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성황묘>
성황묘는 성황신을 모신 민간 도교 사원이다. 성황은 도시를 말한다. 성은 도시를 둘러싼 城廓이고, 隍은 그 성곽을 보호하고 성 내 침입을 막기 위해 성밖으로 둘러 판 못, 해자를 말한다. 해자에는 보통 물이 있으나 물이 없는 곳도 있다. 성황신은 도시, 성황을 지켜주는 신이다. 도시를 지켜주는 신을 모신 사당이 성황묘다.
성황 신앙은 당나라 이후 활성화되어 송나라 때 제례 행사가 정착했다. 명나라 주원장은 도교와 성황묘의 대중화를 시도하여 전국의 성황묘 설립을 지원하였다.
성황신은 도시 신이므로 그 지역과 연계된 신체가 많다. 광저우의 성황신도 주신이 남한 고조 유황이다. 광저우는 남한의 수도였다.
중국 기층 신앙과 연계된 성황묘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의미가 변화되면서 도시보다 작은 단위인 마을 수호신의 성격을 많이 가진다. 성황당은 서낭당과 성황신은 서낭신과 혼용되기도 한다. 서낭신은 서낭이라고만 불리며 마을 수호신의 의미로도 쓰이고, 서낭은 서낭신이 붙은 나무를 지칭하기도 한다.
중국의 성황묘는 원래 민간 저층의 토속 신앙으로 마을 사람들이 힘든 일이 있으면 찾고 소박하게 복을 비는 곳이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글로 써서 태우면 성황신이 해결해준다고 믿었다. 이후 불교와 습합되면서 불교적인 격식을 많이 갖추게 된다. 우리는 민간신앙의 영역에 남아있고, 불교적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 성황묘는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 존재하는데 최근에는 중국이 중국적 종교를 강조하면서 국가적 요소가 포함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황제도 활발히 진행된다.
우리나라에는 중국 상해의 성황묘가 많이 알려져 있다. 예원 옆에 있어서 쇼핑가와 연계되므로 관광객들이 많이 가보는 것도 한 원인이지만 역사적 유래도 오랜 곳이고 규모도 크다. 원래 금산신사라는 절이었다가 명조 1403년에 성황사로 개명된 곳이라 불교와의 습합을 잘 보여준다. 성황신으로 상해에서 살았던 진유백이 모셔져 있다.
광저우 성황묘는 명나라 1370년에 건립되었다. 영남 지구 최대 성황묘로 규모는 북경의 성황묘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다. 청대에는 양성 8경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대전 배향전 등은 청대에 지어졌다. 청대에는 부근에 관왕묘가 있었으나 사라지고 도로와 집들이 들어섰다.
1993년 광주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2009년 주변 보수를 거쳐 성황묘의 역사적 풍모를 갖추게 되자 2010년 10월부터 시민들에게 정식으로 무료로 개방되었다.
성황묘 대전에 모신 삼존은 남한을 건국한 고조 류옌(류엄)과 海瑞(해서), 楊淑山(양繼盛, 1516~1555) 등 3인이다. 류황이라고 칭하는 류엔이 성황묘의 주신이다. 류황은 남한국을 건국하였을 때 광주를 개발하고 흥왕부라 칭하며 상업과 재부로 광주를 개발하여 화단금족으로 만들고 널리 민간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기이한 것은 송나라가 남한을 멸하였을 때 황성은 전화에 훼손되었으나 오직 성황묘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남한 유민이 유황을 기념하기 위해 성황묘의 이름을 빌려 유황의 동상을 만들어 제사지냈다. 1370년에 성황을 신으로 봉하고 규격 등을 높여 지은 이래 500여년이 지나 민국 시대에 다시 중수하였다.
벽화는 광주 유명화가와 함께 30여명의 광주 미술학원 학생들이 반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다. 벽화 중에는 중국 전설 중의 반고, 여와, 오악제군, 삼청천존, 옥황대제, 사해용왕, 28성숙 등등 모두 132명의 인물화의 신선이 있다. 모두 중국이 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5천년 역사 속에서 생성된 영웅, 전범, 성현 충렬 등등이다.
대전은 높이 12M이다. 頭門은 천지간의 양대 사자가 위무수호하고 있다. 패루는 광주 유일의 명청 풍격을 지닌 고패루이다.
입장료 : 무료
위치 : 중산사로 충우대가. 남월왕궁박물관과 붙어 있다.
방문일 : 2019.12.


성황묘 입구




*성황보전, 성황묘 대전이다. 앞은 끊임없이 오는 참배객들로 붐빈다.



성황묘에서 모신 3존이다. 主神은 劉皇(유황), 양옆은 해서와 양숙산이다.

*남한 고조 유엄, 유황.
유엄은 917년 南漢의 건국자이다. 조부 유겸이 광저우로 옮겨와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웠다. 유엄의 선조는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복건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유겸의 아들 劉隱은 정해군 절도사가 되어 당나라 멸망기에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중원의 세력자 후량은 909년 그를 남평왕으로, 911년에 남해왕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그 뒤를 이은 유은의 동생 유엄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독립하였는데, 바로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南漢이다. 처음에는 대월이라 하다 漢으로 고쳤다. 남월의 수도도 광저우, 남한의 수도도 광저우인데, 처음 이름이 대월이니 두 나라의 상관관계를 탐색할 만하다.
남한은 무관이 아닌 문관을 주로 등용한 국가로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한 나라였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의 왕위 다툼과 환관 우대가 문제가 되어 손자대인 유창 대 971년에 멸망하였다.
이로서 광저우는 남월의 수도, 남한의 수도, 명의 수도(40일간)로서 3조의 수도, 삼조고도라고 말하고 있다.
유엄은 비록 짧은 시기 존재한 왕조였지만, 그의 당대에는 전쟁보다 평화를 숭상하고, 중앙 권력 다툼으로 내려오는 문관을 적극 등용하여 문인통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지방관은 전부 문인을 등용하였다 하니, 그의 문인 통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점은 우리 조선왕조와 상통하는 점이다. 우리는 철저히 문인 중심의 정치체계였고, 지리적 이점과 외교 능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면서 평소에는 무인 육성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로써 백성들은 군인들의 몫은 생산하지 않아도 되어 비교적 안정되게 나라가 유지되었다. 전쟁 시에는 그렇게 지켜 준 농민이 의병이 되어 외세와 맞서 나라를 지킨 매우 경제적인 통치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원인을 바로 이 의병의 존재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일본은 수도만 함락하여 관군을 굴복시키면 바로 그것이 승리이고 나라 접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관군의 실패와 관계없이 민간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키는 본격적인 세력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이점을 일본은 예측할 수 없어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문인통치로 평화를 끌어냈던 그의 정신이 이어져 평화의 나라가 지속되었다면 중국 남방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광주 사람들의 여유와 품격은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 정도면 성황묘의 주신으로 충분히 숭상될 만하지 않은가.

성황묘 대전 안에 모셔진 신, 양숙산으로 보인다. 양숙산은 명나라 가정 년간에 간신 엄숭 부자의 모함으로 참수를 당하고 그 부자가 도태되고 난 후 복권되어 '忠愍'이란 시호를 받고 성황으로 추존되어 성황묘에 모셔졌다. 북경에는 그의 사당 <양숙산사>(송균암)가 있다.






저명화가와 미술학원 30명이 6개월에 걸쳐 작업해 완성했다는 벽화이다. 중국 신화 속 인물과 역사 속 영웅들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 모두 132위의 인물군이다.




입구




마침 문장식을 금박으로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어 찍어보았다. 금색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금박지를 뜯어서 붙이는 식으로 금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성황묘 소개글이 내부에 붙어 있다. '종교의 중국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 2017년 시진핑이 19대 인민대회에서 보고한 '전면적으로 당의 종교 공작 기본 지침을 관철하고, 우리 종교의 중국화 방향을 견지하고 종교와 사회주의 사회가 서로 적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도'한다는 요구를 광주도교도성황묘에서 적극적으로 따라서 '4進' 활동을 하는 장소로 적극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애국주의와 성황묘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광주 유일의 명청 풍격을 지녔다는 고패루. 성황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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