 바위섬.
문득 시계를 보니 그렇게 걸어온지도 이미 30분 째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오가지 않는 아침시간이라, 나 역시 아무것도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지라
그저 단정히 빗어놓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놓는 세찬 바람을 기분좋게 미소지으며 여전히 터
벅터벅 걸어갔을 뿐이다.
9
출입금지 구역이 철조망으로 구분되어 있는 그 바위섬으로 가기 위해 (솔직히 이 '섬'이
란 표현이 좀 그렇다. 말하자면 바위'들'이었고, 방파제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모래사장을
벗어나 좁은 콘크리트 차도로 올라섰다.
그러니까 정동진 모랫사장의 맨 끝부분.
그곳엔 초췌하지만 제법 식당과 민박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흉가집을 연상시키는 듯한 쓰러져가는 민박집을 마지막으로 이윽고 작은 바위산이
저 편의 길을 보이지 않게 가로막고 있었다.
특이하게 생겨 웬지 사진찍고 싶은 이 바위산은 가운데가 움푹 패여져 그 안으로 여러 사
람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눈엔 왜그리 불안해 보였는지.
나도 그들처럼 한번쯤 그 아래 섰다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어둡고 음습한 절벽이 금방이
라도 무너져 내릴 듯 무서웠던게다.
느긋한 발걸음을 유독 이 바위산 앞에서만 빨리 지나치며 코너를 돌아 콘크리트 길 맨끝
까지 왔을 때 드디어 내 목적지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10
그러나 입구에 써져있는 안내표지판이 그곳에 발을 옮기기 전에 벌써부터 나를 실망시켰
다.
---이 구역은 x월 x일부터 환경보호에 들어감으로 일체의 고기잡이를 금지해주시길 바
랍니다--- (실은 정확히 이렇게 써져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
그 때문이었는지 벌써 입구에서부터 버려져(?)있는 노젓는 고기잡이배들.
마치 긴 잠에 빠져있는 듯한 그 배들은 아직 비릿한 생선내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쳐 방파제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때 콘크리트 길은 그만 거기에서 끝났다.
바위에 오르고 싶었으나 워낙 험하고 가파라 적당한 곳까지만 발을 디디고 선 내 등뒤로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온다.
슬며시 뒤돌아 보니 그곳엔 방금 내가 본 고기잡이 배들이 모래사장 위에 일렬로 대어져
있었다.
한봉우리의 작은 산, 그 밑에 비린내 풍기며 알록달록히 대기시켜 놓은 배들이 은근히 을
씨년스럽다.
그 사이에서 보일듯 말듯 모자를 넘실거리며 터억터억 망치질을 해대고 있는 한 아저씨가 보였다.
아마도 배를 정비하는게 아닐까.
호기심에 한참을 그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 아저씨 역시 고개들
어 이쪽를 쳐다보았지만 곧 별 관심없다는 듯 다시 망치질을 계속 해대었다.
솔직히 별스럽게 바라볼 일도 아니었지만 막연히...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말하자면 그 정동진 바닷가를 둘러보면서 내내 사람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내게
있어 이 아저씨의 등장은 그야말로 반가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방파제 아래 꽤 깊어보이는 웅덩이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그와 나의 공간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이방인임을 또렷이 인식시켜주기라도 하는 듯.
그래서였을까.
그 순간 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어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바다를 마주하고 서있는 작은 겨울산, 그리고 그 산의 바로 아래에 열을 맞춰 잠자고 있
는 낡은 고기잡이 배들.
마지막으로 구겨진 카키색 모자를 눌러쓴 까칠한 피부의 그 아저씨 망치질 하는 모습.
이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1회용 사진기를 슬쩍 주머니안에 챙혀놓은 후 나는 발걸음을
되돌려 방금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11
다시 모래사장을 밟으며 역까지 되돌아가려 했으나 그러기엔 난 너무 지쳐있었다.
간밤에 한숨도 못잔것도 있거니와 무려 1시간 남짓 걸어대던 발걸음이 아침의 시장기와
더불어 점점 기력이 다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즈음이면 이제 아침식사를 할만도 하다.
막연한 기억으로 이곳 tour란에서 [순두부집]이 제법 감칠난다고 하기에 일단은 마을 입
구로 들어가 열심히 식당 간판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바닷가 마을이라 보이는건 횟집, 매운탕집일뿐.
마음이야 아무데나 들어가서 허기를 때우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지까지 왔는데...하는 생각에 그렇게 한참을 마을 입구에서 헤매고 있었다.
때마침 골목을 지나가는 머리희끗한 할아버지.
그의 곁에는 아직 중견인 하얀 진돗개 한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가고 있었다.
" 실례합니다만 말좀 묻겠는데요. 혹시 이 마을에 순두부집이 어딘가요? "
아무 생각없이 스쳐지나가고 있던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며 날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깜짝 놀란 듯 하다.
" 순두부집?? 글쎄에...여긴 순두부집은 없는데... 밥먹으려구 그러슈? 그럼 저어기 골목
길 따라가다가 보이는 국민학교 앞에 백반집이 하나 있다우. 게가(거기가) 우리 마을의 유일
한 백반집이지 "
곧 표정을 바꾸어 친절히 설명해주시는 할아버지 곁에는 방금 꼬리치며 따라다녔던 진돗
개가 예쁘게 쌍거풀 진 눈을 꿈뻑이며 갸우뚱 날 쳐다보고 있었다.
" 어머나~ 너무 예쁜 개군요. 진짜 진돗개인가요? 이리온~~~ 오요요요요요우~~~ "
" 허허... 순종이지요, 아무렴. 그런데 샥시 지금 여행중이유? 그래, 바닷바람은 잘 쐬었
수? "
" 네. 거의 다 둘러본 것 같아요. 이제 밥만 먹으면 정동진 구경은 다 끝난 것 같은데,
다음엔 어디로 가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정했어요 "
개구경(?) 하느라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내게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
하더니만 언덕넘어 옆바다가 그야말로 진풍이라고 살짝 귀뜸해준다.
" 경포대나 동해바다보단 훨씬 낫지. 거기두 여기와 다를 바는 없지만 워낙이 교통편이
애매해서... "
하지만 솔직히 그곳까지 모르는 길 물어 찾아가볼 용기는 생기지 않더라.
그저 할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일러준대로 백반집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
그때 시간이 오전 9시 30분 경이었는데, 워낙 작은 시골 구석이라 여전히 골목길은 사람
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이 고즈넉했다.
12
솔밭식당---- 칼국수, 백반일체.
마을 입구 도로변에 엉성한 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는 그곳 솔밭식당은 역시 시골식당답
게 후락지고 초췌했지만 들어가는 입구에 심어진 키 커다란 소나무 몇그루들이 식당집을 지
붕처럼 덮고 있었기에 약간은 운치있어 보인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식당안으로 들어가자 6평 남짓한 좁은 공간안에 놓여져 있는 4개의 테이블부터
한눈에 들어왔다.
" 식사돼요? "
내가 간략히 묻자 주방에서 생선을 굽고있던 주인 아줌마가 무뚝뚝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리니 생각보다 메뉴가 다양하지 못했다.
유일한 백반이 있었지만 그건 아침주문으로는 받지 않는댄다.
하는 수 없이 떡국을 시켜놓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수첩을 꺼내어 지금까지의 일정을 쭈
욱 정리하고 있었다.
식당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안채의 넓다란 방에서 TV소리가 꽤나 수선스럽다.
한참 기다리자니 드디어 김가루와 들깨가 수북히 뿌려진 따끈따끈한 떡국이 나왔다.
그걸 먹고있자니 어느정도 몸이 풀린다.
국물 한숟갈도 남김없이 모조리 비우고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며 아줌마에게 강릉행 차
편을 물었다.
" 매시간 정각마다 한대씩 있어요. 바로 조앞 약국 앞에서 버스가 서니까 거기서 타면
되기되는데... 어이구~ 빨리 가봐야겠네? 벌써 10시쟎아요? "
뒤돌아 시계를 보니 과연 10시가 조금 넘어서고 있다.
다급함에 허겁지겁 식당을 나와 약국을 향해 죽어라고 뛰기 시작했지.
그러나 늦었다.
이미 버스는 저만치 길모퉁이를 돌아 멀어지고 있었던 게다.
13
이제 다음 버스가 올때까지 1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사실 그곳 정류소에 대기실이라도 있었으면 난 그런 아침추위는 어느정도 참았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저 멀건히 서서 1시간을 내내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막막하기 그
지없었다.
딱히 대책이 떠오른 것도 없이 그냥 골목길을 다시 걸어나왔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몇발자국 걷지도 않았을때 정동진 열차역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 혹시나 열차가 있지 않을까 하고 시간을 확
인해보니 앗,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하루에 가뜩이나 3편 뿐이 없는 강릉행 비둘기호 열차가 바로 10시 40분에 그곳을 경유한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이 바로 지갑을 꺼내어 열차표를 사려고 하자, 안내판에 [3월 1일자
로 역내 매표를 중단합니다.
매표는 열차에 타신 후 차내에서 승무원에게 끊길 바랍니다]라고 적혀있다.
하는 수 없이 지갑을 도로 집어넣고 마침 뜨끈히 연탄이 피워진 대기실 안 난롯가로 다가
가 몸을 녹이고 있었다.
14
그때 누군가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권색 근무복에 철도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 근무원인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그 거무스름한 얼굴 가득히 깊게 패인 주름살이었다.
아마 60에서 70 춘추쯤 되셨을까.
손자가 있어도 몇십명이나 되보임즉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이빨 빠져 입바람 새어나오
는 목소리로 난롯가로 다가와 양손을 연통에 부벼대며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 밖이 제법 쌀쌀하지요? "
할아버지와 마주 서서 난롯불을 쬐며 내가 말했다.
" 그러게...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네. (날 찬찬히 훑어본 후) 어디 여행왔수? "
" 정동진 바닷가가 유명하다고 해서 새벽차타고 내려왔어요.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곳은 좀 특이하군요. 매표소에서 표하지 않는 곳은 처음봐요 "
슬쩍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할아버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얼마되지는 않았지. 예전에는 이곳에서 우편물 취급까지 다했는데 3월부로 그것마저
안한다우. 그래서 뭐 하나 붙이려면 강릉까지 올라가야해. 예전이 참 좋았는데 "
" 그것참 불편하시겠어요. 보아하니 열차도 하루에 고작 3대뿐인데 "
" 불편해도 어쩌겠수. 다 그러려니 해야지, 허허... "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공허하다.
어르신네라 뭐라고 대꾸하기도 뭐해 그저 묵묵히 난롯불을 쬐고 있으려는데 날 가만히 쳐
다보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한마디 하신다.
" 처녀 보니까 내 딸이 생각나네. 처녀는 시집갈때 멀리 있는 곳으로 가지 말우. 그저 고향 가까운게 제일이지 "
앞뒤없이 대짜고짜 시집얘기는 무슨...?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웬지 아련한 그리움을 읽어내릴 수 있다.
" 따님이 먼 곳으로 시집가셨나 보군요? "
눈치껏 조심스레 내가 묻자니 할아버지가 긴 한숨을 지으며 대답하셨다.
" 부산으로 가버렸지. 너무 멀리 있어서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가 있기 하지만 어디
쉽사리 걸게 되나. 가까이 있으면 매일 찾아갔을텐데... 허허 "
아스라히 딸의 모습을 그리는 할아버지의 눈동자가촉촉히 눈물로 젖어온다.
이것이 진정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었던가...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꽃무늬 팬티를 다 드러내며펌프물에 머리감던 작은 내 딸.
고기잡이 나갈적에 저도 한컷 거들겠다고 그 병아리 같은 손으로 그물을 매만지던 그 천
진난만한 내 딸이 이제 어른이 되어 연예를 하고 전혀 낯설은 한 남자를 데려와 이 남자와
결혼하겠노라고 울고불고 하더니만 이내 곧 면사포쓰고 먼 타지로 시집가버렸겠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그저 무뚝뚝히 제 딸을 바라보며 혼자 가슴안으로 소중함을 간직해오던 우리네 아버지.
이제 먼 곳으로 시집가 딸이 쓰던 향내나는 작은 골방에 먼지만이 수북히 쌓여가는데 그 빈자리의 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보고싶은 그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무어
라 보고픔을 전하고 무어라 그리움을 전할까...
멀리 타지에서 저 살아가는 것에 바빠 자주 찾아오지도 않는 딸에게 연탄난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마주 서있던 내 두눈에 나도 모르게 글썽여지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그렇게 묵묵히 불을 쬐고 있자니 어느덧 차장 밖으로 멀리 열차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15
" 자~ 강릉행 열찹니다. 어서 나오세요~ "
철로로 통하는 문을 열고 역장 아저씨가 한껏 높은 톤으로 소리를 지른다.
가방을 둘러매고 두리번 거리며 철로변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등뒤로 고현정 소나무가 웬지 아쉬워졌다.
겨우 반나절도 채 안된 시간동안 무엇이 그리 정들도록 만들었나.
새벽 열차에서 마악 첫발을 내딘 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그 소나무.실은 아쉬운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거센 바람에 출렁거리는 그 장엄한 바다와 아무도 오가지 않은 (오로지 내 발자국만이 그곳에 남은) 넓은 모랫사장.
그리고 저멀리 갈매기들 날아다니던 잿빛의 바윗가, 이 모든 것이 이제 2분 후에는 곧 열차를 타고 떠나가게 되는 내게 아련한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 왜 그럴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볼건 하나도 없는 바닷가였지만 저 소나무를 보고 있자니 떠나간다는게 아쉬워지네요... "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이지만 바로 옆의 역장 아저씨에게 탄식하듯 중얼거린 이 한마디에
아저씨는 함께 뒤돌아 고현정 소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 저 소나무요? 저게 모래시계 촬영때문에 꽤나 유명해지긴 했지요. 그래서 내가 관광객
을 위해 이름을 [고현정 소나무]라 지었는데, 특정인의 이름을 따고나 보니 영 어감이 안좋
아서 곧 이름을 바꿔줄거에요 "
" 이름을 바꿔준다고요? 뭐라고 바꿀 건데요?? "
내가 호기심에 되물은 순간, 열차는 이미 저 멀리 산모퉁이에서 긴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
고 있었다.
이윽고 뒤돌아 깃발을 흔들며 역장 아저씨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날 흘깃 쳐다
보며 대답했다.
" [모래시계 소나무]로요 "
16
한아름의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어매고 열차에 오르는 할머니를 뒤따라 나 역시 그렇게 강
릉행 비둘기호에 오르며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승객들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역장 아저씨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
" 잘가요~ 다음에 또 우리 정동진 역을 방문해 주시기 바래요~~ "
저만치 손을 흔드는 역장 아저씨의 얼굴 가득한 웃음이 구수하다.
입구쪽에 마련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자니 이윽고 열차가 발차하기 시작했다.
다소 어수선한 열차안 저쪽에서 듬직히 제복을 입은 승무원 아저씨가 어슬렁거리며 이쪽
으로 걸어온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양심껏 알아서 주머니에서 잔돈을 챙겨 건네주는
내 옆자리 할머니를 뒤따라 나 역시 동전 4개를 준비해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은행입금표같은 얇은 종이위에 '정동진→강릉'이라 기입하고 열차표를 끊어준 아저씨가
뒤돌아 다시 그 어슬렁 거리는 걸음걸이를 반복하고 있다.
어깨에 짊어맨 가방을 내려놓고는 담담한 큰 숨을 내시며 그제서야 나는 천천히 유리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속력을 내며 달리기 시작하는 열차 뒤로 방금 내가 떠나온 정동진 역의 그 세모꼴
지붕이 여전히 그림같은 풍경으로 저 멀리 자리하고 있었고, 마치 내게 인사라도 하는 듯
나뭇가지 바람에 흔들거리며 철로변에 선 고현정 소나무가 아스라히 멀어져 갔다.
이미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에도 태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어둡게 흐
린 하늘아래 장엄하게 펼쳐진 정동진의 바다는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라도 하는 듯 차갑
게 파도치고 있었다.
고작 반나절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마치 며칠을 머물다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열차가 바다와 멀어지게 되자 차창에서 고개를 돌린 나는 마지막 여로가
적힌 수첩을 닫으며 편안히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난밤의 긴긴 열차여행서부터 이렇게 정동진 역을 떠나가기까지 그저 쉽사리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나는 나즉히 웃음지었다.
강릉시내가 저 멀리 보이는 열차안에서 그렇게 내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