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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복을 받으려면
왕하13:14-19
전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살고 싶은 나라’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1000 여명이 참여를 하였는데요, 그 중에 우리나라에 살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이 11.7%인 117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나머지883명 모두 다 우리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이민가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냐?
1위가 30.1%는 캐나다에서 살고싶다고 했고, 2위가 29.3%는 호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으며, 3위 7.1%가 미국에서,
그 다음이 2.6%는 일본에서 그리고 뉴질랜드 순으로 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우리나라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경제활동의 중심에 서있는 중요한 사람들인데 이들의 90%가 기회만 허락한다면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풀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박사는 벌써 수년 전에 이런 내용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경고가 현실로 다가오는지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정체 내지는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중입니다.
성장 주도권을 다른 종교에 빼앗긴지가 벌써 오래 전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여러가지 교회 안팍의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더 받지를 못했습니다.
받다가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한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나라와 백성에게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복을 우리가 다 받지를 못하고 겨우 일부만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모자라고 부족합니다.
풍성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여러분 엘리사 아시지요?
엘리야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선지자였습니다.
약 50년간을 여러 왕을 거치면서 선지자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비교적 많이 받았습니다.
왕들도 그를 존경하고 나라의 여러 크고 작은 문제들을 상의하고 해결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나라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그가 병이 들자 온 나라가 슬퍼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당시의 왕인 요아스는 엘리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어른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의 사랑과신뢰를 받을 수 있는 원로가 있어야 하는데 정말로 찾기가 어렵지요.
한경직 목사님 이래로 없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그가 죽었을 때 장의사도 슬퍼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면 사람이 죽어야 밥을 먹고 사는 장의사들도 그 죽음을 아까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지도자가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리더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당시의 이스라엘에게는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였습니다.
이 엘리사가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람이라는 이스라엘의 원수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엘리사의 도움으로 아람을 물리쳤는데 이제 엘리사가 없으면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국가의 위기는 곧 개인의 위기입니다.
나라가 어려운데 개인이 잘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엘리사는 이제 자신의 사명이 다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준비하였습니다.
누가 사명자입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사명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현장이 사명의 현장인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마지막까지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람을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아스에게 몇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방법대로만 하면 이스라엘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온 백성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누리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먼저 요아스 왕에게 활과 화살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은 손에 활과 화살을 잡으라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요아스와 백성들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강대한 적군인 아람에 대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먼저 공격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에게 활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전쟁을 겁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20장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전쟁을 독려하고 계십니다.
싸우라는 것입니다.
싸우되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다른 말로 영적 전투라고 합니다.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누워있는데 주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들어가서 싸워서 정복해야만 하는 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가나안의 원주민이 하나도 아닌 7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를 다 물리쳐야 합니다.
싸워서 쫓아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다들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호전적이고 장대하고 싸움도 잘 합니다.
무기나 전술면에서 비교도 안됩니다. 싸우는 족족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싸우기만 하면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겁먹지 말고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20:1에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니 무서워말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사는 아람의 공격에 싸울 힘을 상실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요아스에게 활을 쥐어주었습니다.
활은 무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싸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무기를 주시고 싸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아무것도 주시지 않고 일을 시키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뵙는 하나님이 대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애굽의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라'
모세로서는 정말로 실천하기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대체 내가 누구관대 그리고 당신이 누구이신데 그런 엄청난 일을 맡기십니까?'
모세는 그때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비교해 볼 때 자기는 지푸라기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상징으로 모세에게 지팡이를 쥐여 주십니다.
그때부터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셨듯이 요아스에게 활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지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족해 보여도 괜찮습니다.
좀 모자란 것 같아도 무방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방법이 많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무 염려하지 말고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시작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머뭇거리는 일이 있다면 이제 담대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도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런 다음 엘리사는 동편 창을 열고 활을 쏘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동쪽 방향입니까?
그 이유가17절에 나와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멕에서 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단 동편은 지금 아람이 진을 치고 있는 곳입니다.
아람을 향해 활을 쏘라는 것입니다.
전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적군을 향해 화살을 날려야 합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속도, 스피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빨리 이루려고 합니다.
응답도 빨리 부흥도 빨리 출세도 빨리 모두가 속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닙니다.
여러분 낙오자란 인생의 실패자를 말합니다.
이 낙오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방향에서 이탈한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늦게 도착한 사람을 낙오자로 여깁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좀 늦더라고 코스를 완주한 사람이 낙오자입니까?
아니면 좋은 기록을 냈더라도 코스를 이탈하여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린 사람이 낙오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늦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짜 큰 문제는 방향이 잘못되었는데도 열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서울을 가야하는데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서 부산을 향해 달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잘 못잡으면 빨리 달린 것만큼 손해입니다.
방향을 바르게 잡지 못한 성공 출세 다 문제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지도자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방향만 말해 주면 됩니다.
동쪽으로 가라, 서쪽으로 가라, 이것이 지도자가 할 일입니다.
'그쪽으로 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지 마세요.
기도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십시다.' 하면 전도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괜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에 대한 주님의 강력한 요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전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제 전도해야합니다.
전도하지않으면 전도할 수 있도록 강하게 질책을 하고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방향을 정하지 못했을 때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맞는 것 같다가 새로운 길이 나오면 저게 맞는 것 같고 그러니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세월만 흐른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방향이 정해졌으면 따라 와야지요. 따라오지 않으면 낙오자입니다.
낙오는 실패입니다.
'왜 이리 응답이 늦는거야 왜 이리 부흥이 안되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 게 살거야'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 동편 창을 열고 그쪽으로 활을 쏘고 있는지 아니면 생뚱맞게도 서쪽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적군을 향해 쏘라고 준 총을 아군을 향해 전우를 향해 난사한 정신나간 군인이 있는가 하면 싸우라는 마귀와 죄와 싸우지는 않고 맨날 가족끼리 성도끼리 싸우는 정신나간 성도도 있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할까?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좌절하고 낙심하는지 아십니까?
속도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저쪽은 빠른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이리 느리지?
심지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속도경쟁을 합니다.
다른 집 아이는 이빨이 났는데 우리 아이는 이빨이 안 났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고민 하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 하는 말이 '이빨 안 나는 사람 봤어요?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랍니다.
기다리면 이빨 납니다. 도리어 이빨은 늦게 날수록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늦게 주는 것일수록 더 좋습니다.
가인보다 아벨, 이스마엘 보다 이삭, 에서보다 야곱입니다.
속도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마십시오.
방향이 제대로 인가 아닌가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회복지 기관에 12살 쯤되는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영양실조로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직원이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하든 다리를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내의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 한 분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의사도 쾌히 승낙해 주었습니다.
소년은 이들의 도움으로 수술을 무사히 받고 아픈 다리를 고쳤습니다.
이제는 걷고 뛰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의사와 그 직원이 만났습니다.
반가운 인사 끝에 의사가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어른이 다 되었겠군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순간적으로 그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그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그 후로 못된 짓을 일삼다가 결국 큰 죄를 짓고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박사님, 우리는 그를 걷게 해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걸어가야 할 곳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향을 모르는 것이 실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그 화살들을 가지고 땅을 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을 봅시다. 18절에 '또 가로되 살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엘리사의 말대로 따라한 요아스가 화살로 땅을 치라는 명령에는 세 번쯤 치고 말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여기서 말씀이 그쳤다면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를 것입니다.
세 번을 친 것이 잘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치라면 계속 쳐야지 최소한 다섯 여섯 번 이상은 쳐야지 왜 한 세 번만 시늉을 하다가 마느냐 이겁니다.
아람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여섯 번 계속해서 힘을 모아 쳐야 하는데 한 세 번만 치고 마니 물리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실제로 요아스는 아람을 세 번밖에 치지를 못했습니다.
완전히 물리치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기회 아람을 완전히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로서는 얼마나 분한 일이겠습니까?
요아스로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의 화근인 아람을 진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것은 순종의 문제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을 잘 했습니다.
활과 살을 집어라 '예!'. 동 편 창문을 열어라 '예!.'그 동쪽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예!'. 화살로 땅을 내려 치거라. '예?'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살은 쏘는 것이지 땅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아스는 무너졌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이성이 신앙보다 앞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말씀보다 우선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의 위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무지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에는 이성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성이 용서하지를 않습니다.
자존심이 고개를 듭니다.
'이게 아닌데?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은데....'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문둥병을 고치고 싶으면 요단강물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병을 고치러왔지 목욕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문둥병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한가지 무엇입니까?
요단 강물에 몸을 씻는 것 그것도 몇 번? 7번. 여러분 같으면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이성과 환경이 용납합니까?
이때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 까지는 갔습니다. 그리고 몸을 씻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런데도 낫지를 않습니다. '에이 그것봐 이래 가지고는 안된다고 했잖아. 표시도 안나네. 내가 정신이 나갔지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물에서 나왔다고 합시다. 문둥병이 나았습니까? 그대로 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곱 번을 다 채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한 세 번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따라합시다.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간에 하다마는 순종은 열매가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목사님은 그저 기도하라고 하시네. 그것도 한 일주일도 아니고 40일도 아니고 끝까지 계속해서 하라고 하니 그래서 될까?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난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입니다.
부도를 막아보려고 백방을 뛰어다녀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힘이 빠져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하십시다.
열심히 새벽기도를 빠지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아니 기도한다고 다 되나?
그 빚은 다 어떻게 하고 지금이라도 열심히 벌어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것이 우선일텐데 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사람은 그래 내 힘으로 해보았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빚쟁이한테 시달리더라도 어쨌든 기도해야지 그래서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풀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인 법규로도 안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은 기도를 하게 하기 위해 부도를 나게도 하시고 건강을 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기도외에는 이런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도안하면 그렇게라도 기도하게 하시고 그런다음 기도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또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만 하면 됩니다.
하다가 말 순종이라면 애초부터 하지 마시고 한 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금방 허탕치고 온 바다에 다시 그물을 내렷습니다.
이성으로서는 지식과 경험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순종했더니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머리로 계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면 끝까지 하셔야 합니다.
한 세 번 하고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만하라고 하실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뭔가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한계로 끝내지 맙시다.
하나님의 한계까지 갑시다.
하나님의 한계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가 하나님의 한계입니다.
그때가지 우리 마음대로 끝내지 맙시다.
요아스는 자기 마음대로 치다가 말았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쳐야 했습니까?
엘리사가 그만 하라고 할때까지.
그러면 되었을 텐데 스스로 중간에서 그만두었습니다.
여러분 헌신하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이만 큼 했으니 그만 해야지 하는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됐다 할때 까지입니다. 그때가 반드시 옵니다.
요아스가 계속해서 땅을 쳤다고 합시다. 엘리사가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됐다. 그만해라. 네 믿음과 열심히 그만해도 된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오륙번은 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세 번 쳤으니 두 번만 더 쳐도 되었는데 중간에서 그만 두었으니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실패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하는 것입니다.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이 하다가 버린 폐광을 샀습니다. 아주 헐값에. 그 다음날부터 팔을 걷고 그 폐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삽과 곡괭이로 불과 1m정도를 팠을 때 금가루가 발견되었습니다.
조금 더 파고 내려가니 금맥이 나왔습니다. 횡재를 했습니다.
이 일은 실제로 미국 개척 시대 서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맥이 발견된 곳 1m 앞에 전 주인의 삽과 곡괭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1m 더 팠더라면 그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과 행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도 사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인내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한 세 번만 하다가 포기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시 시작합시다.
1m만 더 해도 뭔가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한 두 번 만 더해도 주님께서 그만 해도 된다고 말리실지도 모릅니다.
몇 번 치다가 포기하지 마시고 한 번만 더 기도합시다.
한 번 만 더 전도합시다.
한 번 만 더 순종합시다.
한 번 만 더 인내합시다.
한 번만 더 용서합시다.
한 번 만 더 참읍시다.
중지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하십시오.
겨우 몇 번했다고 벌써부터 포기한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신앙 생활, 사업, 습관 고치기, 공부, 전도, 기도생활, 가정 생활 다짐해 놓고 결단해 놓고 포기하신 분은 안계십니까?
부분적인 복이 아니라 완전한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