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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대표적인 비대칭무기다. 비대칭무기란 가진 쪽과 가지지 않은 쪽의 전투력 차이가 극명하게 커서 가지지 않은 쪽의 전쟁 시 대응이 극히 어려운 무기를 말한다. 비대칭무기에는 핵무기 외에도 생화학무기나 잠수함, 장사정포, 지대지미사일 등도 있다. 그러나 비대칭무기의 대표를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핵무기다.
핵무기가 비대칭무기의 대표적인 이유는 그 폭발에너지가 기존 재래식 폭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수율yield, 즉 폭발에너지는 킬로톤 혹은 메가톤이라는 단위로 표현하는데, 이는 TNT, 즉 트리니트로톨루엔의 질량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즉, 100킬로톤의 핵무기는 TNT 10만 톤을 터뜨렸을 때 발생하는 폭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물론 TNT보다 더 강력한 폭발에너지를 지닌 물질이 없지는 않지만 TNT가 가장 일반적인 폭약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폭발력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나 이는 물리적 힘을 나타내므로 사실 부적절하다.
핵무기는 작동원리에 따라 크게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으로 나뉜다. 수소폭탄은 열핵무기나 핵융합무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원자폭탄보다 수소폭탄의 폭발력이 훨씬 더 크다. 이론적으로 후자의 폭발력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실제로 인류가 터뜨려본 수소폭탄 중 가장 큰 것은 소련이 1961년 10월 과시용으로 터뜨린 차르 봄바Tsar Bomba로 50메가톤이었다. 8미터의 길이와 2.1미터의 지름에 자체 무게가 27톤에 이르는 이 수소폭탄은 9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유리창을 실제로 깨트렸다. 한편, 폭발에너지가 작은 전술핵무기의 경우 작게는 10톤짜리도 존재한다.
핵무기를 갖지 못한 나라가 핵무기를 가진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는 매우 어렵다. 핵무기의 강력한 파괴력은 핵무기를 갖지 못한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급격하게 축소시킨다. 가령, 핵무기가 없는 나라는 핵무기 보유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의 이점을 누리기 어렵다. 선제공격으로 적의 핵무기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수 없거나 혹은 적의 핵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할 방어수단이 없다면 선제공격을 하자마자 핵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그 때문에 핵으로 무장한 적의 위협에 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핵무기 없는 나라가 핵무기 보유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사례가 없지는 않다. 1960~1970년대의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이나, 1980년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그리고 15장에서 나왔던 4차 중동전과 한국전쟁 당시의 미국과 중공의 대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물론, 거기에는 미소 간의 냉전 대립 구조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다. 즉, 베트남에게 핵무기는 없었지만 미국이 베트남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소련이 핵무기로 미국에게 보복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번 장에서는 핵무기가 개입된 전쟁, 쉽게 말해 핵전쟁을 치르기 위한 전략을 살펴보려 한다. 물론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다행스럽게도 핵전쟁은 역사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 외 핵무기 보유국들의 전략은 계속 변화해왔다. 여기서는 미국의 핵전략을 중심으로 그 시대적 변천을 따라가며 설명하도록 하자.
첫 번째의 핵전략은 비대칭적인 선제핵공격이다. 한마디로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던 시절 소련을 포함해 그 어느 나라든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면 핵폭탄으로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사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이 전략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리낌없이 내비쳤고, 이들은 심지어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 이후에도 선제핵공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가령, 한국전쟁 때 국제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을 압박하다 해임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제핵공격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맥아더나 뒤의 17장에 나올 미 전략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보다 더 영향력이 큰 사람이 있었다. 그 인물은 19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지적 괴물 존 폰 노이만이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원자력위원회의 위원과 각종 군사문제의 고문 및 컨설턴트로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이만의 지적 능력은 한마디로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무수히 많은 일화 중 몇 가지만 들자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입학과 졸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스위스의 대학 ETH를 포함해 모든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여섯 살 때 자신의 아버지와 고대 그리스어로 대화를 나눴으며, 무한급수의 계산을 암산으로 할 정도였다. 수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단지 수학에만 그치지 않고 물리학, 컴퓨터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특히, 그는 이 책이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게임이론을 혼자 힘으로 창조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선제핵공격 주장은 앞뒤 잴 줄 모르는 호전적 군인의 허풍이 아니고 논리적인 계산의 결과라서 더욱 으스스했다. 일종의 동적 게임이론이라고 할 만한 그의 논리는 이런 식이었다. 시간이 가면 언젠가는 적이 미국에 필적할 핵무기를 갖게 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면 미국도 함부로 적을 공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랬다가는 적의 핵공격에 의해 미국도 완전히 파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는 지금 아예 선제핵공격으로 싹을 잘라야 한다. 소련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1950년대 초반도 이미 늦기는 했지만 여전히 선제핵공격은 유효하다. 도시 몇 개는 소련의 핵 반격으로 사라지겠지만 질적·양적으로 앞서는 미국의 핵전력으로 여전히 적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에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밝혔다.
“만약 당신이 (소련을) 내일 폭격하자고 한다면, 나는 왜 오늘은 안 되냐고 묻겠어. 만약 당신이 오늘 5시라고 한다면, 나는 왜 1시는 안 되냐고 말하겠어.”
노이만의 이러한 전쟁광적인 모습은 1964년에 개봉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어떻게 나는 걱정을 멈추고 (핵)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의 주인공 스트레인지러브를 연상시킨다. 영화 속에서 스트레인지러브는 나치 독일을 위해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핵무기 개발을 책임진 헝가리인으로 나온다. 노이만 외에도 스트레인지러브의 모델로 여겨지는 사람에는 잠시 뒤에 나올 허만 칸과 나치 독일의 미사일 V2를 개발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 등이 있다. 노이만은 1957년 골수암과 췌장암으로 죽었는데, 신앙의 필요성을 일종의 게임이론적 논리로 설명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처럼 말년에 가톨릭에 귀의했다.
노이만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선제핵공격에 나서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핵무기 사용을 혐오스러워했던 아이젠하워 시절, 즉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의 두 번째 핵전략은 이른바 ‘대량보복’이었다.
대량보복은 개념적으로 아주 단순했다. 미국의 동맹국 누구에게라도 공격이 가해지면 대량의 핵무기로 보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지 소련의 핵공격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동반하지 않은 소련의 재래식 공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개념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대량보복전략은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가장 큰 타격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때 미국의 대량보복전략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대량보복전략은 미국의 동맹국을 지키겠다는 전략이라서 공산권에서 벌어진 일에 무기력했다는 비판은 논점을 벗어난 트집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 기간 동안 미국의 동맹국 중 공산권의 공격을 받은 나라는 없었다. 이는 대량보복의 위협이 전쟁의 억제책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실제적 증거였다. 그러나 미국의 군부는 좀 더 공세적인 교리를 원했다.
한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토머스 셸링은 1960년 핵무기와 핵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셸링의 관점은 1961년 1월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의 재임 시기에 큰 관심을 받았다. 셸링의 관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셸링에 의하면, 핵무기는 처음부터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그런 무기였다. 우선, 백과 흑이 모두 갖지 않으면 두 나라 모두 최선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핵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 모두 지도상에서 사라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한쪽은 갖고 다른 한쪽은 갖지 않으면 가진 쪽은 차선, 가지지 못한 쪽은 최악이라고 할 만했다. 핵무기를 가진 적에 대해 핵무기 없이 대항하기 극히 곤란함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아서다. 마지막으로 둘 다 갖게 되는 경우 막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둘 다 차악에 해당했다. 핵무기 개발한다고 헛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은 사고나 실수로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과 흑 모두에게 우성대안은 없다. 하지만 2개의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미국의 수학자 존 내쉬가 증명한 게임 상황의 한 가지 해)이 존재한다. 내쉬 균형은 백과 흑이 임의의 선택을 한 후, 그 선택으로부터 벗어날 유인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첫 번째 내쉬 균형은 둘 다 핵무기를 갖지 않는 경우다. 가령, 백과 흑이 핵무기를 갖지 않는 선택을 이미 한 상황에서 각각 핵무기를 갖는 새로운 선택을 해봐야 최선에서 차선으로 나빠질 뿐이다. 백과 흑이 합리적이라면 그렇게 할 리가 없으므로 둘 다 핵무기를 갖지 않는 선택의 조합은 다른 선택의 조합으로 바뀌지 않는다. 반면, 두 번째 내쉬 균형은 둘 다 핵무기를 갖는 경우다. 이미 둘 다 핵무기를 갖고 나면 백이든 흑이든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해봐야 차악에서 최악으로 오히려 더 나빠질 뿐이다. 따라서 그런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이와 같은 이해득실을 갖는 상황을 게임이론은 ‘수사슴 사냥’이라고 부른다. 백과 흑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커다란 사냥감인 수사슴을 잡을 수 있지만 각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조그마한 토끼를 잡는 것에 그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미국과 소련은 양자 모두 핵무기를 갖는 선택을 이미 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셸링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핵무기를 단독으로 보유하는 상황이 차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최선으로 잘못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성대안이 있지만 그것을 택하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백과 흑 모두 차악에 그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조합은 유일한 내쉬 균형이기도 해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즉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다. 셸링은 상대방 선택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다른 견해 등으로 인해 ‘수사슴 사냥’이 불행하게도 ‘죄수의 딜레마’로 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셸링의 설명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해설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버린 미소 간의 핵군비경쟁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이러한 비관을 모르지 않았던 셸링은 새로운 핵전략을 제시했다. 미국의 세 번째 핵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ion, 즉 매드MAD의 출현이었다.
매드의 논리는 이렇다. 이미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그것도 아주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므로 하루아침에 이를 다 없애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핵무기의 보유 여부가 아니다. 그렇게 갖고 있는 핵무기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가 문제다. 미국과 소련이 둘 다 핵무기를 쏘지 않는다면 핵무기에 쓴 돈을 제외한 3이라는 이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라도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누가 먼저 사용했건 간에 미국과 소련은 둘 다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상대방의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두 나라 모두 두려워한 나머지 선제공격을 받아도 남은 걸로 상대방을 수차례 이상 파멸시킬 정도의 핵무기를 이미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제핵공격은 무의미한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핵전쟁의 승자는 있을 수 없고, 오직 공멸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미국과 소련은 둘 다 핵공격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상대방을 위협하기는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는 실제로 쏠 리는 없다.
1960년대에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매드의 논리를 즉시 이해했다. 이미 미소 양국에게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졌으므로 이제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상태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었다. 전면핵전쟁을 암시하며 서로를 위협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전쟁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제핵공격은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자살행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인 핵군비 증대는 맥나마라가 보기에 한마디로 미친 돈 낭비였다. 선제핵공격을 받고도 소련을 세 번 이상 파괴시킬 수 있는데 거기서 한 번 더 파괴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것이었다. 또한, 재래식 군비의 증대도 비용 대 효과의 관점에서 불필요하다고 봤다. 어차피 미소 간 전쟁의 억지력은 이미 쌓아놓은 핵무기에 의해 담보되기 때문이었다. 맥나마라는 핵무기 투하의 3인조, 즉 대륙간탄미사일, 전략폭격기, 그리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세 부류 총량을 각각 400메가톤으로 제한했다. 미소 간에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매드는 실제로 잘 작동한 전략이었다.
핵무기 보유국이기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핵전력에는 한참 못 미치는 영국과 프랑스 등은 매드와 다른 전략을 채용했다. 어차피 규모면에서 소련을 쫓아갈 방법은 없으니 대신 소련을 멸망시키지는 못해도 아프게 할 정도는 기필코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재래식 전쟁에서의 스위스군 모델을 핵전쟁에 도입한 것이다. 가령, 영국의 경우,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스크바 하나는 확실하게 파괴할 정도의 핵전력을 유지한다”는 이른바 모스크바 기준이라는 것을 표방했다. 그래서 영국은 선제핵공격에 대해 가장 생존성이 뛰어난 잠수함 발사탄도미사일만 남기고 나머지 핵전력은 모두 포기했다.
그러나 매드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비윤리성이었다. 물론 실제로 사용될 가능성은 전무에 가깝다고는 해도 전쟁이 나면 민간인을 목표로 핵무기를 쏘겠다는 발상이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비합리성이었다. 핵반격을 한다는 얘기는 이미 적의 핵공격이 개시되어 매드의 궁극적 목표인 핵전쟁 억제에 실패했다는 얘기인데 뒤늦게 쏴서 뭐가 달라지느냐는 것이었다. 셋째는 대응의 비유연성이었다. 실제의 제한적 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에 핵전력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매드는 무기력한 전략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지막으로, 매드가 핵무기의 확산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상당히 아팠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은 그사이 비공식적인 핵클럽 국가가 되었다.
결국, 매드에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 공군의 싱크 탱크였던 랜드 코포레이션의RAND Corporation의 허만 칸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캘리포니아 엘에이대학교와 칼텍에서 물리를 공부한 칸은 핵공격 표적선택Nuclear Utilization Target Selection, 즉 넛츠NUTS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넛츠는 한마디로 핵전쟁의 승리라는 개념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넛츠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1) 도시를 목표로 하지 말고 적의 핵전력을 목표로 하며, 2) 핵무기의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높이고, 3) 적의 핵무기를 요격할 수 있는 수단을 갖자는 것이었다. 이들을 통해 적의 위협 수준에 맞춰 적절한 대응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길 수 있는 핵전쟁도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이 세 가지가 달성되면 매드의 작동에 핵심적인 상대방의 보복역량이 현저히 낮아진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정치학으로 박사를 받은 컬럼비아대학교의 로버트 저비스와 같은 매드의 주창자들은 바로 그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매드에 필수적인 충분한 2차적 보복역량의 확보가 불투명해질 것으로 예상되면, 차라리 늦기 전에 지금 선제핵공격을 감행할 유인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넛츠는 매드의 상황을 다시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의 비대칭적인 관계로 만들자는 전략이었다.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드의 주창자와 넛츠의 옹호자 사이의 논쟁은 매우 격렬했다.
기존의 매드에 의존하는 것은 백과 흑 모두에게 차선이다. 공포의 균형에 의해 기분은 찜찜하지만 실제로 양국 간의 전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한편, 한쪽이 매드를 고수할 때 다른 한쪽이 넛츠를 채택하면 넛츠를 채택한 쪽은 전략적 패권을 쥐므로 최선, 매드를 고수한 쪽은 차악이다. 그리고 둘 다 넛츠를 채택하면 영원히 불안정한 신무기 개발 경쟁을 벌이게 되므로 양쪽 모두 최악이다.
백과 흑 모두에게 우성대안은 없는 대신, 2개의 내쉬 균형이 있다. 바로 한쪽만 넛츠를 추구하는 경우다. 즉, 백이 넛츠를 채택하고 흑이 매드를 고수하면 백은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흑도 넛츠를 택하면 최악의 결과다. 이런 상황을 게임이론은 ‘겁쟁이’라고 부른다. 무모한 만용을 겨루려고 두 차가 서로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정면충돌로 죽고 말겠어!’ 하고 겁을 먹은 운전자가 핸들을 꺾어 피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한쪽이 꼬리를 내리면 다행이지만 양쪽 모두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는 결국 둘 다 죽고 만다.
넛츠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았다. 우선, 넛츠가 가정하는 제한핵전쟁이 전면핵전쟁으로 비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또 제한핵전쟁만으로도 파괴의 규모가 충분히 너무나 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비대칭적 우위 획득을 목표로 하는 넛츠는 최선의 시나리오라는 게 무한히 지속되는 군비경쟁이고, 최악은 예방적 전쟁의 성격을 띈 전면핵전쟁의 촉발이었다. 한마디로 넛츠는 국제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전략이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에서 넛츠는 매드를 조금씩 대치했고, 결국 1980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미 카터는 넛츠를 미국의 공식 핵전략으로 받아들였다. 평화주의자였던 카터가 매드를 버리고 넛츠를 택한 것은 사실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카터는 건물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인명만을 주로 살상하는 중성자탄이 그 특징으로 인해 오히려 사용 가능성이 높다면서 자신의 임기 동안 끝내 이의 개발을 승인하지 않을 정도로 윤리적 가치를 중시했다.
카터는 넛츠의 옹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히 닉슨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냈고 카터 때 에너지장관이었던 제임스 슐레진저와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슐레진저는 원자력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관장하는 에너지장관으로서 중성자탄의 개발을 줄기차게 주장했고, 카터가 끝끝내 거부하자 중성자탄의 핵심 부품을 대신 개발시킴으로써 카터를 농락했다. 카터는 매드가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에 특히 괴로워했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무력 사용을 야기하기 쉬운, 하지만 표면적으로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넛츠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알고 보면 매드와 넛츠는 영어로 모두 미쳤다는 뜻이다. 매드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은 노이만으로 선제핵공격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그가 보기에 상호확증파괴는 정신 나간 헛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이 만든 최초의 컴퓨터에 대해 매니악MANIAC, 즉 미치광이라는 이름을 붙인 노이만의 독특한 정신세계 탓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그게 멋있어 보였는지 칸은 노이만을 흉내 내 넛츠라는 말을 억지로 지어냈다. 그게 너무 억지여서 1980년대에는 넛츠를 Nuclear Use Theorie(s)로 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심한 억지다. 한마디로, 핵전쟁이란 이래도 미친 짓이요, 저래도 미친 짓이다.(277~294)
[출처] 전쟁의 경제학
권오상 지음, 플레닛 미디어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