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상록수>의 저자이기도 한 심훈(1901~36)의 시 ‘그날이 오면’은 일제 통치의 전 기간을 통틀어 조국 해방에의 의지를 가장 절절한 노래한 시편에 속한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옥살이를 겪고 일시적일망정 상하이로 망명까지 했던 그의 이력은 이 시의 진정성과 절박함을 담보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주제의 선명함을 미학적 고려에 앞세우는 데서도 느낄 수 있는 그 절박함은 역으로 ‘그날’의 요원함에 대한 뼈저린 회한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마침내 그날은 왔다. 심훈이 보지 못한, 아니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이 끝끝내 살아서 보지 못한 그날은 늙은 히로히토의 침통한 항복선언과 함께 문득 현실이 되었다. 심훈과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은 그날을 만난 기쁨에 죽지 못하고, 죽어서야 그날을 맞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그날을 맞이한 이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새로운 가능성과 의욕의 이름이었다.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해온 겨레붙이들로서는 이제야말로 누구의 간섭과 훼방도 받음이 없이 제출물로 근대화라는 역사의 신작로를 활보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상허 이태준(1904~?)의 중편 <해방 전후>는 반성과 희망이 교차하는 민족사의 갈림길을 배경으로 작가 자신의 행적과 사유를 기록한 자전소설이자 보고문학이다. 해방 전과 후에 정확히 절반씩의 분량을 할애한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현’은 일본 관헌의 압력에 못 이겨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의 번역에 손을 빌려준 일을 두고 괴로워하다가 강원도 어느 산읍에 처박혀 낚시질 따위로 세월을 기다린다.
이곳에서 그는 향교의 직원直員으로 있으면서 전통 선비 ‘김직원’을 만나 시국담을 주고받으며 울분을 나누기도 한다. 일제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서는 의견이 일치했던 두 사람은 그러나 막상 해방과 함께 그 적이 사라지자 현격한 견해의 차이를 내비친다.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김직원과 반봉건 근대화론자인 현은 해방 조국의 미래 설계를 놓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새 나라의 국체에 관한 견해 차이는 해방정국 최대의 쟁점이었던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로도 이어진다. 김직원의 완강한 반대 입장을 “비실제적인 환상”으로 치부하면서 신탁통치야말로 “가장 과학적이요 세계사적인 확실한 견해”라고 믿는 현의 생각이 그것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현이 다름 아닌 작가 이태준 자신의 가탁假託임을 상기할 때, 그가 당시 남로당을 필두로 한 좌파의 노선을 좇아 찬탁 쪽에 섰다는 사실은 마땅한 설명을 기다리는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에 카프의 계급문학에 반발해 순수문학 그룹인 구인회를 결성했던 현(이태준)이 해방 직후 좌익 문익단체인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고 이듬해에는 마침내 월북을 택하기까지 이른 것은 또 어찌된 일일까. 그가 물론 궁극적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숙청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소설 속에서 그에 대한 충분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소설 마지막 문단에서 보이는 막연한 희망과 활기가 당시 그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관으로 내려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문학자대회’ 준비로 바쁘고들 있었다.”
이것을 비슷한 무렵에 발표되었고 해방공간이라는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채만식의 단편 <역려>의 마지막 문장들과 비교해 보자. “비는 오고, 다음 차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차를 우리는 음산한 정거장에서 민망히 기다려야 하였다.” 해방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받아 놓고 이태준이 보이는 낙관과 채만식이 내비치는 주저와 회의 사이에는 얼마나 너른 간격이 가로놓여 있는가. 그 두 가지 태도의 차이가 결국 이태준의 월북과 채만식의 낙향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으리라.
<해방 전후>의 전반부에서 현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 숨어든 곳은 경기도 이천군 안협면, 지금은 휴전선 북쪽이다. 이태준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군 산명리 역시 휴전선 너머에 있으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철원군 율이리는 남방한계선 남쪽의 민통선 안에 자리잡고 있다. 상허와 <해방 전후>의 자취를 좇는 여정은 따라서 분단현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해방기를 그린 소설의 무대가 바로 분단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해방이 약속했던 기회와 희망이 거꾸로 분단이라는 위기와 질곡으로 바뀌어 버린 민족사의 역설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휴전선 이남에서 안협과 산명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구철원으로 알려진 민통선 안쪽이다. 옛 철원군 노동당사와 월정리역, 철의 삼각 전망대, 샘통 철새도래지 등이 있는 이 일대는 일반인들로서는 전적관에서 주관하는 안보관광을 신청해야만 둘러볼 수가 있다. 민통선 출입을 관할하는 제5검문소를 지나 불과 100m 정도만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그 유명한 노동당사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전쟁의 이빨에 모질게 할퀴여 뼈대만 남은 이 삼층 건물의 벽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의 사이사이에 Cpt Stephens, 1ST Reese 따위의 미군들 이름이 보이는가 하면, ‘서태지 만세’와 ‘북조선사회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가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당사에서 철새도래지와 옛 철원역 터를 지나 월정리역과 철의 삼각지 전망대에 이르는 길의 좌우로는 철원평야의 광활한 논과 밭이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무너져 내린 가옥과 건물의 흔적이 논과 밭 사이에 숨은 그림처럼 새겨져 있다. 수시로 나타나는 도로봉쇄용 낙석과 지뢰 주의 표지판을 지나쳐 가던 길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가로막히는데, 그곳이 철의 삼각지 전망대와 월정리역이다.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에 눈을 대면 시야 왼편으로 나타나는 백마고지 너머로 <해방 전후>의 무대인 안협이 아련히 보이는 듯도 하다. 군인들의 간헐적인 구호와 대남·대북 방송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가운데 외출을 나온 일단의 병사들이 무리지어 기념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전망대와 역 주변에서는 무력대치의 긴박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어김없는 분단의 현장. 민족의 완전한 해방은 여전히 유예되고 있으며,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