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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기본’이 위태로워진 시대, 국가의 역할은?
지금까지 우리는 최근 경제 정책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해 논했다. 과연 미래는 그 옹호자들이 말하듯 기본소득의 시대가 될 것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기본소득론의 역사를 꽤 상세하게 살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첫째, 기본소득론의 의의와 한계를 좀 더 명확하게 규정했고, 둘째, 단순한 찬반을 넘어서 향후 우리에게 닥칠 경제 문제에 대응할 때 그것의 적절한 위치와 역할이 무엇일지를 제시하고자 했다.
경제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양대 계급,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적대antagonism관계를 중심으로 이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친 바 있고, 20세기 경제학의 거목인 존 케인스는 앞 세기의 토머스 멜서스나 존 홉스John A. Hobson1858-1940을 계승해 자본주의 경제가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레닌과 그 동료들은 두 갈래의 사상을 저마다 다른 정도로 계승하면서 자본주의의 적대적 성격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장했고, 이것이 훗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등으로 발전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기본소득론도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는 하나의 독특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기본소득론은 체제 자체보다는 체제의 작동이 낳는 결과, 곧 대중의 삶의 안정성 교란이라는 문제에 천착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기본을 보장하라!’ 이것만큼 근원적이고도 준엄한 명령이 또 어디 있겠는가. 기본소득론의 문제의식이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특히 빛을 냈던 건 그런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러하 명령은 기본소득의 실현으로써 해소되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이 책에서 우리는 그것이 기본소득론 자체의 결함, 곧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한, 그리고 그 체제의 발달 추이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이고자 애썼다.
기본소득론에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 책에서 줄곧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대중의 삶의 안정성 확보라는 기본소득론의 문제의식을 존중하면서, 기본소득론이 아니라면 그러한 안정성은 어떤 방식으로 보증될 수 있을지를 탐구했다. 이 과정은, 기본소득론의 실패 원인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만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차분한 재검토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분배·소비라는 세 개의 측면으로 구성되며 대부분의 개인은 이 세 영역을 순차적으로 거치면서, 그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제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중의 삶의 안정성 교란이란 곧 ‘생산-분배-소비’ 사이클의 교란과 다름없고, 교란의 원인과 해결책도 저 세 영역 각각에서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기본소득론이란 개인의 삶의 안정성 교란이라는 문제를 분배 영역에서 포착하고 또 해결하고자 하는 하나의 입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은 분배 영역에서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유일한 입장도 아니고, 경제의 문제를 꼭 분배의 영역에서만 해결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배가 아닌 생산이나 소비의 영역에서 기울일 수 있는 노력들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어느 하나의 정책에 ‘올인’하기보다는, 생산·분배·소비를 가로질러 경제 전체의 메커니즘을 시야에 두고서 대중의 삶의 안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공공 정책들의 적절한 조합을 고민하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는 8장에서 개인의 경제적 재생산에 어떤 자원이 쓰이는지를 살펴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 자신이 생산 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거두는 소득이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이나 회사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금전적·비금전적 지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제적 재생산과 안전 확보에서 가족과 회사의 비중은 줄어드는 대신에 국가의 역할이 충분하지는 않을지라도 점진적으로 커져왔다. 국가의 역할은 크게 분배 영역에서 세금의 징수와 공적이전소득의 지금, 소비 영역에서 공적재화와 서비스 제공 등으로 나뉜다. 따라서 우리는 한 개인이 경제적으로 재생산될 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그가 생산활동 참여의 결과로 벌어들이는 시장소득(A), 국가로부터 받는 공적이전소득(B), 역시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각종 공적재화와 서비스(C) 등 세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셋은 생산·분배·소비라는 경제의 세 영역에 대응하며, 개인의 삶의 물적 안정성이란 결국 이 셋의 총합과 구성 비율의 안정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222-226)
기본소득과 사이비-기복소득: ‘보편적 수당’의 전망
지금까지 우리는 기본소득론을 다각도에서 비판했고 그것의 장래도 그리 밝지 않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실이 늘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며, 현실을 구성하는 세력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혹시 기본소득이 힘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이 일반화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구별해둘 것이 있다. 정액의 급부를 모든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이야말로 기본소득론의 핵심이며, 이런 특성은 기본소득론이 징발 대상으로 삼는 자원의 성격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토지나 플랫폼에서 유래하는 소득이 그런 자원이다. 이를 공동체가 거둬들여 그 본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게 기본소득론의 본질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이름으로 행해지더라도 그 재원이 지대나 플랫폼 수익 따위가 아니라 일반 소득세나 기타 조세인 경우엔, 그것은 더 이상 기본소득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지대를 걷어 모두에게 지급하는 월 100만 원’과 ‘현대에 와서 발달한 재분배 개념에 입각해, 소득수준에 따라 누진적으로 거둬들인 세금을 재원으로 모두에게 지급하는 월 100만 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고려되고 있는 모든 수당−각종의 ‘유사-기본소득’도 포함하여−은 후자의 성격을 가지며, 이는 오로지 현대에 와서야 인간의 기본권의 일부로 자리 잡은 소득재분배 및 경제적 안전 보장의 일환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으로, 기본소득과는 무관한 정책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소득과 보편적 급부를 분리해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고 모두가 기본소득은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정책화되었거나 정책화 앞 단계까지 와 있는 특정 연령대의 시민에게만 제공되는 보편적 성격의 수당(예: 아동수당, 청년수당), 또는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설계된 (월 200만 원이나 300만 원이 아니라) 10만 원 또는 20만 원의 보편적 수당 등을 떠올려보라. 기본소득은 그저 보편적 급부의 한 형태일 뿐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이런 정책들은 그저 기본소득의 ‘마중물’로만 보일 것이다.
이것들이 기본소득이 아닌 것은 단순히 액수가 적거나 지급 대상이 제한되어 있어서는 아니다. 위 수당들은, ‘원래 그들의 몫을 그들에게 되돌려준다’라는 기본소득의 이념을 조금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여 앞으로 ‘모든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정액의 현금을 지금하는 정책’이 시행된다고 해도, 그것은 오늘날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기본소득은 아닐 것이다. 아동수당이 그런 예다. 아동수당이란 정부에 의해 만 8세 미만의 아동에게 월 10만 원씩 지급되는 돈으로, 이 제도는 국회의 의결을 거쳐 2018년 9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애초 아동수당은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등 보수 성향 정당의 주장에 따라 소득 상위 10%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국회 안팎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끝에 소득·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아동수당은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정액 급부라는 점에서−비록 특정 연령대만을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기본소득 성격을 갖는 정책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아동수당은 기본소득과 전혀 관계가 없다. 정책의 대상 연령대가 제한되어서가 아니다. 이 수당은 ‘본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라는 취지를 담고 있지 않아서다. 아동수당의 취지는 소득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모든 아동에게 적절한 생존조건을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보편 지급’이라는 형식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아동수당의 지급 대상을 넓히는 과정에서 ‘소득 상위 10%를 걸러내는 행정비용이 그 10%에게 지급할 아동수당 총액보다 크다’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성격의 논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이 말은, 향후 아동수당의 월 지급액이 상향되거나 각종 제도 환경의 개선에 따라 소득 파악 및 선별 지급을 위한 행정비용이 줄어들면, 얼마든지 아동수당은 선별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듯, ‘보편성’이란 지극히 기술적인 견지에서 채택되거나 채택되지 않을 수 있는 급부 지급의 형식일 뿐이다.
또한 상상해보라.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극단화해 인공지능을 탑재한 거대한 기계장치가 지금까지 인간이 수행해온 온갖 유용한 역할을 빼앗아간 세상을. 자본주의는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인간의 가치를, 그리하여 인간관계를 정의하는 체제다. 그런데 기계가 생산을 지배하는 저 미래엔 그런 기준이 적용될 수 없다. 이제 인간관계는 경제적 성과로 규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자본주의 이전의 신분제 사회와도 같을 것이다. 여기선 대부분의 인간은 노에와 같은 상태로 전락할 수 있으며, 일부 선택받은 자들이 내려주는 ‘만나’ 같은 것으로 근근이 굴종적인 삶을 유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기업화된 양계장의 닭장 속 닭에게 제공되는 모이와도 같을 그 ‘만나’가 기본소득론자들이 그토록 옹호하는 기본소득은 아닐 것이다.
다시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현대적인 재분배 개념에 입각해서도 보편적 성격의 급부 정책을 얼마든 설계할 수 있지만, 이것이 거기에 드는 재원을 출연할 부자들의 환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얼마씩을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임금으로 대표되는 시장소득이 줄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임금 인하는 애초 자본가를 포함한 자산가들의 이익을 위해 추구되었을 것인데, 이제 임금이 지나치게 인하된 결과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정액의 소득을 보전해준다고 하면, 저 자본가·자산가들은 차라리 임금 인상을 선호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이 내는 돈으로 노동자들을 돕는 것이라면, 국가를 통해 주는 것보다는 직접 주는 것이 여러모로 자신에게 유리할테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보편적 수당은 현실에서 실행되더라도 소액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226-230)
기본소득이 촉발하는 독특한 순환
지금까지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은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재원 문제다. 이 중요한 주제를 건너뛰다시피 한 까닭은 그것이 지나치게 기술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행한 비판을 통해 독자들 스스로 기본소득론이 내놓는 재원 마련책에 대해 판단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니 몇 가지 포인트는 짚어보는 게 좋겠다.
기본소득의 실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든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공포스럽게 다가가기도 한다. 특히 그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할 부자들에게 기본소득은 피하고 싶은 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부자들도 적지 않다. 전기차 회사 테스라의 대표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대표적이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것일까? 그의 기본소득 옹호를 그가 행하는 많은 ‘기행’ 중 하나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머스크의 기본소득 지지는 그와 같은 자본가로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경제란 흐름이자 순환이다. 기본소득은 만약 그것이 실현될 경우 경제에 소득과 자원의 독특한 순환을 만들어 낼 것이다. 4차 산업혁명 때문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대중의 소득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해보자. 소득이 줄면 사람도 살기 힘들지만 기업도 크게 타격을 받는다. 인공지능 기계를 이용해 물건을 아무리 값싸게 만들어도, 이를 구매할 여력이 소비 대중에게 없다면 기업은 존속할 수 없다. 이때 정부가 지대를 걷어 모든 개인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어떨까? 여력이 생긴 개인들은 소비를 늘릴 것이며, 일단 이것만으로도 기본소득은 자본가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소득 지급→소비증대→기업 이윤 증가’의 순환은, 사실은 지대 수입을 얻는 자산계급으로부터 자본가에게로 소득 이전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자본가가 이것을 마다하겠는가? 물론 지대 소득자뿐 아니라 자본가도 기본소득 재원을 부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만약 소비가 모든 상품에 대해 균등하게 늘지 않고 특정 상품들을 중심으로 늘어난다면, 머스크와 같은 첨단 소비재를 생산하는 자본가는 여전히 ‘승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기본소득은 결과적으로 자산소득자와 다른 자본가들로부터 첨단 독점자본가로 소득의 이전을 가능케 하는 ‘파이프라인’같은 것이 된다.
이렇게 기본소득이 촉발하는 경제의 순환에 주목하면, 다른 흥미로운 통찰들을 더 얻을 수 있다. 하나만 더 소개해보자. 옹호자들은 토지·자연, 빅데이터, 플랫폼 등에서 창출되는 수익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고자 하는데, 최근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 고조에 따라 환경세(탄소세)를 많이 걷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전망도 더 밝아지고 있다. 그런데 환경세라는 게 뭔가? 모름지기 환경세란 반환경적으로 생산하는 기업, 그리고 그런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대한 징벌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걷은 환경세는 그들이 더럽힌 환경을 개선하고 기후변화의 추세를 반전시키는 데 쓰는 게 순리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돈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면 어떨까? 그 돈의 일부는 위의 반환경적으로 생산된 상품들을 구매하는 데 쓰일 것이다. 말하자면, 환경세가 결과적으로 기존의 반환경적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봉사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기본소득론이 지향하는 미래일까?
요컨대, 기본소득은 그 시행에 막대한 자금이 들기 때문에 그 비용을 직접 부담할 부자들로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는 정책인 것도 같지만, 그것이 촉발할 경제의 순환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얘기다. 기본소득을 필요하게 만든 임금 저하와 소득 양극화는 일부 가난한 사람들만 힘들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경제의 전반적인 수요 감퇴를 가져와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체제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기본소득의 시행은 필수적인 소비조차 하지 못하는 대중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파국적인 공멸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일까? 독점자본가와 반환경적 기업에까지 친화적인 기본소득? 기본소득론의 보수성은 여기서도 다시금 확인된다.(230-233)
국가의 역할 재검토: 생산의 정치 복원을 위하여
기본소득이 지닌 문제의식(삶의 안정성 복원)은 기본소득론만의 것이 아니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여러 제안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국가가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7장과 8장에서 생산·분배·소비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자본주의 경제의 얼개를 그린 뒤, 전통적인 복지국가가 경제의 불균형을 주로 소비 영역에서 바로잡고자 한 데 반해 기본소득을 포함한 최근 제안들은 주로 분배 영역에서 삶의 안정성을 복원하고자 한다고 논한 바 있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이 두 영역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국가란 개인과 같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일정 정도는 현실의 조건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국가는 결과의 시정뿐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도 일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생산에 대한 개입을 의미한다. 개인의 경제적 재생산 및 안전 보장을 위한 세 자원, 곧 시장소득(A), 공적이전소득(B), 공적소비(C) 가운데 국가의 역할(B+C)이 더 크게 요구되는 까닭은 A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왜 감소했는가? 보통 기술혁신, 세계화, 일자리의 비정규직화, 노조 약화 등이 원인으로 꼽히는데, 이들은 모두 생산 영역에서 벌어진 변화들이다. 따라서 국가가 생산에 개입해 개인과 경제 전체의 재생산을 적절히 매개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분배 왜곡의 원인 자체를 일정하게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분배 및 소비 영역에서 국가에 요구되는 역할도 더 가벼워질 것이다.
흔히 생산은 순전히 민간 주체들만의 자율적인 영역인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현대 경제에서 국가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국가는 사기업이 담당할 수도 있는 생산 활동을 직접 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고용주다. 중앙과 지방의 정부, 그리고 다양한 영역의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한 나라의 전체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직간접적으로 고용하고 있으며, 여기서 결정된 임금이나 기타 근로조건은 민간 부문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고용이나 노동과정과 관련된 다양한 규제를 통해서도 생산(과 그 직접적 결과로서의 분배)에 개입하는 것(근로기준법, 죄저임금제 등) 또한 국가 고유의 일상적인 기능이다. 끝으로, 다양한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는 현대의 국가는 기업에 아주 특수한 ‘고객’(일종의 수요독점자)이기도 하다.
국가가 생산에 대한 개입을 강화한다는 것은 이상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2022년 현재 국가의 생산 개입 강화의 여지는 다방면에서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첫째, 고용주로서 국가는 고용을 더 늘릴 수 있는데, 이것의 가능성과 필연성은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보면 곧장 드러난다. 그런데 이것이 꼭 없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일 필요는 없다. 현재 광범위하게 민간에 위탁 중인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운용하는 것도 공공 부문의 일자리를 늘리는 좋은 방식이다. 이를 통해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질이 높아진다면 공공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이를 위해 사회서비스원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아쉽게도 그 온전한 실현은 다음 정권의 과제로 넘겨졌다. 이렇게 해서 공공 부문의 고용 비중이 커지면 이 부문의 공정한 고용 관행을 민간에 전파하는 것도 용이해질 것이다. 둘째, 사업자로서 국가는 전략적 산업을 직접 육성하거나 경제 전반을 디자인하는 ‘산업 정책’을 통해 민간 부문을 규율할 수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간 내내 국가의 이러한 역할은 크게 축소된 게 사실이지만, 코로나19 이후 세계경제의 선도국들(미국, 중국, 독일 등)은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다시금 부활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2031년까지 총 4조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계획을 담고 있는 미국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이나 2025년까지 220조 원의 재정 투입을 포함하는 우리의 ‘한국판 뉴딜’ 같은 정책 패키지가 그런 예인데, 현재 우리의 경우 정권 교체에 따라 ‘한국판 뉴딜’의 향방은 다소 불투명한 상태다. 셋째, 민간 부문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대량 구매자로서 국가는 기업에 일정한 생산조건(고용, 환경 등)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는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라는 격랑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 기업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공급조달에 참여하는 업체에 대해 비정규직 처우와 사용정도, 근로시간의 운용 방식,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 장애인 고용 현황, 탄소 배출 등에 대하여 일정한 기준 준수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곧 국가가 생산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기업들이 ESG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기업 성과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끝으로, 규제자로서 국가는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 부문(플랫폼 등),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노동과 관련된 규제를 선제적으로 마련함으로써 민간 부문의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가 규제자로서의 역할에 소극적인 결과, 최근 국내에서 ‘타다’나 각종 배달앱 관련 논란들이 불필요하게 길어지고 나아가 일부 유망 기업이 문을 닫는 일까지 벌어진 것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생산 영역에서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은 A의 감소가 필연이 아님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일자리와 시장소득의 감소에 대한 암울한 전망은 과거 세 차례의 산업혁명에서도 늘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매번 새로운 수요 창출이나 근로시간 감축 및 근로조건 개선 등으로 A는 외려 커져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국가 혼자만의 힘으로 발생한 건 아니다. 국가가 개입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생산의 주인공은 민간의 주체들(기업과 노동자)이고, 현재의 문제는 민간의 한 축(노동)이 너무 약해진 나머지 민간의 힘만으로는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기 어려운 현실이다. 따라서 당분간은 국가의 생산 개입의 목적은 노동 쪽의 힘을 강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 적절히 견제하면서 상호이익을 증진하는 ‘생산의 정치’의 복원을 돕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역할이다.(233-237)
맺음말: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다
오늘 한국에서 국가는 경제적 안전의 제공자로서, 그리고 경제의 전체적인 조율자로서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역할은 분배와 소비, 그리고 생산을 가로질러, 그러니까 경제 전반을 아우른다. 이러한 국가는 어떤 국가일까? 여기서 사회주의나 독재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단의 아픔과 군사독재의 폭압을 모두 겪은 우리로서는 둘 다 걱정스러운 대안일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없을까? 이 대목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보면 좋을 것 같다.
흔히 오늘날의 체제를 일컬어 정치적으로는 ‘1인 1표’의 민주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1원 1표’의 금권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영역에서 국가가 큰 역할을 하는 현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본문에서 국가의 경제적 역할 정도를 나타내는 국민부담률이라는 지표를 소개한 바 있다.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몇몇 선진국들에서는 이 지표가 50%에 육박하는데, 이는 한 나라 GDP의 절반가량이 세금으로 걷혀서 국가에 의해 처분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서 얼마의 세금을 걷을 것인가? 거둬들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결부되지만, 이것들은 모두 공공 정책의 이슈로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공적 장에서 민주적으로 결정된다. 하나의 국민경제가 1년간 생산하는 양의 절반−우리나라는 4분의 1 정도−이 ‘1원 1표’가 아니라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처분된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앞 절에서 국가는 생산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국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생산자이자 고용주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현재 공공 부문(=정부+공공기관)에는 276.6만 개의 일자리가 있는데, 이는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인력 규모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최저 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속한 위원회에서 매년 최저임금이 결정되면 이에 따라 약 400만 명(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기준)의 노동자의 임금이 인상되어야 하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노동자 임금도 ‘밑바닥’ 상승에 따라 얼마간 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전체 임금노동자(약 2,100만 명)의 절반 정도의 임금은 정부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직접 영향을 받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은 임금의 결정이 노사 자율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통념과 대비된다. 나아가 플랫폼 산업·노동에 대한 규제 체계의 마련, 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은 법률의 제정과 집행, 공공 부문에서 ESG 가치의 구현 방식 결정,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기업의 행위와 경제 전반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결정들 또한 오늘의 한국에서는 공적 사안으로 등장한다.
이쯤 되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며, 외려 ‘경제’ 그 자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어 경제적 민주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제적 민주주의는 거꾸로 대체로 형식에 그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화하는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민주주의란 단순히 경제와 관련된 사안들이 공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란 작업장에서 자본가·경영진과 노동자 간의 민주적 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입각한 작업장·기업 사안의 공동의사결정을 의미했다. 물론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그러한 민주적 관계는 요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 부쩍 커짐에 따라 경제의 공적 성격에 대한 대중의 각성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이니, 그것이 민간 영역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기대해봄직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제에 ‘민주적 통제’라는 고삐를 씌우는 일일 것이다. 이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의 폐해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속화하기 위해 공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도 더 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본소득 같은 보편적 성격의 급부가 인민의 삶을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정책 수단들도 확보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237-240)
[출처] 기본소득, − 공상 혹은 환상
김공회 지음, 오월의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