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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2017. 5. 28(주일낮예배) 창세기 37:5-11
JTBC에서 방송하는 말하는대로(大路)에 조승연작가가 강연하였다.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승연작가가 강의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역사를 좋아했던 조승연씨는 18-19C 가발을 쓰고 하는 그 펜싱이 배우고 싶어졌다. 그래서 연세 많은 선생님을 찾아가서 펜싱을 배웠는데, 그때 조승연작가가 배운 것이 채점방법이었다. 우리가 펜싱경기를 보면 서로 자세를 취하였다가 한순간에 상대편을 향하여 칼을 찌른다. 그리고 난 후 둘 다 이겼다고 손을 드는데, 사실 우리는 누가 이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겼다고 손을 드는 선수가 아니라, 스코링보드(채점판)이다. 스코링보드에 파랑불이 들어오면 이긴 것이고, 빨간불이 들어오면 진 것이다. 이렇게 펜싱은 채점판을 보고 승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노선생님은 전자스코링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승연작가가 선생님에게 그러면 어떻게 승부를 알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펜싱은 너무 빨라서 찌른 사람도 똑바로 알 수 없지만,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찔린 사람이다. 그래서 축구에서는 골인을 넣으면 골~ 하고 두 손을 든다. 마찬가지로 펜싱에서도 경기 중에 투셰(Touché)하고 손을 든다. 그런데 이 투셰라는 말은 찔렀다가 아니라, 찔렸다이다. 찔린 사람이 내가 졌다는 것을 손을 들고 투셰 라고 싸인을 해서 채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펜싱은 무예이다. 그러므로 경기에서 이기기 위하여 펜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집에 나쁜 사람이 들어왔을 때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펜싱을 한다. 그런데 내가 졌다는 투셰를 말하지 않으면 무공이 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투세를 말하지 않은 그 사람이 손해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18-19세기 펜싱은 자기의 실수와 패배를 인정하므로 성숙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조승연작가가 펜싱이야기를 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력이 아니라, 스펙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여지는 승리만 집착한 이 시대는 실력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실력없는 스펙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손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는 없는가? 사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에 간증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 변화되는 삶의 과정은 없고, 예수 믿어서 병이 낫고, 사업이 성공하였다는 스펙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병이 낫고, 또 사업이 번창해지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마치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옳은 신앙생활의 모습인가? 사도바울의 인생을 둘로 나누라고 한다면 다메섹도상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을 기준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바울은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빌 3:5)이었다. 그랬던 바울은 예루살렘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그치지 않고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하여 혈기가 등등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에게 핍박받는 인생이 되었다. 그래서 다메섹에서 광주리에 달려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고, 1차전도여행만 살펴보아도 바울은 비시디아안디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이고니온에서는 도망하였고, 그리고 루스드라에 도착한 바울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쳐주었다. 그랬더니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들이 소와 화환을 들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섬기려 하는 것이었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순간 바울은 루스드라의 신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의 충동에 한순간 변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죽었는줄 알고 성밖에 던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사역이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권세와 형통은 사라지고,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끊임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27장에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나온다.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사냥을 나간 사이에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님 에서를 피하여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사는 동안에 야곱은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와 싸우는 삶을 살았고, 또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할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삼촌은 야곱의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어서 야곱을 더 힘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삶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삶은 고난과 아픔의 삶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에서의 고난에 대하여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리고 창세기 36장에 에서의 족보를 기록하는데, 우리는 그 족보를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야곱의 족보는 고작 4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의 이름이 전부이다. 이렇게 야곱의 족보는 초라하다할 정도로 간략한데 에서의 족보는 달랐다. 창세기 36장 1절-43절까지 한 장 전체를 다 사용하고 있고, 거기에는 에서의 후손이 에돔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갔다는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가 복받은 인생인가? 어릴 때 의료선교사가 되는 꿈을 가진 린다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14살에 세균성내막염에 걸려서 2주동안 실신해 있었는데, 그 후 시력도 약해졌고, 또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린다는 평생 병원에서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런 린다가 하나님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할 때 첫 번째 고백은 감사였다.
하나님 어렸을 때 의료선교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응답하여 주어서 감사합니다.
세균성내막염에 걸려 시력도 약해졌고,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하는 린다는 어릴 때 의료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린다의 이 감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의료선교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여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료선교의 최종목적은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린다는 자신이 의사가 되어서 환자를 고칠 수는 없지만, 아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균성 내막염에 걸려 평생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린다의 꿈은 이루어진 것인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린다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병든 사람을 고치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되어서 가난한 자를 돕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그 기도의 중심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자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꿈이야기이다. 요셉은 형제들과 같이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자신이 묶은 곡식단에 형제들이 묶은 곡식단이 절하는 꿈을 꾸었다. 이 놀라운 꿈을 꾼 요셉들에게 형님들에게 자기 꿈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는 꿈을 꾼 요셉은 형님들은 들으시오 하면서 다시 형님들을 불러서 꿈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때 형님들은 시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요셉의 꿈에 형님들이 시기하였겠는가? 만약 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우리 교회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서 예배당이 가득차고 바깥에 줄을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3부 예배를 드릴테니 한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자 바깥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백화점 특별세일을 하면 문밖에 서서 기다리다가 뛰어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앞자리에 앉으려고 뛰어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에게 또 설교를 하는 것이다.
만약 제가 이런 꿈을 꾸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뭐라고 말씀하겠는가? 어떤 분은 목사님이 교회 부흥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꿈을 저렇게 꾸었어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 야망이 있는 분이야! 라고 말씀을 하실 것이다.
그러면 요셉의 꿈이야기를 듣고는 뭐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똑같은 방법으로 해몽을 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을 할만큼 아주 높은 사람이 되려는 야망이 꿈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형님들이 요셉의 꿈이야기를 듣고 해몽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형님들은 요셉의 꿈이야기를 듣고 시기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 꿈을 주신 목적이 요셉의 성공이 아니었다. 요셉의 꿈은 창세기 36장인 에서의 족보와 연관되어져 있다. 아버지 이삭 축복을 받은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여 고생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축복도 받지 못한 에서는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에 정착하여 부요한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는 사람이 더 복되게 살아가는 이 현실을 보면서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 무엇인가? 우리는 형통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두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최고의 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셉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꿈을 꾼 요셉은 양치는 형님들을 찾아간다. 그때 형님들은 요셉이 멀리에서 오는 것을 보며 서로 말하기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자(창 37:19-20)고 하면서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그리고 형님들은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에게 요셉을 팔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또 보디발 아내의 유혹으로 인하여 당시 정치범이나 고위관료가 범죄하면 갇히는 시위대뜰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끝을 맺지 않는다. 이렇게 시위대뜰에 갇혔을 때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왕의 꿈을 해몽하여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꿈을 해몽한 것처럼 7년동안 애굽과 가나안지역에 풍년이 든 후에 7년의 극심한 흉년이 왔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에 왔다가 결국 요셉이 살아있음을 보고 그 가족이 모두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37-46장(9장)까지의 이야기이다. 창세기를 문단나누기를 한다면 11개의 톨레도트(계보)로 구분한다. 그래서 데라의 톨로도트라고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그런데 톨레도트로 구분할 때 11:27-25:11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창세기 25:19-35:29이 야곱에 대한 이야기이고 창세기 37:1-50:26이 요셉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대략 아브라함 이야기 14장, 야곱 이야기는 10장, 요셉의 이야기는 13장에 걸쳐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그 13장중에서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무려 9장이나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양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가?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횃불언약이 나온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이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동안 그들을 섬길 것이다고 하였다.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동안 그들을 섬기고 그 후에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되는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을 하나님이 중요하게 다루시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또 그 꿈을 이루시므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얼마나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고, 또 하나님이 그 말씀을 성취하여 주심으로 나는 하나님의 그 일에 작은 도구로 쓰임받으며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는가? 인터파크가 기혼 남녀 8,559명을 대상으로 남편 대 아내 부부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 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남성의 56%, 여성의 52%가 승자를 아내로 꼽았다. 또 여성의 36%, 남성의 28%는 무승부로 끝난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아내와 싸움하는 남편들의 84%는 당연히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남편이 아내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내가 너무 덧세어서 도무지 못이긴다고 말하는 남편도 있고, 또 아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져주는 남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 삶에 평안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두렵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사실 요셉은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또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 속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꿈을 성취하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때로는 어렵고 힘들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기쁘고 형통한 날도 있지만, 그러한 날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성취되어지는 그 과정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암스트롱은 본국으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인간에게는 작은 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입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지구와 중력이 다른 달표면에 도착한 암스트롱은 그곳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이상한 첫걸음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걸음을 걷는 암스트롱은 한 개인에게는 작은 걸음에 불과하지만, 이 걸음은 인류 역사에 커다란 도약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한걸음 내딛을 때 그것이 나 개인에게는 한걸음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첫걸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또 주의 백성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놀라운 첫걸음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의 삶이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져 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힘과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사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