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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회 84회 '지리산 종주' 산행기 >
▣ 산행일 : 2008년 5월 2일(금)~5월 5일(월) <3박 4일>
▣ 산행코스 : 구례구역앞(천수식당)-성삼재-노고단대피소-가노고단-임걸령-노루목-삼도봉-화개재-토끼봉-연하천대피소-벽소령대피소-구벽소령-선비샘-칠선봉-세석대피소-촛대봉-연하봉-장터목대피소-제석봉-통천문-천왕봉(정상)-장터목-백무동
▣ 참석자 : 12명 (기세환, 김용우, 김정남, 김종화, 신원우, 위윤환, 이원무, 이재웅, 임삼환, 전작, 조문형, 한양기)
▣ 동반시 : 4편
①“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신원우 낭송>
②“지리산”/ 이기형 <김정남 낭송>
③“별 헤는 밤”/ 윤동주 <김종화 낭송>
④“춘향의 노래”/ 이기형 <기세환 낭송>
초파일의 아침부터 미뤘던 산행기를 쓴다. 불가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다. 소위 큰스님들의 법문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 중의 하나가 ‘참 나를 찾아라, 너의 진면목을 알아라’ 등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에 나는 항상 공감한다. 그는 “종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미신을 구체화한 것이며, 성경을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고 신(神)이란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및 산물에 불과하다”라고 폄하했다.
현대 종교는 ‘예수나 부처의 본래의 소박한 의도가 왜곡된, 이기적인 형태의 날라리판’이라 생각한다. 깨달으면, 참 나를 알면 뭐 할 건데. 알기나 하는지. 화려한 교회와 절이나 짓는 주제에 그들이 뭐할 건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신성(神聖)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악이 자행됐는데.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와 현상에 대하여 종교인들이 무엇을 얼마나 알기에.
드디어 지리산 종주를 마쳤다. 산사람이면 누구나 이루고 싶어 하는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그것도 반백이 훨씬 넘은 나이에. 우리는 그곳에서 지리산의 사계(四季)를 겪었다. 둘째 날, 노고단에서 벽소령산장까지의 여정은 여름날, 내 팔뚝은 아직도 뻘겋다. 셋째 날, 벽소령 산장에서 장터목산장까지는 가을날이었고, 넷째 날,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추운 겨울이었으며 장터목산장에서 백무동의 하산길은 봄이었으니 비발디의 사계가 생각났다 하면 지나치게 과장된 비유인가.
첫 날, 3시에 남부터미날에서 모두 모였다. 배낭을 보니 커다란 야영용이다. 별도로 큰 배낭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나 보다. 무게를 보니 만만치 않다. 얼굴을 보니 비장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25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대가 클 것이다. 승객이 꽉 차니 3시 30분에 출발하는 차가 3시20분에 구례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 7시에 구례 도착. 지리산 종주 일정은 신 이사에게 맡겼으니 우리는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저녁은 섬진강 가의 낡았으나 정겨운 참게 매운탕집. 전작 산우는 지나는 길이라고 장인의 산소에 들러 성묘. 착한 사위다. 나는 니전투구 중인데. 인심이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시고 우리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보리새우를 넣은 섬진강 참게탕을 지리산 산수유술을 곁들여 맛나게 먹고 마신다.
참게는 알이 가득 차 있으며 알맛과 시원한 국물맛이 천하일품이고 반찬맛은 여전히 고향의 맛이다. 2년을 숙성시킨 묵은 김치는 그 집의 자랑거리란다. 운치를 살려 섬진강의 야경을 보자는 제안에 따라 방안의 전등을 끄니 강 건너 구례구역이 불을 밝히고 있고 섬진강 다리 아래로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지리산 10경 중 벌써 섬진청류를 본다. 언제나 맑고 넉넉하게 흐르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강이다. 좋은 벗과 멋진 산, 맑은 강, 향기로운 참게탕, 맛있는 지리산 산수유술과 넉넉한 인심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대취하지 않으면 언제 취하겠는가. 호쾌하게 일배 일배 또 일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듯이 오늘의 즐거움을 흘려버릴 수 없지 않은가. 강가에서 마시며 ‘소오강호’를 문득 떠올린다. 검색하여 찾아보라. 어울리는 노랫말이다. 호탕함과 유유자적이 어우러진 시인가 노래인가. 아쉬웠으나 내일의 긴 산행을 위하여 절주하기로 하고 노고단으로 이동.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콘크리트 포장을 걷어 버리고 돌길로 공사 중이다. 산행 중에 만나는 콘크리트 포장길은 산사람이면 누구나 싫어하는데 참으로 잘 하는 일이다. 구례읍과 화엄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잠깐 쉬면서 지리산이 간직하고 있는 슬픈 역사와 한(恨)을 생각해본다.
깨끗한 목조건물로 바뀐 노고단 대피소를 보면서 옛 생각에 잠긴다. 그때는 하늘의 별을 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금도 하늘의 별은 많으나 봄철이어서 은하수는 없다. 하늘의 별과 까만 공간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뭘 하겠는가. 죽어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니 부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며 혹시 안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요즘의 나는 뭐든지 심드렁하다. 마나님은 우울증을 넘어 조울증이라는데 나도 일부분은 인정한다.
대피소의 방에 자리잡고 김 총장이 준비한 가시오가피주를 한 잔씩 하면서 신 이사가 입산시인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조용히 읊는다. 지리산 10경을 인간사와 접합시켜 지었는데 입산시로 안성마춤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내일의 긴 여정 때문에 일찍 잠을 청하려 했으나 김종화 총장, 조문형 산우, 도움쇠는 잠자리를 바꾸면 잠이 안 오는 타입이라 밖에 나와서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기를 두어 차례를 해도 새벽 3시다. 먼저 잠이 든 한양기, 위윤환, 이재웅 산우가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코를 고는 소리’를 3중주로 연주한다.
헤드랜턴으로 책을 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5시 기상이다. 두 시간이나 잤는지 몸이 무겁다. 산우들의 짐을 들어보니 너무 무겁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자고 해서 모았는데 참으로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일부는 대피소에 헌납하고 짐을 다시 꾸렸는데 이제는 내 짐이 너무 무겁다.
점심용으로 김밥을 꾸리고 7시 56분 천왕봉을 향하여 힘차게 노고단대피소를 출발. 노고단 고개에 9시 18분 도착. 왼쪽에 노고단과 비슷한 돌탑을 쌓은 모조 노고단이 있고 오른쪽 위에 실제의 노고단이 높이 솟아 있다. 임시 출입금지다. 왼쪽으로 난 우회도로를 따라 부지런히 간다.
연하천 산장까지 2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 긴 여정이라 처음부터 속도를 냈는데 무게를 줄이고자 홍어와 소주를 간식으로 먹으면서 나와 신 이사는 무척 힘이 든다. 여름 같이 더운 날씨에 소주 한 잔이 독이 된 것 같다. 무게를 줄이려고 물을 한 병만 가져왔는데 동이 나고 10시 3분에 임걸령샘에서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출발. 노루목에 도착. 10시 40분.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인 반야봉이 왼쪽에 높게 솟아있다. 뒤쪽에는 중봉이 솟아있어 사람의 엉덩이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다녀오면 좋겠지만 젊은 시절에도 항상 패스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도 패스다.
전남, 전북, 경남의 3개도가 교차하는 삼도봉을 지나쳐간다. 중간에 마셨던 소주가 오르면서 점점 힘이 든다. 겨우 두 시간을 걸었는데 심장이 답답하고 뒤쪽 대퇴부 근육이 당긴다. 8개월의 공백이 무섭다. 왼쪽 뒷쪽의 뇌압도 느껴진다. 그래도 내색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먼 산행에 산우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다.
11시 04분. 화개재 도착. 화개재까지는 거의 편편한 내리막 길이라 그래도 따라 왔는데 토끼봉까지는 오르막이다. 화개재는 옛날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기억도 없다. 뱀사골로 내려가는 길에 나오는 뱀사골대피소는 페쇄되었단다. 거의 30여년 전에 반야봉을 오르고 피아골로 내려가기 위해 묵었는데 몹시 추웠던 기억이 새롭다.
토끼봉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에서 자기 몸과 비슷한 커다란 배낭을 맨 젊은 산꾼을 만났는데 산행에 대해 되게 아는 척을 한다. 어디나 그렇게 폼을 잡는 산꾼들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그 커다란 배낭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으나 그것은 내 몫이 아니니 무시하고 간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혼자 산행을 하며 반바지에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제 멋에 사는 사람들이다.
토끼봉까지는 쉬엄쉬엄 왔으나 1,478미터 고지에서 쉬는데 신 이사는 나보다 더 힘이 드는지 굵은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다. 갈 길이 머니 오래 쉴 수도 없다. 이때부터 신 이사와 보조를 맞추며 간다. 서울의 기온이 30도였다는데 높은 곳이라도 기온은 놓다. 바람도 별로 없고 짐은 무겁다. 괜히 홍어를 들고 왔다는 후회를 한다. 그래도 벽소령에서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한다.
점심의 목적지인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다. 예정시간 10분 초과. 산나물을 안주로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니 보약이 따로 없다. 맛난 식사가 끝나고 출발하려는데 신 이사도 나도 발걸음이 천근이다. 신 이사는 30분만 자고 가자고 제안하는데 모두 힘이 남아도는지 그냥 가잔다.
기 회장님은 회장의 직을 운운하면서 강행하잔다. 나는 왼쪽 뇌로 뇌압이 올라오면서 마음이 불안하고 신 이사는 땀으로 멱을 감고 있는데, 에라 시산회에서 짤릴 때 짤리더라도 한 잠 자자고 둘이서 의기투합하면서 대피소 숙소로 간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자야겠다. 30분의 꿀잠을 자고 나니 한결 낫다. 누군가 신 이사의 다리를 주무르는데 신음소리가 만만치 않다. 많이 힘든 모양이다. 산우들이 벽소령대피소에 먼저 가봐야 우리 둘은 믿는 구석이 있으니... 하하하 미안했다.
16시. 연하천대피소 출발! 거기서부터 둘이는 쉬엄쉬엄 옛 이야기를 해가며 가는데 쓰레기를 줍고 가는 기특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연하천대피소에서 털보 관리인에게 김밥을 얻어 먹었는데 감사한 마음에 그에 대한 보답이란다. 그 김밥은 우리가 그에게 준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 엮어지기도 한다.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니 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들은 대피소를 예약하려고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1분 만에 예약이 끝나버려 잠자리와 식사에 대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사람들이다. 젊으니 무모하지만 용감하기도 한 것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는 복도 한 켠이라도 잤겠지.
6시 16분 벽소령대피소 도착. 잠자리를 배정받고 기 회장님의 양주를 반주로 식사를 하는데 한 접시에 백만원, 4접시이니 4백만원 짜리 식사를 한 셈이다. 1,400미터가 넘는 고지에서 한 식사이니 평생 잊지 못할 식사다. 참으로 맛있고 고소하게 배불리 먹고 마셨다. 화려한 주연이 끝나고 오랜만에 도움쇠가 예고한대로 이기형 시인의‘지리산’을 아픈 가슴으로 읊었다.
“지리산”/ 이기형
지리산은 바라보아서는 모른다
관광길 눈요기로는 더욱 모른다
저 큰 가슴팍에 온 몸을 파묻고 통곡해 보라
呼魂(호혼)의 바다속 깊숙이 잠겨보라
이젠 총알도 바닥났다
소금물을 마시며 일주일을 굶다가 또 총소리에 쫒긴다.
산마루를 기어넘고 골짝을 빠졌다.
끝내 육탄을 쏘고 죽고 말았다
동상에 두 다리를 톱으로 잘랐다.
몽당허벅다리와 두 팔 네다리기기로 쫓겨,
천왕봉까지 끝내 승천하고만 꽃봉오리들을 생각해 보라
팔도 턱도 떨어져 나간 총상 자리에서 구더기가 꾀고
40도 재귀열환자가 앓음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 환자트에 이방인의 총구가 디밀어졌을 때
그들이 부른 마지막 만세소리가 들리는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왜, 그 빛나는 삶,
값진 젊음을 끝내 천고의 밀림, 만고의 벼랑에 초개처럼 내던졌는가
진실한 삶이란
민족의 독립이란
역사의 부름이란
자, 명상을 떨치고 가자!
현대사 소용돌이의 한복판, 핏자욱 핏자욱
저기 지리산으로
오지 못 한 산우들은 언젠가 다시 가자. 꼭 가자. 혹시 벽소명월을 볼 수 있을까 하고 밖으로 나오니 칼바람이 부는데 예약을 못 한 산객들은 하늘이 보이는 노천에서 비박을 한다. 그나마 편편한 곳이나 처마 밑에 자리를 잡은 산객들은 나은 편이다. 사람이 많아 처마 밑에서 밀려나 자갈밭 위에 자리잡은 산객들은 매트리스를 깔고 잔다해도 힘들 것이다. 더구나 바람도 세니 안에서 잘 수 있는 우리는 7성급 호텔이라고 한마디씩 한다.
새벽에 달이 뜨는 그믐이라 벽소명월은 없어도 김종화 총장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읊는데, 구름 사이로 조금씩 별이 있으니 시에는 맞는 배경이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힘든 산행이어서 그 날은 잘 잤다. 새벽에 깨니 날은 흐리고 바람은 무척 세다. 지리산의 첫날 산행은 어렵지만 둘째 날은 거리도 가깝고 길이 험하지 않으니 시간도 짧아 훨씬 부담이 덜 하다.
25여년 전의 지리산 종주에서 느꼈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 다만 길은 세석평전의 너른 구릉과 제석봉의 고사목, 황량한 천왕봉을 빼고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바람이 부니 오히려 덥지 않아 좋다. 대피소도 현대식으로 지었으니 옛 모습이 전혀 아니다. 그때는 대피소 신세를 지지 않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샘 근처에서 밥을 지어 먹고 밤이 되면 야영했으니 대피소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다.
8시 30분. 자기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걷는 신 이사를 앞세우고 벽소령대피소 출발. 8시45분 구벽소령 도착. 9시 10분 덕평봉 도착. 9시38분 선비샘 도착. 10시 30분 조망대 도착. 신 이사와 보조를 맞춰가니 발걸음이 가볍다 연하봉과 제석봉, 천왕봉이 멀리 보인다. 사진을 찍는다.
집에 와서 인화하고 보니 너무 멋있어서 컴퓨터의 배경사진으로 바꿨다. 언제 발간할 지는 몰라도 시산지를 발간하면 표지사진으로 좋을 듯 하나 내 머음 뿐이다. 집행부에서 알아서할 일이다. 연하봉과 제석봉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장터목 아래로 하산 코스인 백무동계곡이 보인다.
우리와 일정이 맞지 않아 개인적으로 떠난 나 원장과 통화를 시도해서 혹시 장터목에서 반갑게 조우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통화를 시도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니 그에게서 이미 전화가 와 있었으나 감도가 약해선지 내가 감지하지 못 했다. 통화는 됐으나 오래하지 못 하고 끊긴다.
짐작으로는 법계사까지 차를 타고 올라 천왕봉에 오르고 장터목을 거쳐 중산리계곡으로 내려가는 중이라 시간상 우리와 조우하지 못 하고, 순천에서 회를 먹고 거제도 해금강을 보러 간다는 내용이다. 훗날 위윤환 산우 어부인의 장례식장에서 남해를 갔는데 즐거웠다는 전언이 있었다. 10시 50분. 7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칠선봉에서 사진 촬영. 미래의 사위감 후보(?)인 수의사 정동혁 씨와 기념촬영.
12시 15분. 구릉이 펑퍼짐하게 펼쳐진 세석평전에 도착.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25여 년 전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금은 교목으로서 침엽수인 구상나무가 진달래와 철쭉을 몰아내고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본래의 모습이란다. 도벌을 은폐하기 위하여 도벌꾼들이 불을 질러 구상나무가 사라졌는데 지금은 복원 중이라는 전언이다. 철쭉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진달래만 만발해 있다. 철쭉은 5월 말에 필 예정이란다. 지리산 10경중 하나인 세석철쭉은 옛말이고 바래봉 철쭉이 더 유명하단다.
소찬이나 맛있는 점심을 먹고 대피소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단잠에 취해 송동주 지리산 멸종위기 종 복원센터장의 지리산 및 세석평전의 생태계에 관한 설명의 끝부분만 듣고 이근배 박사의 반달가슴곰에 관한 설명에 대해서는 다행히 자세히 들었다.
그들의 사명감과 책임의식은 감명받을 만하다. 수의사 정종혁 씨를 포함한 그들의 멸종위기종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거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영신봉에서 반달가슴곰 출현장소라는 현수막을 걸 때의 진지함과 정확함에 감동을 받았다. 좌우의 균형과 높낮이까지 정확하고 확실하게 재고서 끈을 매는 그들의 열성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사업이 빠른 시일에 성공하리라 굳게 믿는다.
그런 열성을 가지고 일에 임하면 성공하지 못 할 것이 없다. 다만 국민의 성격 상 뭐든지 ‘빨리 빨리’의 근성 때문에 곰의 한 세대인 10여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정책을 담담하는 행정가들이 과연 단기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박봉과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그런 분들이 있어 산양, 여우, 곰의 종 복원사업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송동주 센터장의 강연내용을 나중에 산우에게 물어보니 종주보다는 부분 등산이 훨씬 의미있는 등산이라는 말을 했단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리산 종주는 산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필수적인 통과의례로 생각한다.
2시 40분.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고 세석대피소 출발. 3시, 촛대봉 도착. 황량한 돌바위들 뿐이다. 세석평전의 전경 및 산우들 기념 촬영. 신 이사가 선두에서 쉬엄쉬엄 가니 뒤따라가는 우리들은 전혀 힘들지 않다. 첫날의 산행도 신 이사를 앞세우고 갔으면 그리 힘들지 않았으리라.
산우들은 산행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 하면서도 산행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산우들의 체력이 좋아지는 증거라 할 수 있다. 8개월을 쉬었던 나와 몸이 불어난 신 이사만 힘들었던 모양이다.
4시 15분, 연하봉 도착. 이정표만 사진을 찍고 급하게 출발한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빗줄기가 굵어진다. 4시 30분, 장터목대피소 도착. 멀리 보이는 장터목대피소도 2002년에 갔는데 그 모습이 아니다. 그때는 작았는데 훨씬 커진 모습이다. 비구름이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데 혼자 보기 아까운 장관이다.
대피소는 이미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산객들로 꽉 차있다. 심지어 화장실 앞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다. 이럴 때 대피소 직원들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 한단다. 과연 윗분들이 알기나 할까.
잠자리를 배정받고 자리를 잡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내일은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비바람이 심해 안에서 물티슈로 몸을 닦았다. 마지막 시 이기형 시인의 ‘춘향의 노래’는 기 회장님이 조촐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읊었다.
“춘향의 노래”/ 이기형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전작 산우의 발렌타인 21년산 위스키를 놓고 한양기 산우와 도움쇠의 무의미한 설전. 술은 없고 아껴 먹자는 나와 지금 먹자는 한양기 산우의 설전. 그도 나도 고집과 주장이 보통 수준이 넘는다는 기 회장님의 말씀에 가슴이 움찍. 참으로 가관이다.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니 비바람이 거세 일출을 볼 수 없으니 제석봉의 고사목이라도 확실하게 보게 차라리 천천히 올라가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더 이상 잘 수 없으니 일찍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5시 20분에 출발. 이재웅 산우가 물을 보충하러 갔다는데 오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다가 나와 그만 늦게 출발. 대피소에 짐을 두고 올라가니 어렵지 않다.
통천문의 계단 아래는 아직도 얼음이 남아있다. 6시 20분, 드디어 목적지인 천왕봉 도착. 남한땅의 최정상이다. 바람이 거세 정상에 서있기 어렵다. 서쪽하늘은 맑으나 동쪽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으니 구름이 터진 사이로 해가 잠시 얼굴을 내민다. 어쨌든 일출로 간주하기로 한다. 3대의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이다. 1대만 공덕을 쌓았기에 그 정도밖에 볼 수 없다는 기 회장님의 재치있는 해석에 모두 웃는다.
내려오면서 고사목을 보니 6년 전에 비하여 많이 쓰러졌으나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한양기 산우는 2개만 남아있다고 했는데 나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랬는지 잘못 들었는지 입맛이 쓰다. 7시 30분에 장터목에 도착. 하산 길은 쉬엄쉬엄 50분 걸렸다. 이재웅 산우는 천왕봉을 내려오면서 감격에 겨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했는데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오를 때 쉽게 오르지 못하던 이유가 감격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이재웅 산우여! 가을에 백담사 - 영시암 - 구곡담계곡 아홉 구비의 물줄기와 12개의 담과 폭포를 지나 -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인 봉정암을 거쳐 - 소청 대피소에 배낭을 맡기고 설악의 정상 대청에 올라 동반시를 낭송하고 소청 대피소나 희운각 대피소에서 하루를 묵고 5시간 코스의 공룡능선을 지나 마등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바위길인 비선대 코스로 내려가지 않고 부드러운 산길인 오세암을 지나 백담사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내려온 후에 죽더라도 죽소. ㅎㅎㅎ
나는 젊은 날 그 코스를 간 적이 있는데 비 맞고 죽을 고생을 했으나 그 코스의 감격을 잊지 못해 평생을 산과 더불어 인생을 즐기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네. 10월의 둘째 일요일이네. 그 전에 십이선녀탕계곡이 복원됐다고 하니 기 회장님, 김 총장과 의논해서 먼저 갔다오세. 선녀들과 노닐다가 오세. 대승령까지 가는 것은 힘드니 두문폭포까지는 하루 일정으로는 참으로 좋네.
국방과학연구소를 다니던 때, 5월에 십이선녀탕을 지나 대승령을 넘어 장수대로 내려온 적이 있는데 마지막 폭포인 두문폭포를 지나 올라가는 길의 반대편 암벽의 황홀경에 100여 명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쩔지 모르겠네. 그것도 보고나서 죽게나.
또 있다. 가을에 주왕산 단풍을 보고 전기 없는 마을의 분교터에서 산채를 안주로 산막걸리도 마시고 오는 길에는 주산지에 들러 물에 잠긴 나무들도 본 후 강구항에서 안주로 게살이 가득 찬 영덕대게를 곁들여 마시는 매실주 한잔이 천국이라네. 늦가을 바람이 부는 내장산과 백양산의 종주도 빼놓을 수 없다네. 지금은 있는지 모르지만 넘어 가면서 마시는 주막집의 농주는 이경식 산우도 자주 이야기하니 맛보러 꼭 가세.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울릉도 성인봉도 갈만 하다는데 나도 아직 못 갔네. 연구소 시절, 연구소 산악회에서 갔는데 나는 출장 때문에 못 갔다. 그때 전산작업 때문에 대전기계창에 출장을 갔는데 일정이 빡빡하여 연휴를 일로 보낸 적이 있다. 그 당시 MIS전산실 담당자들은 내게 두고두고 원망을 들었다. 참, 명산 월출산이 빠졌네. 보름달이 뜨는 날, 오후 늦게 천황사로 올라 도갑사로 가는 종주길에 월출을 볼 수 있는데 천왕봉 월출도 보고 죽게나. 여름달의 음력 보름에 가는 것이 좋다네. 하하하.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8시30분. 백무동을 향하여 하산 시작. 내려오니 11시45분. 옛날에는 4시간이 넘게 걸려 지루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백무동매표소의 위치가 산 쪽으로 많이 올라온 것 같다. 지금은 야영장이 생기고 동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정류장도 생겼다. 세월이 많이 흘러 산객이 많아지니 그곳의 모습도 옛 모습이 아니다.
장터목 부근에는 5월 12일 밤 10시 30분부터 눈이 내려 5월 13일 오후 6시 현재 7센티의 눈이 내렸다고 지리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기상청에 알려왔다. 우리도 일주일만 늦게 종주했으면 5월에 눈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아쉽다 눈이여.
좋은 등정이었다. 옥의 두 가지 티라면 신 이사와 도움쇠가 기 회장님 및 산우들이 직을 걸면서까지 했던 반대를 무시하고 연하천 산장에서 잠을 잔다고 산행을 거부하고 대피소로 들어가서 30분의 꿀 같은 단잠을 자버린 것으로 인해 산행을 30분이나 지연시킨 것인데, 신 이사가 무척 힘들어 했고 나도 잠을 자지 못한데다 산우들의 짐을 덜어준다고 과도하게 짊어지고 가다보니 체력이 바닥났고 힘들어 짐을 던다고 미련하게도 술을 등에서 배 속으로 이동시킨 것이 원인이 되어 산행의 속도가 떨어졌다. 해서하소서.
또 한양기 산우와 도움쇠가 처음부터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는데 마지막 날 백무동의 회식자리에서 관계개선을 요청해왔는데 그때의 답이 시산회도 작지만 조직인데 내가 처음부터 주장한대로 우리의 결정은 합의제라 했으니 기 회장님과 김 총장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자네는 항상 먼저 주장을 하고 그 주장도 극심하게 단정적으로 한다. 그것도 큰 소리로. 자네는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말고 의견을 말하기만 하고 결정은 집행부에서 하면 된다고 했다. 수긍이 갔으면 다시는 그러지 않으면 된다. 8개월간 산우들이 받아 주었는지 습관이 굳어버렸는데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기에 8개월 만에 나온 내가 시작한 것이다.
다만 장터목산장에서 전작 산우의 양주를 먹자는 주장에 반대를 하는 과정에서 자네는 양주라도 한 병 가져온 적이 있느냐고 무안을 준 것과 입산주를 마실 때 막걸리를 한 병이라도 내놓은 적이 있느냐고 한 것은 사과한다. 나도 잘 한 것이 없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 그래도 우리는 전 회장과 총장이었으니 더욱 현집행부에 협조하고 몸과 마음을 낮춰야 한다. 이경식 산우의 블로그에 사진이 올라오지 않는데 내가 찍은 풍경사진을 후에 올릴 테니 후에 내 블로그에 방문하여 구경하시게.
지리산 종주의 의미. 지리산 종주는 젊은이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계획도 시도도 쉽지 않다. 젊은 시절에는 지리산 종주, 설악산 서북주릉 종주, 공룡능선 종주, 대청봉 등정 등이 무슨 벼슬이나 훈장인 줄 알았다. 그것을 명예스럽다고 주변에 자랑했다. 그러나 삼사십대에는 그것을 자랑했음을 조금 부끄러워했다. 이제 오십대에 와서 다시 자랑하고 싶다. 그 자랑은 자신감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어떤 종류의 자신감이든 억만금의 가치가 있으며,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하여 또 다른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가을에는 공룡능선을 종주하자. 5시간 30분이면 된다. 그래서 늙은 우정도 다져보자. 우리 나이에 자랑하는 것은 겸손의 의미를 충분히 알기에 있을 수 있으며, 다른 목적이나 의도는 전혀 없다. 지리산을 종주할 마음을 가지고 시도해서 끝내 이루게 해 준 집행부와 신 이사에게 감사드린다. 수고로우신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의 표시가 전달되면 좋겠다.
위윤환 산우 어부인의 갑작스런 부음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더구나 심근경색이 사인이라니 심장병이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3년 전 동창회 송년회 때 여의도 한강유람선에서 활달하게 율동을 곁들인 노래를 부르고 상품을 타면서 좋아하던 모습이 선하다. 그때 마침 내 앞에 앉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눈에 선하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더라도 무상하고 또 무상하다. 삼가 명복을 빈다. 부디 좋은 곳에서 영면하소서. 우리도 멀지 않아 따라 갑니다. 잠시 먼저 가셨을 따름입니다. 항상 푸짐하고 정성스럽게 싸주셔서 맛나게 먹은 ‘삶은 낙지’는 영원히 맛볼 수 없으나 우리들 마음 속에 즐거웠던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전언에 의하면 김순단 선생께서 싸주신다니 아쉬운 마음이 반은 풀립니다만, 어찌 그 손맛을 잊겠습니까. 무릇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의학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첫째가 배우자와 사별하는 것이고 둘째가 배우자와 이혼이라는데 위윤환 대장은 어렵더라도 빨리 상처에서 벗어나 시산회원들과 더불어 남은 인생이나마 함께 하세. 아무리 위로를 하여도 그대의 마음에 티끌만큼이나 위로가 되겠는가! 위기는 기회의 다른 얼굴이며, 행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모를 자네가 아니지 않는가...
2008년 5월 10일 김정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