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오면 / 곽주현
9월이 되었다. 아직도 햇살은 쨍쨍하다. 땡볕이 무서워 선뜻 바깥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지난여름 찜통 같은 열기를 그만큼 토해냈으면 이제 기가 꺾을 만도 한데 여전히 그 기세가 등등하다. 한여름에도 기척이 없던 매미의 합창 소리가 이제야 들린다. 그놈들도 그 긴긴날의 장대비와 불볕더위에 시달리다 지금에야 정신이 들었나 보다.
밤낮으로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때를 기다리는 농사일을 미룰 수 없어 가끔 농장에 나가 김을 매고 고추를 땄다. 이른 아침 시간에 일주일에 두어 번만 하는 거지만 그때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외에 몇 권의 책을 폈다 덮었다 한 것 말고는 대부분의 여름날을 빈둥거리며 지냈다. 7, 8월 평균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어 116년 만에 처음이라는 기상대의 발표를 들었다. 그뿐인가. 하늘이 구멍이 뚫린 듯 연일 퍼붓는 비로 물난리를 겪었고 수십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지난여름은 어둡고 음습한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그래서였을까? 8월 내내 허리통증을 심하게 앓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 등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지만, 척추에는 별 이상이 없다 한다. 의사는 일반적인 근육 통증이란다. 그런데 아픔이 왜 이렇게 오래 계속되는지 물었지만, 그럴 나이가 되었다는 말로 얼버무릴 뿐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물리치료나 받고 무리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처방이다. 글쎄 내 몸에 딱히 무엇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기상이변 같은 게 있었나 보다. 가끔 그런다.
몇 시간을 낑낑대다가 어떻게 여기까지는 썼는데 무엇을 더 이어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전혀 진도가 안 나간다는 말이다. 긴 방학(?)으로 6월 이후 손을 묶어 놓고 지냈더니 펜 끝이 무디어져 버렸다. 어떤 작가가 그랬다. 글쓰기 수준이 내려가는 건 고속도로이고 올라가는 건 높은 산을 가는 등산가의 발걸음 같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노트북을 싸 들고 농장으로 갔다.
창문을 열고 라디오를 켰다. 귀에 익은 곡이 들린다. 해마다 이 만 때가 되면 많이 듣던 음이어서 반갑다. <9월이 오면(Come September)>이라는 영화에 삽입된 곡(OST)이다. 라틴풍의 타악기와 전자기타가 기막힌 화음을 이룬다. 음이 경쾌해서 그 곡만 들으면 손과 발이 저절로 움직여진다. 나는 이 곡을 들어야 9월이 오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커피가 곁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먹는 봉지 커피는 어느 유명 카페 못지않게 맛있다. 입맛도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탁자에 앉아 창밖의 들녘을 내다보면서 노트북을 열어 ‘그래도 시절은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아와 벼 이삭의 알곡을 채워 고개 숙이게 한다.’라고 막 한 줄을 쓰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광주에 사는 고향 친구가 비어 있는 시골집을 둘러보려고 왔다가 내 차가 있기에 들렀단다. 얼른 노트북을 덮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쩌겠는가, 밥 한번 먹어야지. 다급할 때 꼭 이렇게 걸리는 일이 생기는지 나 원 참. 식사를 마치자 자리를 옮겨 차도 한 잔 마시자 한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꽤 분위기 있는 찻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엮어 가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겨우 한 줄 쓰고 하루를 종 쳤다.
다음날 다시 농장으로 갔다. 마음은 급한데 눈길을 엊그제 심은 배추 모종에 눈이 먼저 간다. 벌써 어린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이리저리 젖혀보니 갈색을 띤 어린 벌레가 숨어있다. 담배나방이다. 한 마리씩 잡아 발로 쓱쓱 문질러 버린다. 농약을 치는 것보다 이렇게 해충을 없애면서 작물을 키운다. 조금 더 지나면 파란 벌레가 많이 발생할 거다. 배추는 해충이 좋아하는 채소라 늘 관심 있게 살펴야 한다.
씨앗은 봄에만 뿌리는 게 아니다. 9월이 되면 우선 무와 배추를 심고 갓, 파, 상추, 케일, 청경채, 시금치, 양배추 등 여러 가지 채소를 가꾼다. 미리 먹을거리 월동 준비하는 거다. 엊그제 심은 모래알 같은 작은 씨에서 벌써 싹을 틔웠다. 여린 잎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저 경이롭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니 더위로 지쳤던 심신에 힘이 솟는다. 이 가을에 내 글발도 그들처럼 싱싱하게 자라났으면 하고 바란다.
고개를 들어보니 파란 하늘은 영락없는 가을이다. 잠자리 한 쌍이 아직은 따가운 볕 속으로 헤엄치듯 날아간다. 라이더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를 되뇌어 보련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시작된다.
첫댓글 '6월 이후 손을 묶어 놓고 지냈더니 펜 끝이 무디어져 버렸다.' 제 상태가 딱 이런데, 저는 이런 표현도 못 찾았어요.
선생님네 잘 가꾼 텃밭이 눈앞에 떠오르네요. 얼른 허리가 나으시길 빕니다. (박선애)
아이구, 억지로 갔다 붙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늘 그렇지만요.
저도 그 밭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주신 봉숭아가 교정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고맙습니다.
백현
잘 길러 주셔서 내가 더 고맙습니다.
전 사진으로만 봤지만 선생님이 가꾸신 밭이 너무 정갈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글 고맙습니다.
심지현.
직접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선생님 글을 정말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칭찬을 듣다니! 가슴이 통통통 하네요. 하하.
농사처럼 글도 어떻게든 써지긴 하네요. 곡식도, 글도 열정과 의지를 배반하지는 않나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9월이 오면>이라는 음악 좀 들어 봐야겠어요.
9월에는 그 곡을 몇 번이고 듣고 듣습니다. 60년대의 곡입니다.
글쓰기를 쉬다 보면 펜 끝이 무뎌지긴 하더라구요. 곽 선생님 글을 읽으니 평소 실력 그대로입니다.
늘 그렀지만 이번에는 더 어렵게 썼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농장과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작물을 보고 놀랬습니다. 선생님 농장에서의 동선이 그려집니다. 글 고맙습니다.
그런다고 농작물이 잘 자라지는 않아요. 마을 앞에 있으니까 더 관심있게 관리하는 거죠. 욕먹지 않을려고요.
9월이 오면 바로 듣고 있어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선생님 글 잘 쓰실 것 같아요.
선생님 글 이제서야 읽습니다.
하는 일 없이 종일 바빴답니다.
손끝 무텨진 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네요.
선생님과 함께 있는것처럼 일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더 나은 글쓰기는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정말 힘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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