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선조유적지 - 진주 마진의 마호당과 주화당 석류재 |
마호당(磨湖堂) 소재지 :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592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06호) 조선숙종 갑오년(1714)에 이덕관이 처음으로 지어 13대에 걸쳐 종택으로 이어오면서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다. 안채는 3량 팔작지붕에 전후퇴간이 설치되고 사랑채는 들어열 개 분합문과 계자난간을 설치 누마루형태이다. 마호당(磨湖堂)은 소암공(素菴公, 諱 德寬)이 지은 서당이다. 공은 숙종 무진년(1688) 5월 18일에 태어나서 영조 정축년(1757) 5월 3일 별세하였다. 소암공은 태어난지 4일만에 어머니(靈山辛氏)를 여의고 자랐으나 풍의(風儀)가 준정(峻整=점잔하면서 정돈됨)하고 기량이 굉위(宏偉)하여 20세에 이미 호사(豪士=호걸스러운 선비)의 칭이 있었다. 1728년에 역도(逆徒)들에 의해 숲속으로 끌려가 적복입은 기병에 잡혀 갔을적에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말하기를" 하늘이 밝게 살피고 있으니 나는 마땅히 좋게 돌아갈 것이다" 하고 후에 과연 석방되었다. 제산(霽山)선생 김성탁(金聖鐸)이 광양의 유배지에서 상(喪)을 당했을적에 광양으로부터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거슬러 돌아오면서 강 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자금을 후하게 하고 수호하여 안동의 천전으로 돌아가게 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맥주(麥舟)의 고사에 견주었다 라고 진양지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검소함을 돈상(敦尙=늘 돈독히 함)하고 화려함을 일삼지 않으므로 호를 소암(素菴)이라 하며, 제가(齊家)에 법도가 있고 효우는 독실하여 사친(事親)에는 반드시 진수(珍羞)가 있었으며, 빈객(賓客)을 만류(挽留)하고 재물은 휼륭한 곳에 베풀어 가난한 사람을 구하였다. 오연 김면운(梧淵 金冕運, 1775-1839)이 행장을 짓고 학서 유태좌(鶴棲 柳台佐, 1763-1837)가 묘갈명을 지었다. * 소암공의 조부는 수사공(秀士公, 휘 重裀)으로서 배위는 백암 김대명의 증손녀이다. 백암선생은 울산김씨로서 선조때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후 서장관으로 중국에가서 황제로부터 받은 벼루와 병풍이 전하여 오는데 그중 병풍은 수사공이 물러받아 현재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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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 마호당의 안채) |
주화당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마진 한말의 영남 유학자 면우 곽종석이 기록하기를 마진의 재령이씨 처사 휘 정모(廷模)공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책을 읽고 뜻을 궁구할때도 오직 일신을 반성하여 요체를 터득함에 힘썼으며 혹 사장(詞章)이나 과문(科文)으로 권하면 즐겨하지 않았다. 내행(內行)에 돈독하여 부모를 봉양하되 뜻으로 하였으며 형을 공경하고 어른을 받들며 규문(閨門)을 다스리고 자질(子姪)을 훈계하며 종족을 돌봄에 모두 은례(恩禮)를 곡진히 하여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군자로써 근본에 수양하며 담연히 밖으로 구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처사공의 행적에 내형인 판서 정헌공(定憲公 李源祚, 1792-1871)이 문미(門楣)에 주화헌이라 제목(題目)하였는데 헌(軒)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여러 자손들이 추념하여 1920년에 새로운 집 한채를 지어 옛 편액을 걸었다. 공의 손자가 매당공(梅堂公, 휘 壽安)이며 3대에 걸쳐 문집을 남긴 마진의 유학자 집안이다. * 삼대란 매당공(梅堂公, 휘 壽安) -정산공(晶山公, 휘 鉉德) - 굴천공(窟川公, 휘 一海) 세분을 말한다. |
| 석류재(錫類齋)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마진 마진 호군공(護軍公, 휘 重福)의 아들은 제헌공(霽軒公, 휘 蘅)이며 손자는 도와공(道窩公, 諱 德潤)으로 효(孝)로서 세상에 알려졌고 영조대에 죽오처사(竹塢處士) 휘 재간(再觀)이 있었으니 도와공의 손자이시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이미 가까운 친척이 없어 외롭게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효도가 독실하여 종신토록 고침이 없었고 또 상을 당해서는 더욱 아들키운 고생을 생각하여 애훼(哀毁)함이 극에 달하였으며 또한 기우(氣宇)가 준걸하여 처음부터 앗을 수 없는 지조를 가졌고 인근 고을에 시혜하여 그 베푼 은혜는 지금도 적송(籍頌)하고 있다. 공의 현손 삼우당처사(三愚堂處士, 諱 壽根)도 죽오공의 뜻과 일로 법삼아 잘 염수(念修)하였다. 이에 후손이 두 선조의 독실한 행실을 위하여 묘재사를 지었으니 석류재(錫類齋)이다. 재실은 1985년에 건축하였고 그 기문은 삭녕인 최인찬 옹이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