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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8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22)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그 사고 뒤 완전히 폐쇄된 원전으로부터 아직도 방사능 오염수가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답니다.
하지만 후쿠시마 어민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작년 6월부터 조금씩 조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난 7월에야 방사능 오염수가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업을 중단했다가, 며칠 전 조업금지조처가 풀렸다고 합니다.
일본정부가 조업금지를 푼 이유는, 후쿠시마 근처 바다에서 사는 어류들을 조사해보니 모든 고기들이 다 방사능에 오염된 게 아니고, 문어나 오징어 등 16개 어종에서는 지금까지 방사능이 검출된 적이 없어서, 이들 어종은 잡아서 유통시켜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능 물질은 바다 속 아래로 가라앉게 되는데, 주로 바닥에 붙어사는 어종이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사는 농어 따위는 그 몸속에 방사능 물질이 쌓여있을 가능성이 커서 유통이 금지된답니다.
원전사고의 여파로 어민들의 생계도 걱정이지만, 혹시나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수산물을 먹어왔을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 와선 뭐라 뾰족한 대책도 없습니다.
방사능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인데, 현대과학으로도 이미 방사능 물질에 오염되었다면 인체에 치명적인 그 결과를 결국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땅[心地]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지요. 거기에는 있음과 없음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성스러움도 속됨도 없습니다. 이렇게 절대 청정한 마음바탕에다 우리가 무언가를 올려놓으면 바로 그 즉시 오염된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그와 같은 ‘청정한 마음바탕’을 생각하거나, 또는 '나도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앞으로는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내 본래마음은 텅 비어서 고요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등, 이러한 모든 생각이나 혹은 마음속의 분별이 바로 오염수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 내 마음바탕이 그대로 청정지역이라는 것도 생각 말고 오직 망념을 다 쉬어서 내 마음의 본래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테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라고 했더니, 허공이 안 보이니 텅 빈 자리에 하얀 연기를 피워서 ‘허공’을 찾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인의 마음공부가 바로 이렇게 되어야하는데, 간혹 잘못된 신앙으로 어이없이 오염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진리적 신앙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로 그러한 우리 본래의 마음자리를 유지하자는 것인데, 진리의 상징물인 일원상을 대할 때 그것이 마치 진리 자체인양 긴장하며, 이미 진리 당체(當體)인 자기 마음을 갖고도 또 ‘진리’라는 허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조 소태산께서 진리적 신앙을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되레 미신적 신앙을 하고 있는 아주 흔한 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열심히 일원상을 향해서 신앙하고 숭배하는 것은, 흡사 다 큰 어른이 아이의 흉내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수행하겠다고 하는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잘못되면 바로 미신이 되고, 그리되면 본래 청정한 자기의 마음을 크게 오염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불법의 참뜻을 모르게 됨과 동시에, 올바른 수행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45. 완전한 청정[畢竟淨]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를 얻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셨는데 어떤 것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까?”
“필경 청정으로써 깨끗함을 삼는다.”
“무엇이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 것입니까?”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 곧 필경 깨끗함이다.”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이 깨끗한 것이니, 깨끗함을 얻었을 때에 깨끗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곧 깨끗함이 없음이다. 깨끗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곧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다.”
問 維摩經云 欲得淨土 當淨其心 云何是淨心
答 以畢竟淨爲淨
問 云何是畢竟淨爲淨
答 無淨無無淨 卽是畢竟淨
問 云何是無淨無無淨
答 一切處無心是淨 得淨之時 不得作淨想 卽名無淨也 得無淨時 亦不得作無淨想 卽是無無淨也
정토(淨土)라는 것은 깨끗한 땅이라는 뜻으로써, 이른바 더러운 땅을 뜻하는 예토(穢土)의 반대말입니다.
예토란 우리 중생들이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중생들이 끝없는 탐 진 치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예토라 합니다. 그리고 불보살 세계는 일체의 삼독심이 다 사라져서 티끌만한 죄업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정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정토는 곧 극락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극락정토라 했고, 또한 옛날 부처님 시대부터 이 정토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서방정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인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통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대낮보다는 기온이 내려가서 선선해지는 저녁에야 바깥출입을 많이 하는데, 이런 까닭에 해가 지는 곳인 서쪽에 극락정토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구절은 유마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유마거사는 서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사셨다는 분이니, 이 가르침으로 보면 불보살이 사는 깨끗한 땅인 서방정토란 실은 마음이 청정해서 얻어지는 세계라는 것을 이미 2천5백 년 전에 가르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도 불교의 신심 깊은 불자들은 극락정토가 실제로 저 멀리 어딘가에 있어서 죽은 뒤엔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데, 그러한 세계는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청정해졌을 때 바로 그 자리가 정토라는 것을 위 구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란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는 뜻이 아니라,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을 모두 떠난, 궁극의 깨끗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갖는다고 하면, 탐심 진심 치심을 떠나서 그야말로 타고난 본래 그대로의 텅 빈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삿되고 더러운 마음과 반대되는 깨끗한 마음이 아니라, 삿되고 더럽다, 올바르고 깨끗하다는 분별을 모두 초월한 절대 청정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실은 깨끗하다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한 것입니다. 대주 스님은 그래서 이것을 필경 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필경이란 ‘궁극에 가서’ 또는 ‘절대적으로’ ‘완전히’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필경 청정은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였는데, 더럽고 깨끗함뿐만이 아니라, 깨끗하다는 그것조차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든 참으로 성성적적, 적적성성하면 그 마음자리가 바로 이 경지입니다. 그것을 각자 스스로 체험으로 확인해야지 따로 이러니저러니 하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표현을 잘한다고 해봐야 그 자리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백날 머릿속으로 그려보아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마음자리를 불교에선 무심이라고 하는데, 우리 교전의 표현으로 하자면 분별과 주착이 없는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졌을 때 ‘깨끗하다’는 생각도 내지 않고, 또 이렇게 마음속에 깨끗함도 없을 때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무심이라 하였습니다.
표현하자니 이렇게 되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냥 분별을 모두 쉬고 고요히 깨어있는 마음으로 돌아가면 이 마음입니다.
이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래 가부좌를 틀고 말없이 앉아있다고 해도 선(禪)의 그 참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자라면 언제나 이러한 마음이 되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지요. 이런 사람이 진실한 수행인이고 참다운 불제자입니다.
46. 완전한 증득[畢竟證]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으로 증득(證得)을 삼습니까?”
“필경 증(證)으로 증득을 삼는다.”
“어떤 것이 필경 증입니까?”
“증득함도 없고 증득함이 없음도 없는 것을 필경 증이라 한다.”
“어떤 것이 증득함이 없는 것이고, 어떤 것이 증득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 등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망념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얻은 것을 곧 증득함이라고 한다. 증득했을 때에 ‘증득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증득함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증득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증득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곧 증득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問 修道者 以何爲證
答 畢竟證 爲證
問 云何是畢竟證
答 無證無無證 是名畢竟證
問 云何是無證 云何是無無證
答 於外 不染色聲等 於內 不起妄念心 得如是者 卽名爲證 得證之時 不得作證想 卽名無證也 得此無證之時 亦不得作無證想 卽名無無證也
증득(證得)이란 도를 확실히 깨쳐서 얻는 것을 말합니다. 분별하는 생각이나 번득이는 착상(着想) 같은 것으로 진리를 깨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있고 없음을 초월한 자리, 텅 비었으되 또한 가득한 자리, 언어도단의 자리를 실제로 깨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그 자리를 아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그 자리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득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일원상의 진리>가 내 안에 온전히 있고,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내 안에 그대로 갖춰져 있음을 아는 것이 수행인의 올바른 깨침입니다. 만약 어제는 내가 분명히 깨달았었는데 오늘은 다시 모르겠다고 하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일어난 것을 깨침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대주 스님은 필경 증이어야만 수도인의 바른 깨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필경 증이란 깨침도 없고 깨침이 없음도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깨침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깨침이라는 것이 그 속에 들어가서 실제로 무언가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도인이 밖으로 모양과 소리, 냄새, 맛, 느낌, 생각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티끌만한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깨침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주 스님이 이렇게 안팎 두 가지로 설명하였지만, 사실은 밖으로 여섯 가지 경계[六境]에 물들지 않는 것과 안으로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동시적 관계입니다. 안팎으로 따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사들은 “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그냥 한 마디로 “망상하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망상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았을 때에 ‘깨달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며, 이렇게 깨달음이 없을 때에 또한 ‘깨달음도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 없음도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따라가면 번거롭지만, 그냥 단순히 이 자리에서 마음에 온갖 분별망상을 쉬어버리면 그 마음자리가 바로 나의 성품이고 진리자리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나면 그 뜻만을 취할 뿐 그 말은 버려야합니다. 그 말이나 표현에 얽매여서 스승이 가리키는 본래 뜻을 놓치면, 보름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47. 참다운 해탈
“어떤 것이 해탈한 마음입니까?”
“해탈한 마음도 없고 또한 해탈한 마음이 없음도 없는 것이 곧 참 해탈이다. 경에 이르기를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리요’라고 하였다. 법이란 있음[有]이요, 법 아님이란 없음[無]이니, 다만 있음과 없음[有無]을 취하지 않으면 곧 참된 해탈이다.”
問 云何解脫心
答 無解脫心 亦無無解脫心 卽名眞解脫也 經云 法尙應捨 何況非法也 法者是有 非法是無也 但不取有無 卽眞解脫
해탈이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이 ‘나는 해탈했다’고 한다면 진정으로 해탈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아직 마음에 ‘해탈하였다’는 분별이 남아있는 것이라, 그것은 해탈에 끌려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해탈이란 해탈한 마음도 없고 해탈한 마음이 없음도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날 통일신라시대에 원효 스님은 법 높은 고승이었지만 나중엔 스스로 신분을 감추고 어느 절에 부목(負木)으로 들어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 절을 몰래 빠져나가서 다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탈이란 정작 남들이 해탈한 사람으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진정으로 해탈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합니다.
위에서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리요’라는 금강경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법이라는 상[法相], 법이 아니라는 상[非法相]을 모두 떠나서 마음이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것이 참으로 바르게 머무는 것이라, 이러한 마음이 곧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인이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마음바탕에 그대로 머물러서, 마음이 해탈에도 머물지 않고 또한 해탈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음이 참다운 해탈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망상분별을 떠난 우리의 마음자리, 즉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해탈의 경지입니다.
48. 완전한 얻음[畢竟得]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필경 얻음[得]으로써 얻음을 삼는다.”
“어떤 것이 필경 얻음입니까?”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는 것을 필경의 얻음이라 한다.”
問 云何得道
答 以畢竟得 爲得
問 云何是畢竟得
答 無得無無得 是名畢竟得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다’고 하였는데,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도를 얻는 것은 꼭 그와 같습니다.
도를 깨쳐서 뭔가를 얻었느냐하면 실제로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얻은 것이 없느냐고 하면 또한 도를 깨치기 전과 비교하면 얻은 게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깨치는 것은 말과 이치로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스스로 직접 깨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49. 완전한 공[畢竟空]
“어떤 것이 필경 공입니까?”
“공함도 없고, 공함이 없음도 없는 것을 곧 필경 공이라고 한다.”
問 云何是畢竟空
答 無空無無空 卽名畢竟空
마음이 공한 것과 저 허공이 공한 것은 똑같지 않습니다. 저 허공이 텅 빈 것은 오직 비어있을 뿐으로 그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허공이 텅 빈 것을 우리는 흔히 무(無)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텅 빈 것은, 마치 허공처럼 아무것도 없지만, 그 가운데에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한 앎의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반야의 지혜라고 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으로 공하면 공함도 없고 또한 공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각자의 본래마음, 즉 성품입니다.
이 자리는 머리로써 이해하였다고 자족하지 말고, 이 자리를 참으로 깨칠 때까지 수행하고 또 수행해서 반드시 스스로 견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머릿속에 불법의 지식만 조금 얻었을 뿐이니, 고해에서 영영 벗어날 기약이 없는 불쌍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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