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감리회 조선선교의 산파 헨드릭스 감독
미국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는 비교적 수월했다. 미국 북감리회가 이미 조선에서 선교의 길을 잘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남감리회는 1896년에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李德) 선교사를 조선의 첫 선교사로 파송하여 새로운 선교의 지평을 열었다.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의 첫 발걸음은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의 역할이 컸다. 윤치호는 이미 남감리회 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조선에 남감리회의 선교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미국 남감리회는 조선 선교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이에 중국에 주재했던 리드 선교사가 1896년 5월 28일에 내한하여 선교부 자리를 잡고 집수리를 마무리한 후 상하이로 돌아갔다가 8월 14일에 가족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짐을 풀자 마자 리드는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가 남감리회 중국선교연회에 참석했다. 이 연회는 정식으로 한국지방회를 조직하고 초대 장로사(長老師)를 조선에 파송하는 의안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연회에서 리드 선교사가 조선의 초대 장로사로 임명을 받음으로써 남감리회 조선선교가 정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연회를 주재한 사람이 헨드릭스 감독이다. 그런데 헨드릭스 감독은 단순히 연회에서 리드 선교사를 임명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남감리회가 조선에 선교하게 되는 일을 주도하였다. 리드 선교사가 조선에 처음 입국했을 때 조선에 들어와 선교부 부지 선정 및 기초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상 남감리회 조선 선교는 그의 노력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사실상 그는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에 산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유진 럿셀 헨드릭스(Eugene Russell Hendrix) 감독은 1847년 5월 27일에 부친 아담 헨드릭스(Adam Hendrix)와 모친 이사벨라(Isabella Murray Hendrix)의 아들로 미국 미주리(Missouri)주 파예트(Fayrtt)에서 태어났다. 1871년 앤(Ann Eliza Scarritt Hendrix)과 결혼하여 1873년에 슬하에 에방젤린(Evangeline Hendrix Waring), 1875년에 마리아(Mary Matilda Hendrix Simpson), 1878년에 나단(Nathan Scarritt Hendrix), 1880년에 헬렌(Helen Hendrix Mohr) 등 4남매를 낳았다. 1869년에 뉴욕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1870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후 캔자스(Kansas)주 리본워스, 미주리주 메이턴 세인트, 조셉 등에서 목회했다. 1876년 마빈 감독과 함께 세계 각지 선교지를 순방하였으며 1877년~1878년에는 미주리주 글래스고우에서 목회했다. 1878년 8월에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센트럴 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여 1886년까지 이 직을 수행했다. 1866년 남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에 당선되어 36년간 봉직하면서 남감리회 미국 내 모든 구역을 관할하였다. 멕시코와 동양 및 남아메리카도 관할하였다.
1875년 8월에 남감리회 교인인 윤치호로부터 조선 선교의 요청을 받고 1895년 10월 18일에 리드 선교사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한성에서 선교 개척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때 알렌(Herace Newton Allen) 선교사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났다. 헨드릭스 감독은 스크랜턴 선교사의 도움으로 남송현(南松峴, 현재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서 한옥 와가(瓦家)를 선교부 건물로 매입하고 10월 21일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조선 선교에 계속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1908년 미국 기독교교회연합공의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1916년 미감리회 총회에 참석하여 뉴욕 감독과 함께 미국 남북감리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연설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남북감리교의 합동을 위해 헌신했다. 밴더빌트 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학교를 교회와 엄격한 통제하에 두려고 하는 감독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교육 행정을 펴나갔다. 헨드릭스 감독은 초교파적으로도 널리 활동하였다. 1922년에 그의 아내 앤이 향년 71세로 별세하였고, 헨드릭스 감독은 5년 후 1927년 11월 11일에 캔자스시티 마운틴에서 향년 80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워싱턴 산 묘지에 장사되었다.
남감리회가 조선에 선교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헨드릭스 감독이 산파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7월 25일 조선에는 어처구니없는 전쟁이 발생했다.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 갑신정변 시 망명 또는 유배당했던 개화파 사람들이 돌아와서 김홍집(金弘集)을 내각의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정치, 경제, 군사, 사법제도를 개혁했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연호는 광무(光武)로, 임금을 대왕에서 황제로 격상시켰다. 이것이 갑오경장(甲午更張)이다. 이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윤치호가 가족들과 함께 10년 만에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의 학부협판(學部協辦)에 취임했다. 윤치호는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선교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않았다. 1865년 에모리대학교 총장 캔들러(Warren Akin Candler)와 상해 중서서원 학장 알렌(Young John Allen) 박사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개성에 있는 윤치호의 외숙 이건혁(李建赫)도 선교사 파송을 담은 청원 서신을 상해 리드 박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때 상해 남감리회 소속으로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 지역으로 임명되어 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 기후에 적응치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리드 선교사는 새로운 선교지역을 찾기 위해서 1894년 2월에 산동성(山東省) 지역을 답사해 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다른 교파 선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즈음 1895년 8월 19일, 동양 선교 담당자였던 헨드릭스 감독이 선교 현지를 시찰차 중국에 오자 송도의 이건혁은 재차 헨드릭스 감독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번 중국에 온 김에 조선까지 방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새 선교지를 찾던 상해 선교사들도 헨드릭스 감독에게 조선에 답사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헨드릭스 감독은 1894년 10월 13일에 리드 박사와 함께 한성(漢城)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성에서 1주일 동안 머물면서 윤치호, 아펜젤러 선교사와 미감리회 선교사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마침 미감리회 조선선교회에 참석하여 여러 선교사들의 활발한 선교 상황 보고를 참관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남감리회의 선교 가능성을 예견했다. 헨드릭스 감독은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스크랜턴 선교사의 도움으로 남송현에 선교부 매입하여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의 출발을 알렸다. 그 후 1896년 5월에 리드 박사는 조선에 들어와 집수리하고, 8월에 가족들과 함께 다시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1896년 미국 남감리교 해외선교부 연회에서는 조선 선교를 추인 결의하고 리드 박사를 중국 남감리회 상해 선교연회 조선지방 장로사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1897년 5월 행정체계는 중국연회와 연관을 가지되 사업은 조선선교회로 독립을 시키고 리드 박사를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갱신해 주었다. 리드 박사 다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남감리회 선교사는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상해에서 일하던 콜리어(Charles T. Collyer, 高永福) 목사다. 그는 상해 남감리회 여선교사 스미디(Miss L. Smithy)와 결혼한 후 상해에서 윤치호와 동행하여 1897년 1월 20일에 조선 남감리회 선교사로 한성에 도착했다.
미국 남감리회 조선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조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하게 나타난 은혜의 사건이었다. 남북으로 양분된 미국 감리교회가 조선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는 선교 공동체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었다. 서로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지 않았다. 남북 감리교회는 조선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갈등과 대립보다는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펼쳐나갔다. 헨드릭스 감독은 조선에 머물던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가 남감리회 조선 선교에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李德) 선교사
젊은날의 윤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