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궐명(厥明)/질명(質明)/미명(未明)/여명(黎明)’의 어원
기제사를 드리는 시간은 대체로 궐명(厥明)부터 질명(質明)까지 지내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궐명(厥明)과 질명(質明)에 대한 시간은 의견이 분분하여 아직도 정설이 없다. 역설적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분명한 말이 있는데 왜 굳이 궐명과 질명으로 따로 나타낸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는 반증이다. 명(明)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은 궐명(厥明)·질명(質明)·미명(未明)·여명(黎明) 등이 있다.
명(明)은 일(日)과 월(月)의 회의자이다. 일(日)은 해 곧 하늘의 얼이 일어난[일] 것이고, 월(月)은 해의 얼 그 빛을 워럭(와락)[월]이며 아물리는(여물리는) 것이다. 그러면 명(明)은 ‘해[일(日)]의 [명]을 와락 거리며(껴안으며) 여물리다[월(月)]’는 얼개이다. 여기서 한말 ‘명’은 ‘마킨(<옛>매기다/값이나 등수 ·차례 따위를 따져서 정하다) 영(깔끔하게 꾸민 집 안이나 방 안에서 느껴지는 산뜻하고 밝은 기운)’ 또는 ‘무롸낸 영’의 준말 곧 천명(天命)이나 소명(召命)의 다른 말이다. 따라서 해의 천명을 머금은 것이 ‘밝다’는 뜻이다. 해의 존재이유와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달이 여물은 천명을 일다’의 얼개로는 ‘밝히다’는 뜻이 된다. 낮과 밤으로 다시 밤낮으로 순환하듯, ‘밝다’와 ‘밝히다’는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옛말 ‘ᄇᆞᆯ기다’는 ‘밝히다’의 뜻이고, ‘발기다’는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헤치어 발리거나 찢어서 바라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ᄇᆞᆰ다(밝다)’는 형태상 ‘ᄇᆞᆯ기다’의 준말이다. 즉, ‘밝다’와 ‘밝히다’는 본래 같은 뜻이거나 ‘ㆍ’모음의 음양 차이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음이 양이 되는 뜻이 ‘밝히다’이고, 양이 음이 되는 것이 ‘밝다’는 뜻이다. 결국 동전의 양면으로 명(明)의 얼개와 같다. 엄밀히 따지면 ‘-기-’에 의한 차이로도 볼 수 있다. 즉, ‘-기-’는 본래 ‘키다(ᅘᅧ다)’로 분화되기 이전의 형태이다. 켜다(당길/인引과 탈/탄彈 또는 켤/거鋸와 점화點火)의 차이에 따른 상대성의 결과이다. 따라서 궐명(厥明)·질명(質明)·미명(未明)·여명(黎明) 등은 명(明)의 상태에 따른 구분임을 알 수 있다.
고사리[궐채(蕨菜)]에서 살펴보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면, 궐(厥)은 궐(欮) 글말의 형성자이고, 궐(欮)은 거스를, 맞이할/역(屰/逆)과 허물/흠(欠)의 회의자이다. 척(彳)변에 대(大)가 거꾸로 있는 자형과 발/지(止)가 위아래로 있는 자형이다. 그리고 척(彳)과 지(止)를 합쳐 하나로 변형시킨 글자가 착(辶/辵)이다. 즉, 역(逆)을 줄여 나타낸 자형이 역(屰)이다. 소전에 나타나는 까닭이다. 이처럼 한자의 증가는 그 서체의 변형으로 비롯된다. 한자 서체의 변형은 새로운 발명 보다는 기존의 자형에서 변형 통합되며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즉, 부분을 취하거나 간략화 등으로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방법을 취해 증가 시켰다. 특히 전혀 다른 변형은 시각(관점)의 변화(왜곡)나 그 본래 뜻을 망각한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역(逆)은 물고기가 근원을 찾아 물살을 거스르는 현상의 얼개로 나타냈다. ‘거스를’ 뜻과 상반된 ‘맞이할’ 뜻이 있는 까닭이다. 즉, 거스르는 것은 ‘거꾸로 근원을 찾아가는 것을 큰사람(된사람)[거꾸로 된 대(大)] 이 되는 길로 여기어[역] 가다’는 얼개이다. 이는 또한 다른 사람이 나에게로 거꾸로 다가오는 것으로 ‘맞이할’뜻이 되는 이치이다.
흠(欠)의 갑골문은 왼쪽으로 넘어진 입/구(口)와 공손히 무릎 꿇고 앉아있는 자형의 회의자이다. 즉,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입을 벌리는 그 ‘하품하다[훔 > 흠]’는 현상을 나타냈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구(口)의 자형은 또한 석(夕)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다. 아직 얼을 머금지 못한 저녁의 달처럼 아직 얼을 머금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얼을) 흠빨아야(흠빨다/깊이 물고 빨다)/흠뻑(씬)들이켜야 할[흠] 공손(겸손)한[무릎 꿇은 자형]’상태의 얼개로 ‘부족할’뜻이다. 나아가 ‘허물(험 > 흠)’의 준말에 따라 하품하듯, 벗겨야 할 ‘허물(흠결)’의 뜻도 유추된다. 또한 허물은 뱀의 사탄에 의한 원죄처럼 벗기며 거듭나야 할 ‘빚(부채)’의 뜻이기도 하다. 곧 우리의 원죄는 반드시 갚아야 할 ‘빚’과 같다는 뜻이다.
다시 궐(欮)로 돌아오면, ‘부족한 허물을[흠(欠)] 거슬러 오르며(벗겨내며)[역(逆)] 거두어(거둬 > 궈) 들이다[궐]’는 얼개이다. 그런데 궐(欮)은 한의학에서‘상기(上氣/피가 머리로 모이는 병)’의 뜻으로만 쓰인다. 어쨌거나 그 얼개와 같은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궐(厥)은 ‘얼의 근원 그 머리로 거슬러 거둬들이듯[궐(欮)] 바위를[엄(厂)] 거누어 거꾸로 들어가다[궐]’는 얼개로 ‘파다, 다하다, 다되다’등의 뜻이 된다.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 것과 같은 이치의 얼개이다. 그리고 ‘바위처럼[엄(厂)] 마음을 거슬러 부족하게[흠(欠)] 맞이한[역(逆)] 거탈(실속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태도)[궐]’의 얼개로 ‘그, 그것’등 지시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본질(바탕)과 겉의 상대적 개념으로 궐(厥)이 '그'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유추되었다고 추측된다. 대화의 소통은 얼잇기이듯, 소통에서 제외 된 제3자는 얼이 아닌 겉(몸)을 대신한 지칭의 이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궐명(厥明)은 명(明)의 근원이 되는 시간을 뜻한다. 시간은 하루를 12로 나눈 것이다. 그 시간의 근원 곧 처음은 자시(子時/23~01시)이다. 즉, 두 날이 겹쳐지는 때이다. 궐(厥)이 몸이면서 그 몸의 근원(마음)이기도 한 까닭이다. 마침이 시작인 것과 같다. 그 시작을 인식하는 각자의 해석 차이에 따라 궐명(厥明)의 시간대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명(明)의 뜻을 해돋이 전의 해[피상(몸)]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와 해의 근원 그 얼[마음]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 곧 해의 잉태와 출산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도 하는 것이다.
질(質)의 금문은 은(斦)과 패(貝)의 회의자이다. 은(斦)은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르거나 할 때 밑을 받쳐 놓는 나무토막, 곡식이나 궤짝 따위를 땅바닥에 쌓을 때 밑에 괴는 나무)을 나타낸다. 모탕은 ‘도마(식칼질할 때에 밑에 받치는 두꺼운 나무토막이나 널조각)’나 ‘모루(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등과 같은 원리의 말이다. 즉, 도마는 음식을 ‘도려내는[도] (받침대의) 마룻장(마룻바닥에 까는 널조각)[마]’의 준말이고, 모루는 쇠를 ‘모뜨며(모뜨다/남이 하는 짓을 꼭 그대로 흉내 내어 하다, 글씨나 그림 위에 투명한 종이를 대어 그대로 그리다, 본보기대로 그리다)[모] 누그러트리는 (받침대)[루]’의 준말이며, 모탕은 나무를 ‘모뜨며[모ㄸ] 앙구는(음식 따위를 식지 않게 하려고 불 위에 놓아두거나 따뜻한 데에 묻어 두다)/앙다무는 (받침대)[(ㄸ)앙 > 땅 > 탕] 또는 모뜨며[모] 타(켜다/타다)려 앙구는[탕]’의 준말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만들려는 어떤 대상의 근본 재료를 그 본보기에 따라 본뜨는(모뜨는) 받침대를 뜻한다. 따라서 은(斦)은 ‘칼날의 거듭되는 칼질[은(斦)]에 은결들다(내부에 상처가 나다, 원통한 일로 남몰래 속을 썩이다)/으르어(물에 불린 곡식 따위를 방망이 같은 것으로 으깨다) 내다[은]’는 얼개로, 그 모탕의 입장에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나타낸 글임을 알 수 있다.
조개/패(貝)의 갑골문은 좌우로 똑같이 아무르는[( )]현상 속에 나누어지는[팔(八)] 현상을 담아 조개껍질이 똑같이 오므리며 나누어지는 모습처럼 나타낸 자형이다. 더불어 조개는 모래(흙) 속을 패며/파이며(파다/구멍이나 구덩이를 만들다,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다, 드러나게 하려고 헤집거나 뒤집거나 긁어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드러내다, 연구 따위를 골똘히 하다)[패] 사는 특성이 있다. 즉, 패(貝)는 껍질이 둘로 패며(쪼개며) 파이는[패] 현상을 담아 나타낸 글이다. 그런 현상으로 결국은 조개가 패는(패다/곡식의 이삭이 생겨 나오다) 존재이유를 나타냈다.
따라서 바탕/질(質)은 ‘모탕[은(斦)]이 질긋질긋(끈질기게 참고 견디는 모양, 잇달아 누르거나 당기는 모양)하며 질끈(바싹 동이거나 단단히 졸라매는 모양) 감싸[질] 패인 얼[패(貝)]’의 의미이다. 그러면 한말 바탕은 ‘받치어(받히어) 타 앙구는 것/ 앙구인 얼’의 준말이다. 다시 말해 바탕에는 본바탕과 밑바탕이 있듯, 본바탕은 밑바탕 곧 받치어 타 앙구는 것(밑)에 앙구인(묻힌) 것 그 본보기와 다름없다. 흔히 ‘본’은 본(本)의 한자어로 알려져 있지만, 한말 ‘본디(본ᄃᆡ/어떤 사물의 처음, 본래, 원래)’의 준말이고,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의 준말이다. 즉 ‘본(보늬)에 드리운(깃들인) 이’의 준말이다. 그래서 본(本)은 ‘나무[목(木)] 아래의 본디(처음)[본] 얼[일(一)]’의 얼개로 ‘뿌리’를 뜻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질명(質明)은 명(明)의 얼이 파헤친 궐(厥)에 패인(싹이 생겨난)[질(質)] 상태와 같다. 즉, 궐명(厥明)은 명(明)의 얼이 집을 짓는 것이고, 질명(質明)은 그 궐(厥)의 집에 깃들인 것이다. 그리고 미명(未明)은 그 명(明)이 미(未)한 상태이다. 흔히 미(未)는 본(本)과 상대적으로 나무[목(木)] 위에 일(一)이 있는 상징에 따라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는 뜻에서 여덟 번째의 지지(地支)와 부정사로 가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未)의 갑골문은 木의 갑골문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무/木은 '싹이[ㅣ] 들이어[入] 나눠지며 하나하나 따로따로 비어져 나오는[\ /] 모습'의 자형이다. 반면에 未는 牛의 갑골문 윗부분처럼 뿔이 우꾼하게 돋아나는 자형이 거듭된 형태이다. 즉, 새로운 싹이 우꾼우꾼 돋아나려고 미나는(미나다/<옛>내밀다)[미] 상태로, 아직 돋아나지 못한 직전의 현상을 나타냈다. 다시 말해 나무의 싹눈을 우꾼우꾼 돋아내려고 내미는 상태로, 싹눈이 아직 트이지 못한 개념이다. 그래서 ‘아직 …아니다’는 뜻으로 쓰이는 까닭이다. 따라서 미명(未明)은 명(明)의 얼이 패인 질(質) 곧 씨앗의 상태에서 그 얼의 싹을 트이려는 개념이다. 곧 해가 처음 우꾼우꾼 돋아나려는 시간대로 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우므리는 행위는 반대로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또한 벌리는 모습의 이면이기도 하다. 곧 꽃을 우꾼우꾼 드러내 피워내는 현상이다. 入(들이는)의 뒤집힌 ∨(드러내는) 형태의 변형[∪]으로 나타낸 이유이다.
여명(黎明)의 여(黎)는 기장/서(黍)와 물(勿)의 회의자이다. 물(勿)은 본래 위임(委任)의 권한(權限)을 상징하는 홀(笏)을 나타낸 글자로 ‘어떤 권한(소명)을 얼음[빙(冫)]을 움츠려(감싸)[시(尸)] 녹이듯, 무롸내는(윗사람 앞에 있는 것을 들어내어 오다, 윗사람에게 무엇을 타내다)[물]’ 얼개이다. 그래서 여(黎)는 ‘기장의 얼 그 알곡을[서(黍)] 무롸낸[물(勿)] 것으로 여기는[여]’얼개가 ‘ 무렵, 녁’의 뜻이다. 즉, ‘(해를) 무롸내[무] 녀기어(여기어) 벌이다(일을 베풀어 놓다, 영업을 목적으로 시설을 차리다)/벌어지다(눈앞에 펼쳐지다)[렵]’의 준말이 ‘무렵’이고, 그렇게 ‘녀기는 곳’의 준말이 ‘녁(녘)’이다. 그리고 ‘무롸낸[물(勿)] 여러/여느[여] 기장의 알곡[서(黍)]’의 얼개가 ‘뭇, 많을’의 뜻이며, ‘여직(여태껏)[여] 얼을 무롸내지[물(勿)] 못한 알곡[서(黍)]’의 얼개가 ‘검을(어두울)’뜻이다. 따라서 여명(黎明)은 명(明)의 얼이 우꾼우꾼 돋아나려 가려운 미(未)의 상태에서 싹눈 그 해가 트이는 무렵을 나타낸다.
기제(忌祭)는 돌아가신 부모(조상)의 기일(忌日)에 드리는 제사이다. 돌아가심은 마침이고 다시 새로운 탄생의 의미이다. 곧 마침에 대한 완성을 기리고 새로운 탄생을 축원하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기일을 기념하는 행사로, 그 하루를 뜻한다. 하루의 시작은 시(時)의 시작 곧 자시이다. 그래서 궐명(厥明)은 자시와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하루를 기념하는 첫 시간의 행사이다. 그 시작의 첫마디 처음인 궐명(厥明)부터 시작하여 깃들이는 질명(質明)의 마침에 마치는 것으로 그 상징과 부합시키려는 의미이다. 반면에 명절제사는 명절의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을 기념하는 행사이고, 한해 시작의 첫마디 첫날 그 해가 뜨는 무렵의 행사이다. 그래서 아침 전 미명(未明)에 시작하여 계문(鷄門)의 여명(黎明)으로 의식을 끝내고, 아침 후부터 흠향을 시작하며 그날 하루를 각종 축제로 즐긴다.
사시사철 그 어느 때이든 하루의 시작인 자시(子時)는 변함이 없다. 곧 언제나 변함없는 자시(子時) 곧 궐명(厥明)에 의식절차의 마디를 마치고, 축시(丑時) 곧 질명(質明)에 흠향절차를 마치는 것이 기제사(忌祭祠)이다. 반면에 명절은 그 명절에 따라 해가 뜨는 시간이 다르다. 그래서 명절제사 그 ‘차례’는 해 뜨는 시간 전후를 기준으로, 전(前)의 미명(未明)부터 여명(黎明)까지 의식절차의 마디를 마치고, 후(後)에 흠향절차를 시작하여 새로운 시작 그 거듭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히 명절이 축제가 되는 이유는, 기제(忌祭)는 부모의 거듭남을 경건히 축원하는 의미이지만, 명절은 현재의 나 곧 우리 모두의 거듭남을 축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참고적으로 계문(鷄門)은 닭[계(鷄)]이 여는 문[문(門)]으로, 해를 깨우는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전후 그 여명(黎明)의 시간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