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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紀 4333年(庚辰, 서기 2000년) 陽 5월 5일
贈 工曹參判 東峯權公 遺墟碑 豎碣告由
安東權氏 僕射公派 立巖門中
선생(先生) 연보(年譜)
명종(明宗) 13년 무오 (단기3891년/서기1558년 3월 24일) 영천(永川)군 북쪽 아천리(阿川里) 천미촌제(泉味村第)에서 출생하시다.
성장(成長)하시매 귀봉(龜峯) 주(周)선생에게 학문을 배우시다.
선조(宣祖) 6年 계유 (3906/1573년 선생 16세) 오천정씨(烏川鄭氏) 생원(生員) 거(琚)의 따님과 결혼하시다.
선조(宣祖) 10년 정축(3910/1577년, 선생 20세)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시다.
선조(宣祖) 17년 갑신(3917/1584년, 선생 27세) 향시(鄕試)에 합격하시다.
선조(宣祖) 19년 병술(3919/1586년, 선생 29세) 동당시(東堂試)에 장원(壯元)하시다.
선조(宣祖) 25년 임진(3925/1592년, 선생 35세) 4월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4방을 유린하니
선생은 가족을 거느리고 북쪽 기룡산(騎龍山) 아래 용화촌(龍化村)으로 피란(避亂)하시다.
5월에 자(子) 봉(崶)을 출생하시다.
선조(宣祖) 26년 계사(3926/1593년, 선생 36세) 생원(生員) 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과 더불어
입암(立巖)을 찾으시다.
선조(宣祖) 29년 병신(3929/1596년, 선생 39세) 봄에 청송(靑松) 속곡(涑谷)으로 여헌(旅軒) 장(張)선생을 방문하시어 입암(立巖)의 승경(勝景)을 말씀하시고 한번 유상(遊賞)하기를 청하시다.
여름 5월에 여헌(旅軒) 장(張)선생이 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과 같이 오시어 함께 살기를 수의 하시다. 물에 다듬어진 흰 돌을 취하시어 수암(守庵)에게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이름을 써서 이를 바위틈에 감추게 하고 청유계(淸遊契)를 만드시다.
선조(宣祖) 30년 정유(3930/1597년, 선생 40세) 여헌(旅軒)이 가족을 이끌고 와 살며 선생과 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 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과 매일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항상 사우(四友)라고 칭하다. 7월에 여헌(旅軒)과 함께 청송(靑松) 초정(椒井)에서 목욕하시다.
선조(宣祖) 33년 경자(3933/1600년, 선생 43세) 2월에 여헌(旅軒)이 일선군(一善郡)에 나가 있으며 편지를 해와서 이에 답하시다. 선생은 일찍이 거문고 가락을 좋아하시어 하나의 거문고를 만드시고 산수(山水)에 우거(寓居)하는 즐거움을 편지로 써서 율곡(栗谷) 이선생(李先生)의 제(弟)로 마침 청송(靑松)에 와 우거(寓居)하던 옥산(玉山) 이우(李瑀)에게 탁(托)하시다. 3월에 조지산(曺芝山)을 방문하시다. 7월에 동도(東都) 윤벽오(尹碧梧), 이시발(李時發)을 방문하시다. 8월에 벽오(碧梧) 편지를 보내오다.
선조(宣祖) 35년 임인(3935/1602년, 선생 45세) 4월에 여헌(旅軒)에게 편지를 하시다. 5월 정수암(鄭守庵)과 함께 이천정사(伊川精舍)로 낙재(樂齎) 서사원(徐思遠)을 방문하여 구경연의(九經衍義)에 대해 토론하시다. 10월에 서낙재(徐樂齎)에게 편지하시다. 이달에 부인(夫人) 정씨(鄭氏) 돌아가시다.
선조(宣祖) 36년 계묘(3936/1603년, 선생 46세) 가을에 서낙재(徐樂齎). 정여섭(鄭汝燮). 형제 손길보(孫吉甫). 권명세(權命世).와 함께 동해(東海)를 유람하고 옥산(玉山)에 들러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 사당(祠堂)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시다. 늦가을에 낙제(樂齋)가 사우(四友)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강재(强哉)의 깊은 학문과 순박(醇朴)한 성품은 우리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조(宣祖) 37년 갑진(3937/1604년, 선생 47세) 4월에 병이 드시니 여헌(旅軒)이 편지를 보내와 “바위의 신령이 감응하여 우리 강재(强哉)를 보우(保佑) 할지어다” 하였고 이옥산(李玉山)이 역시 편지를 보내 “하늘이 장차 우리의 어진 군자(君子)를 묵묵히 보우(保佑) 할지어다.” 하더라. 5월에 여헌(旅軒)의 편지에 답하시다. 윤월(閏月)에 박대암(朴大庵) 성(惺)의 편지에 답(答)하시다. 가을에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지으시다.
선조(宣祖) 39년 병오(3939/1606년, 선생 49세) 정월(正月)에 조지산(曺芝山)의 편지에 답(答)하시다. 이 달에 박대암(朴大庵)이 아들의 관례(冠禮)에 빈(賓)으로 청하는 편지를 보내오다. 12월(月)에 곽성재(郭省齋) 근(走+斤)의 편지에 답(答)하시다.
선조(宣祖) 40년 정미(3940/1607년, 선생 50세) 봄에 박대암(朴大庵)을 애도(哀悼)하러 현풍(玄風)에 가시다.
광해(光海) 3년 신해(3944/1611년, 선생 54세) 5월 초(初)2일 선생(先生)이 병환(病患)으로 침소(寢所)에서 고종명(考終命)하시니 향년(享年)이 54세(歲)이시다. 이해 9월 19일에 영천군(永川郡) 동쪽 이동(梨洞) 매봉(邁峯) 감룡(坎龍) 오향원(午向原) 에 장사(葬事)지내다.
광해(光海) 14년 임술(3955/1622년) 3월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 4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의병장(三等義兵將)의훈공(勳功)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겸(工曹參判兼)5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追贈)되시다.
정조(正祖) 7년 계묘(4116/1783년) 입암서원(立巖書院)에 배향(配享)되시다. 봉안문(奉安文)은 정희(鄭熺)가 짓다.
동봉(東峯) 권선생(權先生) 유허비명(遺墟碑銘)
기만영봉(奇巒靈峰)이 참차열입(參差列立)하여 신묘(神妙)한 자태(姿態)를 드러내고 청류격단(淸流激湍)이 굽이굽이 감돌아 맑은 정취(情趣)를 자아내는 유수(幽邃)한 환경(環境)이 마치 조화옹(造化翁)이 특별(特別)한 기교(技巧)로 만든 별천지(別天地)인 듯한 이곳 입암(立巖)은 동봉(東峯) 권선생(權先生)이 서우(胥宇)하여 서지(棲遲)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한 곳으로 자손(子孫)들이 세거(世居)하고 잠영명덕(簪纓名德)이 이어진 승지(勝地)이다.
근안(謹按) 선생의 휘(諱)는 극립(克立)이요 자(字)는 강재(强哉)며 동봉(東峯)은 그 호(號)니 고려(高麗) 태사(太師) 휘(諱) 행(幸)이 그 시조(始祖)이시다. 고려(高麗)말에 이르러 휘(諱) 한공(漢功) 호(號) 일재(一齋)는 우정승(右政丞)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으로 시호(諡號)가 문탄(文坦)이오 그 아들 휘(諱) 중화(仲和) 호(號) 동고(東皐)는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예천백(醴泉伯)에 봉(封)해졌고 시호(諡號)가 문절(文節)이다.
2세(世)를 내려와 휘(諱) 영신(永愼)은 부승(副丞)을 지냈으니 선생의 고조(高祖)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균(勻)이니 충열위(忠烈衛) 부사정(副司正)을 지냈으며 비로소 영천(永川)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조(祖)의 휘(諱)는 필신(弼臣)이니 부사직(副司直)이오 고(考)의 휘(諱)는 해(諧)니 울산훈도(蔚山訓導)였다.
비(妣)는 창녕(昌寧) 성씨(成氏)니 훈도(訓導)인 열(烈)의 따님이다. 선생이 명종(明宗) 13년 무오(戊午) 3월 24일 영천(永川) 북(北) 아천리제(阿川里第)에서 출생(出生)하였으니 천부(天賦)가 순후(醇厚)하여 어린 시절(時節)부터 거지(擧止)가 이범(異凡)하고 능히 애친경장(愛親敬長)의 도리(道理)를 알았다.
장성(長成)함에 귀봉(龜峯) 주선생(周先生)을 사사(師事)하여 위학(爲學)의 요결(要訣)을 얻어듣고 정사역천(精思力踐)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숙취(夙就)하였다.
선조(宣祖) 10년 동당시(東堂試)에 합격(合格)하고 동(同) 17년 향시(鄕試)를 거쳐 동(同) 19년에 동당시(東堂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성시(省試)에 불리(不利)하자 탄식(歎息)하며 이르기를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운수(運數)가 있어 요행으로 구할 수 없으니 독서궁리(讀書窮理)가 나의 본분(本分)이라 하고 과거(科擧)를 단념(斷念) 오직 학문(學問)에만 더욱 힘썼다.
선조(宣祖)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가권(家眷)을 이끌고 군북(郡北) 기룡산하(騎龍山下) 용화촌(龍化村)으로 피난(避難)하였다가 그 명년(明年) 계사(癸巳)에 생원(生員) 손윤암(孫綸庵) 우남(宇男)과 더불어 입암(立巖)을 찾았으니 사람이 살지 않았다.
산(山)이 깊고 골짝이 궁벽(窮僻)하였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다워 터를 잡아 정착(定着)하였으며 비록 산중(山中)에 숨어 있으면서도 국난(國亂)을 근심하여 의병(義兵)의 진중(陣中)에 왕래(往來)하면서 토적(土賊)에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병신년(丙申年)에 청송(靑松) 속곡(涑谷)에 피란중(避亂中)인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에게 입암(立巖)의 승경(勝景)을 자랑하고 한번 유상(遊賞)을 請하였더니 장선생(張先生)이 정우헌(鄭愚軒) 사상(四象) 정수암(鄭守庵) 사진(四震) 형제(兄弟)와 같이 와 보고 함께 살기로 약속(約束)하면서 물에 연마(硏磨)된 흰 돌을 찾아 장유(長幼)의 순서(順序)따라 성명(姓名)을 써서 입암(立巖)을 가리키며 서약(誓約)하고 높은 바위틈에 비장(秘藏)하여 뒷날의 고증(考證)으로 삼도록 하였다.
장선생(張先生)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의(依)하면 장선생(張先生)이 가권(家眷)을 데리고 이곳에 우거(寓居)하게 된 것은 실로 선생의 주창(主唱)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손윤암(孫綸庵) 정우헌(鄭愚軒) 정수암(鄭守庵) 제공(諸公)과 더불어 좌우(左右)에 있으니 장선생(張先生)이 4우(四友)라 일컬으고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였다.
왜란(倭亂)이 평정(平定)된 뒤에 장선생(張先生)과 제현(諸賢)이 모두 고향(故鄕)으로 돌아가고 선생(先生)이 홀로 입암하(立巖下)에 머물려 있을세 장선생(張先生)이 해마다 한 번씩 이곳을 내방(來訪)하였다.
선생이 이 아름다운 산수(山水)와 송계(松桂)의 자연(自然) 속에서 금서(琴書)와 천석(泉石)으로 노년(老年)을 즐기며 뜻을 더욱 더 추구(追求)하고 덕(德)을 더욱 더 나아가게 하려고 하였거늘 불행(不幸)히도 병(病)을 얻어 광해(光海) 3년 신해(辛亥) 5월 2일에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향년(享年)이 겨우 54세(歲)였으며 이동(梨洞) 매봉(邁峯) 오향원(午向原)에 안장(安葬)하였다.
공(公)이 창의토적(倡義討賊)한 사적(事蹟)을 본가(本家)에서는 유실(遺失)하였으나 조정(朝廷)에서 알고 선조(宣祖) 38년(年) 을사(乙巳) 4월(月)에 작성(作成)된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卷)에 제삼등(第三等) 의병장(義兵將)으로 되어 있어 인조(仁祖) 3년(年) 임술(壬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겸(工曹參判兼) 오위도총부(五衛都總府) 부총관(副摠管)이 증직(贈職)되었다.
공(公) 몰후(歿後)에 장선생(張先生)이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그 용모(容貌)는 박졸(樸拙))하였으나 품은 바는 충신(忠信)의 덕(德)이었고 그 언어(言語)는 단눌(短訥)하였으나 지킨바는 정고(貞固)한 지조(志操)였으니 옥돌 속에 숨겨졌는 구슬이오 홑옷 속에 감춰졌는 비단 옷이라 하였으며 서낙재(徐樂齋) 사원(思遠) 이벽오(李碧梧) 시발(時發) 박대암(朴大庵) 성(惺) 조지산(曺芝山) 호익(好益) 이옥산(李玉山) 우(瑀) 곽성재(郭省齋) 근(走+斤) 등 제현(諸賢)이 모두 숙덕(宿德) 중망(重望)으로써 도우심계(道友心契)로 허여(許與)하였으니 선생(先生)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의 뛰어났음을 가(可)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뒷날 일방사림(一方士林)들이 구지(舊址)에 서원(書院)을 세워 장선생(張先生)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선생과 정우헌(鄭愚軒) 손륜암(孫綸庵) 정수암(鄭守庵) 사현(四賢)을 배향(配享)하여 추모(追慕)하며 기렸다.
배(配) 증 정부인(贈貞夫人) 오천정씨(烏川鄭氏)는 생원(生員) 거(琚)의 따님이며 1남(一男) 4녀(四女)를 두었으니 남(男) 봉(崶)은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오 여(女)는 이숙(李塾) 사과(司果) 정안심(鄭安瀋) 생원(生員) 황중신(黃重信) 찰방(察訪) 김경장(金慶長)에게 출가(出嫁)하였다.
희(噫)라 선생이 탁락(卓犖)한 자질(資質)과 수고(邃高)한 학덕(學德)으로 능히 왕유(王猷)를 보불찬양(黼黻贊襄)할 수 있었는데에도 굳이 헌면(軒冕)을 단념(斷念)하고 임하(林下)의 청수(淸修)한 선비로 마쳤으니 세도(世道)를 위(爲)하여 매우 한(限)스러운 일이었다.
선생(先生)의 자손(子孫)들이 선생(先生)의 유촉(遺躅)을 추모(追慕)하며 더욱 빛내려고 유허(遺墟)에 수비(豎碑)를 수의(遂議)하고 12대손(十二代孫) 중혁 형(重爀 兄)이 나에게 현각(顯刻)의 글을 청(請)할세 불문(不文)으로 끝내 사양(辭讓)할 수 없어 행장(行狀)에 의거(依據) 위와 같이 서술(敍述)하고 이어 명(銘)을 하여 이르되
준결(俊傑)한 천품(天稟)이오 울연(蔚然)한 문행(文行)으로
소대(昭代)의 유현(儒賢)이며 백세(百世)의 금식(衿式)이라
터를 잡아 서지(棲遲)하며 장수(藏修)했는 이곳 승구(勝區)
산가수려(山佳秀麗) 요조(窈窕)하니 무능(武陵)의 도원(桃源)인듯
천주(天柱)인양 높은 입암(立巖) 선생(先生)의 고절(高節)이오
경면(鏡面)처럼 맑은 학담(鶴潭) 선생(先生)의 청조(淸操)일세
송림(松林)에 쌓인 사우(祠宇) 향연(香煙)이 예로우며
연하(煙霞)에 묻힌 대사(臺榭) 방촉(芳躅)이 새롭도다
빗돌에 덕(德)을 새겨 옛터에 세웠으니
천추(千秋)토록 전(傳)해가며 지나는 이 우러르리
단기(檀紀) 4331년(서기1998년) 무인(戊寅) 중추(仲秋) 상완(上浣)
후학(後學) 풍산(豊山) 유용우(柳龍佑) 근찬(謹撰)
후손편(後孫篇)
자(子) 봉(崶) : 자(字) 흥서(興瑞) 호(號) 성재(省齋).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여헌문인(旅軒門人)으로 10哲의 1. 성재집(省齋集)이 있다.
손(孫) 상민(尙敏) : 자(字) 지성(志聖) 호(號) 우당(愚堂) 여헌 문인(旅軒門人). 효행(孝行)으로 알리어졌고 병자호란시(丙子胡亂時)의 창의(倡義)로 영양4난창의록(永陽四難倡義錄)에 이름이 전(傳)한다.
손(孫) 호민(好敏) : 자(字) 학성(學聖) 호(號) (巖齊) 여헌문인(旅軒門人) 유효행(有孝行)이시다.
손(孫) 진민(晋敏) : 자(字) 유성(由聖) 성균생원(成均生員) 여헌문인(旅軒門人).
손(孫) 태민(泰敏) : 자(字) 천일(天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도총관(都摠管) 5위장(五衛將).
증손(曾孫) 목(穆) : 자(字) 심중(深仲) 효행(孝行)으로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했다. 경북(慶北) 위인전(偉人傳)에 이름이 전(傳)함.
증손(曾孫) 육(稑) : 자(字) 여실(汝實) 호(號) 사의당(四宜堂) 학행(學行)으로 알리어졌다. 지금 입암(立巖)마을을 개기(開基)하셨다.
증손(曾孫) 필재(弼齋) : 자(字) 백원(百元) 통훈대부(通訓大夫) 흥덕현감(興德縣監).
현손(玄孫) 득태(得泰) : 자(字) 만형(萬亨) 호(號) 천촌(泉村) 유독행(有篤行)이시다.
현손(玄孫) 득중(得重) : 자(字) 자후(子厚) 호(號) 동와(東窩) 효행경술(孝行經述)로 발천됨. 증(贈) 호조좌랑(戶曹佐郞) 동와집(東窩集)이 있다. 번암(樊巖) 체재공(蔡濟公)이 묘비(墓碑) 찬(撰)함.
현손(玄孫) 득수(得銖) : 자(字) 대용(大用) 이무신(李戊申) 이린좌란(李麟佐亂) 토평창의(討平倡義)로 영양사난창의록(永陽四難倡義錄)에 이름이 전(傳)함.
5대손(五代孫) 택전(宅銓) : 자(字) 계명(季明) 호(號) 권서재(卷舒齋) 간암(艮庵) 이공(李公)이 도의(道義)로 상교(相交)하고 정숙(精熟)을 칭찬했다. 유집(遺集)이 있음.
5대손(五代孫) 우전(遇銓) : 자(字) 군회(君會) 호(號) 운애(雲厓). 효행(孝行)으로 장능참봉(章陵參奉)이 되고 증(贈)사복사정(司僕寺正).
6대손(六代孫) 제경(濟敬) : 자(字) 사규(士規) 호(號) 극난재(克難齋)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인(門人). 극난재집(克難齋集)이 있음.
7대손(七代孫) 병정(秉鼎) : 자(字) 경현(景鉉)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吏曹參判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5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7대손(七代孫) 신추(愼樞) : 자(字) 유경(幼景) 호(號) 암려(巖慮) 제(弟) 익추(翊樞)와 더불어 필명(筆名)을 떨쳤다. 세칭(世稱) 8명필(八名筆)의 1(一)
7대손(七代孫) 병직(秉直) : 자(字) 이온(而溫) 호(號) 운와(雲窩) 문집(文集) 있음.
7대손(七代孫) 익추(翊樞) : 자(字) 경숙(敬叔) 형(兄) 신구(愼樞)와 함께 필명(筆名)을 떨쳤다. 8명필(八名筆)의 1(一). 좌수파필(左手把筆)로 세칭(世稱) 좌필(左筆). 이공(李公) 우란(宇蘭)이 그 필첩(筆帖)에 이르기를“기장(奇壯) 발월(發越)함이 신묘(神妙)의 경지(境地)에 이르다”찬(讚)했다.
7대손(七代孫) 명추(命樞) : 자(字) 윤숙(允叔) 호(號) 낙사와(樂斯窩) 신추(愼樞)의 제(弟) 호곡(壺谷) 유범휴(柳範休)문인(門人) 두 형(兄)에게는 소손(少遜)이나 필법(筆法)이 정묘(精妙)해 명필(名筆)로 알리었다.
7대손(七代孫) 병균(秉均) : 자(字) 문경(文卿) 호(號) 송포(松圃) 문학(文學) 행의(行誼)로 향중(鄕中)의 중망(重望)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8대손(八代孫) 도(燾) : 자(字) 천여(天如) 호(號) 운헌(雲軒) 유고(遺稿)가 있다.
8대손(八代孫) 묵(黙) : 자(字) 중항(仲沆) 호(號) 만암(晩庵) 극난재(克難齋) 문인(門人)으로 유집(遺集)이 있다.
8대손(八代孫) 희(熙) : 자(字) 문여(文如) 호(號) 수암(守巖) 극난재(克難齋) 문인(門人) 증(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유집(遺執)이 있다.
8대손(八代孫) 기(炁) : 자(字) 경화(景和) 호(號) 운오(雲塢) 유정재(柳定齋) 문인(門人). 학행(學行)으로 유림(儒林)에알리어졌고 유고(遺稿)가 있다.
8대손(八代孫) 혼(焜) : 자(字) 형오(亨五) 호(號) 송재(松齋)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9대손(九代孫) 주욱(周郁) : 자(字) 문수(文叟) 호(號) 포암(逋庵) 학행(學行)으로 향중(鄕中)에 중망(重望)이 있었고 포암집(逋庵集)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중(所重)히 하는 바임.
9대손(九代孫) 주병(周炳) : 자(字) 치흠(致欽) 호(號) 어암(於巖) 통정대부(通政大夫).
9대손(九代孫) 주엽(周曄) : 자(字) 회수(晦叟) 호(號) 륵옹(扐翁) 포암(逋庵)의 제(弟) 통정대부(通政大夫) 의과(議官)
9대손(九代孫) 주림(周林) : 자(字) 공목(公木) 호(號) 기암(機巖) 이긍암(李肯庵) 문인(門人) 유고(遺稿)가 있다.
10대손(十代孫) 석일(錫一) : 자(字) 치암(致庵) 호(號) 둔암(遯庵) 유고(遺稿)가 있다.
10대손(十代孫) 석한(錫翰) : 자(字) 가선(可善) 호(號) 방곡(方谷) 륵옹(扐翁) 주엽(周曄)의 자(子)로 효행(孝行)으로 알리어졌고 방곡집(方谷集)이 있다.
10대손(十代孫) 석립(錫立) : 자(字) 사근(士根) 호(號) 명봉(明峯) 증(贈)호조참의(戶曹參議).
10대손(十代孫) 석현(錫玄) : 자(字) 성규(聖圭) 사친지효(事親至孝)해서 친상(親喪)에 3년(三年) 식소(食素) 불소(不梳) 불즐(不櫛)해 세인(世人)을 찬탄(讚嘆)하게 했음이 영일읍지(迎日邑誌)에 전(傳)한다.
10대손(十代孫) 석준(錫準) : 자(字) 우경(禹卿) 호(號) 암은(巖隱) 학행(學行)으로 향중(鄕中)에 알리어졌고 후진(後進)들의 훈도(訓導)에 진력(盡力)했으며 유고(遺稿)가 있음.
10대손(十代孫) 석범(錫範) : 자(字) 장언(章彦) 포암(逋庵) 주욱(周郁)의 자(子)로 의용(儀容)이 엄정(嚴整)했다.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
10대손(十代孫) 석찬(錫瓚) : 자(字) 종서(宗瑞) 호(號) 시암(是巖) 유졸수재(柳拙修齋) 문인(門人). 학행(學行)으로 유림(儒林)에 알리어졌고 시암집(是巖集)이 있음.
10대손(十代孫) 석원(錫瑗) : 자(字) 중서(仲瑞) 호(號) 국사(菊史) 계축년(癸丑年) 입암서원(立巖書院) 복원시(復元時) 진심 헌신(盡心 獻身)해서 유림(儒林)의 신망(信望)을 받았다.
11대손(十一代孫) 중락(中洛) : 자(字) 성옥(聲玉) 포암(逋庵)문인(門人) 필명(筆名)으로 향중(鄕中)에 알리었고 특(特)히 대필(大筆)에 능(能)해 많은 정액(亭額)을 남겼음이 영일읍지(迎日邑誌)에 전(傳)한다.
11대손(十一代孫) 대진(大震) : 자(字) 경조(敬朝) 호(號) 송애(松厓) 산남의진(山南義陣) 중군장(中軍將)으로 조국광복(祖國光復)에 진력(盡力)해서 건국공로훈장 애국장(建國功勞勳章 愛國章)이 추서(追敍) 됐다.
11대손(十一代孫) 병락(丙洛) : 자(字) 항길(恒吉) 호(號) 하산(何山) 유능참봉(裕陵參奉) 동몽훈도(童蒙訓導).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겼으며 하산집(何山集)이 있다.
11대손(十一代孫) 병기(丙基) : 자(字) 성길(誠吉) 호(號) 농석(聾石) 학행(學行)으로 알리어졌으며 특(特)히 선필(善筆)로 많은 유품(遺品)을 남겼고 농석집(聾石集)이 있다.
11대손(十一代孫) 병길(丙吉) : 자(字) 남길(南佶) 병락(丙洛) 병기(丙基) 제(弟) 효행(孝行)으로 알리어졌고 수기 정심(修己 正心)에 힘써 향중(鄕中)에 진군자(眞君子)의 칭(稱)이 있었음.
11대손(十一代孫) 대헌(大憲) : 자(字) 여장(汝章) 호(號) 신금(信芩) 시암(是巖)의 자(子)로 전통문물(傳統文物)의 복구보존(復舊保存)에 힘썼으며 입암서원(立巖書院) 묘우(廟宇) 복원(復元)에 진력(盡力)했다.
12대손(十二代孫) 중성(重成) : 자(字) 춘원(春源) 호(號) 송하당(松下堂) 암은공(巖隱公) 문인(門人) 족조(族祖) 시암공(是巖公) 수여 효자전(授與 孝子傳) 비문(碑文)에 효행(孝行)으로 알리어져 있음.
부록 2 : 입암 28경(立巖 二十八景)
노계 박인노 선생(蘆溪 朴仁老 先生)의 입암가(立巖歌) 시조(時調) 29수(二十九首)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길이 전(傳)함.
입암 28경(立巖 二十八景)
탁입암(卓立巖). 기여암(起予巖). 계구대(戒懼臺).
구인봉(九仞峯). 토월봉(吐月峯). 소로잠(小魯岑).
산지령(産芝嶺). 함휘령(含輝嶺). 정운령(停雲嶺).
격진령(隔塵嶺). 경운야(耕雲野). 야연림(惹煙林).
초은동(招隱洞). 심진동(尋眞洞). 채약동(採藥洞).
경심대(鏡心臺). 수어연(數魚淵). 피세대(避世臺).
상엄대(尙嚴臺). 욕학담(浴鶴潭). 화리대(畫裏臺).
합류대(合流臺). 구월탄(鉤月灘). 세이담(洗耳潭).
향옥교(響玉橋). 답태교(踏苔橋). 물막정(勿幕井).
상두석(象斗石)
입암(立巖)마을의 유래(由來)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浦港市 北區 竹長面 立巖里)는 죽장면(竹長面) 소재지(所在地)이다. 31번 국도를 따라 포항에서 청송 쪽으로 약 40km 상거(相距)한 곳이며 영천에서 923번 지방 도를 따라 영덕 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위치한다.
동봉 선조(東峯 先祖)께서 선조 26년 계사(癸巳)에 왜란(倭亂)을 피해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었다. 선조 30년 병신(丙申)에 여헌 장선생(旅軒 張先生)이 찾아와 28경(景)을 선정 명명할 때 마을 앞에 높이 서 있는 바위 이름을 탁입암(卓立巖)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이에 따라 입암(立巖)이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죽장면 이원(一圓)은 죽장현(竹長縣)이라 해서 경주부(慶州府)의 속현(屬縣)으로 현기(縣基)는 입암리 북쪽 약 4km 거리에 있는 현내리(縣內里)에 있었다.
이 새로운 마을이 된 입암리는 죽장현의 다른 지역과 달리 경주부에 속하지 않고 영천군(永川郡)의 월경지(越境地=飛入地)로 죽장현이 죽장면으로 바뀔 때까지 그대로 영천군에 속해 있었다.
선조께서 처음 집을 지으신 곳은 탁입암(卓立巖) 뒤편 상천봉(象天峯) 기슭이었으나 선생의 증손(曾孫-號 四宜堂)이 탁입암 앞쪽 경운야(耕雲野)를 개척(開拓)하여 집을 지으니 탁입암 뒤편을 송내(松內=송안)라 하고 탁입암 앞쪽을 평지(平地)마을 이라 하며 입암리(立巖里)의 주축을 이루게 됐다.
송내(松內)는 양명(陽明)하나 토질이 척박하고 평지 마을은 좀 음습(陰濕)하나 월파옥(月巴沃)하고 형국(形局)이 비교적 넓어 80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
죽장면의 2대수계(二大水系)인 가사천(佳士川)과 죽장천(竹長川)이 마을 앞에서 합수(合水)하니 전형적(典型的)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유수(幽邃)한 촌락(村落)이다.
주변에는 소위 입암 28경이라 해서 풍치(風致)가 빼어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입암가(立巖歌)를 비롯해 많은 제영(題詠)이 전하고 있다.
평지마을과 솔안(松內)이 입암1리(立巖一里)이고 시장(市場)과 죽장중고등학교(竹長中高等學校) 뒤편의 신기(新基-명미)마을이 입암2리(立巖二里)이다.
贈 工曹參判 東峯 權先生 遺墟竪碑告由文
伏以先生昭代遺逸太師肖裔永嘉華閥天賦篤厚師受正確純粹其姿淵溥其學究賾尋源眞知力行存心養性好義樂善堅持雅操芥視名利忠信之行高潔之趣絅裏錦美璞中玉溫婆娑丘林不知不慍島夷亂作倡義討賊爲國効忠追贈崇爵睠玆立巖造化呈技山抱水曲別有天地乃胥乃宇自得自適旅翁義交三賢莫逆益求其志益邵其德聲譽愈彰契好名碩閱四百霜遺躅尙輝吐峯霽月先生德儀鶴潭止水先生襟懷櫛比雲仍是羹是墻迺樹貞珉昭示無疆日吉辰良衿佩齊蹌謹告厥由禮度虔肅敬薦泂酌庶賜歆格
증 공조참판 동봉 권선생 유허 수비 고유문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생은
밝은 세대의 은군자로
태사공의 어지신 후손이요
영가의 빛나는 문벌이라
타고나신 성품이 독실 준후하고
스승에게 받은 것이 바르고 확실하셨다.
순수하신 자질이요
길고 넓은 학문이라
깊은 이치 궁구하며 근원을 찾았으며
진실하게 알아서 힘써 행하셨다.
본심을 보존하고 성품을 길렀으며
의리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기셨다.
청아한 제주를 굳게 지키시어
명예와 재리를 티끌처럼 보시었다.
충성하고 신의로운 행실이요
고상하고 결백하신 취향이라
홋웃 속의 비단옷이 아름다웠으며
옥돌 속의 숨은 옥이 맑았도다.
임천에서 노니시며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한 맘 없으셨다.
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찬의 하여 적을 치셨으니
나라 위해 다한 충의 알려져서
조정에서 높은 벼슬 내려졌다.
이곳 입암을 돌아보니
조화옹이 특기를 드러냈다.
산이 에웠고 물이 굽어 돌아
별다른 세상일세.
이에 살펴보고 이에 정착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즐기셨다.
여헌 선생 도의로 사귀셨고
셋 어진 이 마음이 상합 했다.
그 뜻을 더욱더 추구했고
그 덕이 더욱더 높으셨다.
어진 명성 더욱더 드러나서
학덕 높은 여러 석학 교분이 좋으셨다.
사 백년을 지난 데도
끼친 자취 아직까지 빛나도다.
토월 봉의 개인 달은
선생의 덕의 이며
학소담의 고인 물은
선생의 금화로다.
즐비한 후손들이
추모정성 간절하여
유허에 비를 세워
영원무궁 소시 하니
날이 좋고 때가 좋아
많은 선비 달려왔네.
삼가 그 사유를 고할세.
예의와 법도가 경건하고 엄숙하옵니다.
삼가 맑은 잔을 드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문친(門親) 여러분!
우리가 뜻을 모아 토월봉(吐月峯) 밑 언덕 자락에 동봉 선조(東峯先祖) 유허비(遺墟碑)를 우람하게 세웠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봉 선조의 자손입니다. 세상이 너무나 급속히 변화하여 우리 조상님들이 400여 년 간 인륜을 숭상하며 화목하게 살던 우리의 고향 입암(立巖)에 예와 같이 함께 모여 살지는 못하더라도 여유와 틈이 나는 대로 자주 찾도록 합시다.
새로이 태어난 새싹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선조님 들의 얼을 심어줍시다. 서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길을 트도록 노력하고 숭조애족(崇祖愛族)하는 마음을 더욱 돈독하게 가꾸는데도 힘을 씁시다.
임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5월 5일
동봉선조유허비건립추진위원회장
(東峯先祖遺墟碑建立推進委員會長)
12대손 중혁(重爀)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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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류가 있읍니다. 동봉할배 연보에 선조 26년 (3926/1693, 선생 36세)라고 기록되있는데 선조 26년( 3926/1593....)으로 정정해주십시요.
예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중의 소중한 자료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번 읽어서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읍니다.
후손편 (後孫篇)에 7대손 (七代孫) 신추 (愼樞) : 자 (字) 유경(幼景)에서 字 유경의 한자漢字가 우리문중에서 발간한 최종족보인
동봉공세보나 그 이전에 발간된 신해보辛亥譜인 문절공파보文節公派譜에서는 유경의 '경'字가 공경할 경'敬'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재우의 아버지 최옥의 문집에서는 우리 권신추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權幼經이라하여 字 유경의 경자를 지날경'經'으로 표기되어 있어 문집의 오기誤記라 생각했습니다만 三空 아재께서도 字의 경자를 경치 경'景'자로 하시어 각 각 다르니 족보의 유경幼敬이 맞는지 의문이 갑니다. 유경幼景의 출처를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