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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침략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문제연구소 비망록
주체83(1994)년 6월 25일
지금 일본당국자들은 있지도 않는 우리의 핵의혹을 구실로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를 압살하기 위한 미국의 책동에 로골적으로 합세하고있다.
일본정부는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처한 유사시법의 실무적준비가 이미 완료되였고 즉시에 위기관리체계를 만들수 있다고 공언하고있으며 국제공조체제에 대하여 떠들고있다.
이것은 일본당국의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이 얼마나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일본은 력사적으로 우리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실시하여왔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50년대에도 미제가 도발한 조선침략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군사적인 적대행동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한 사실을 비밀에 붙여왔기때문에 지금까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되살아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또다시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군사적침략행동을 감행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면서 조선반도뿐아니라 아세아의 평화와 안전에 엄중한 위험을 조성하고있는 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문제연구소는 일본이 지난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세상에 공개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1.일본은 미국과 함께 조선침략전쟁을 준비하였다
1945년 7월 26일에 조인된 포쯔담선언 제11조에는 일본은 자기의 경제를 유지하며 공정한 실물배상을 가능케 하는 산업을 유지할수 있으나 전쟁을 위해 재무장하는것을 가능케 하는 산업은 허용하지 않는다. 고 명기되여있다.
일본점령 미군사령부는 국제적인 압력밑에 1945년 11월 6일 포쯔담선언의 규정에 따라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군사적팽창과 직접 관련되여있던 일본의 모든 군수품생산공장들을 해체한다는것을 명령하였으나 아세아지역의 정세변화를 구실로 1948년 3월 페기시킬 목록에 등록되였던 125개의 군수품생산기업소의 해체를 중지할데 대한 비밀명령을 하달하였다. 여기에는 전쟁시기에 땅크를 생산하던 가노회사의 20개 공장과 나까지마독점체의 15개 비행기공장이 들어있었다.
그 다음해인 1949년에는 군수기업소를 많이 가지고있는 73개의 회사를 페기명단에서 또다시 제거하였다.
그후 미국정부는 일본의 군수품생산공장들의 해체를 중지할것을 공식적으로 성명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억압하에 있는 일본1955년판)
일본점령 미군에 의하여 1949년까지 850개의 군수공장들이 일본독점자본가들에게 반환되였으며 1949년말에는 벌써 645개의 일본병기공장들이 생산을 다시 시작하였다. (일본도서 전후 일본의 력사상 1970년판 60페지)
일본의 병기공장들은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기전 1949년에 4만정의 보병총, 2,000문이상의 바주카포와 4만발의 포탄, 다수의 105미리류탄포와 37미리, 57미리 반땅크포, 화염방사기, 6080미리박격포와 70만발의 포탄, 지뢰, 2,000여정의 기관총과 기관단총, 4,900대이상의 자동차를 남조선괴뢰군에 공급하였다. (일본도서 조선의 통일과 인권1976년판 116페지)
미국은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를 재조직, 재무장시켰다.
미국은 1948년 3월에 일본에서 신경찰제도를 실시하고 경찰을 12만 5,000명으로 늘였으며 미군식 무기와 장비들로 무장시켰다.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1950년 7월 8일 일본수상 요시다에게 보낸 서한에서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를 새로 창설하며 해상보안청의 현 병력외에 8,000명을 더 늘일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일본정부는 정령 제260호를 제정하여 구일본군인들로 경찰예비대를 조직하였다.
경찰예비대의 창설계획, 조직, 배치에 이르기까지 직접 지휘한 주일미군고문단의 초대참모장이였던 프랑크 고왈스키는 경찰예비대는 미일공동작전을 전개할것을 예견하고 창설되였다. 그러나 그것이 국제협약과 일본헌법에 위반되기때문에 경찰예비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일본력사22권 현대11977년판 )
1950년 10월 맥아더가 소집한 일본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지도자들과의 비밀회의에서 그의 정치고문 씨볼드는 미국은 일본을 미래의 세계대전에서 동맹자로 보고있기때문에 일본의 군사력과 아세아에서 이전의 일본의 지위를 회복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1951년판 98페지)
경찰예비대의 사명에 대하여 맥아더는 이 무력은 경찰군이라기보다 조선에서 리용될수 있는 상비군이라고 하였다. (영문잡지 챠이나 만슬리 레뷰1951년 4월호 165페지)
경찰예비대에는 주로 구일본군 전범자들이 망라되였다.
1948년 12월 극동군사재판소가 20만 2,082명의 전범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텔레프레스 홍콩기자가 밝힌데 의하면 미점령당국은 1949년 7월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20만 1,577명의 전범자들을 처형명단에서 삭제하였다.(이전 쏘련도서 쏘련의 아세아정책1981년판 107페지)
미국은 전범자로 감옥에 구류되였다가 그후 맥아더에 의하여 기한전에 석방된 구일본군장령들을 무력건설에 인입하였다. 미국은 일본인들을 자기의 세계제패를 위한 전쟁에서 값눅은 대포밥의 원천으로 인정하고있다.(이전 쏘련도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 1951년판 98페지)
1949년 9월 8일 일본정부는 재일본조선인련맹본부와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본부를 불의에 습격하고 폭력으로 그 조직들을 해산시켰으며 전국적범위에서 그 산하조직들인 지부와 분회들의 재산까지 몰수하였으며 뒤이어 재일조선인학교들을 전반적으로 강제페쇄하고 그 간부들을 공직에서 모조리 추방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1953년판 160페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조련에 대한 파쑈적탄압은 리승만괴뢰도당의 북조선공격계획과 떼여놓을수 없다. 동쪽과 남쪽으로부터 조선에 대하여 행동하는 경우 유일하게 가장 큰 기지인 일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직을 방임해두는것은 리승만에게나 요시다수상에게 그리고 두사람의 상전인 미국에게도 참을수 없는것이였다. (일본도서 현대일본의 력사1953년판 441페지)
한편 조선전쟁을 치르는동안 일본은 마치 자국이 전쟁을 하고있는것보다 더욱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전후 점령초기부터 진행되여온 빨갱이사냥에 의하여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해산되고 아까하다가 정간된데 이어 1950년 7월 28일에는 신문, 통신, 방송 관계직장에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으켜졌다. 숙청의 물결로 하여 신문, 방송 분야의 704명을 비롯한 영화계 113명, 전기산업계 2,137명, 석탄계 2,020명, 철강계 1,002명, 통신계 501명 등 약 2만 2,000명이 처형되였다.
특히 반전운동을 자발적으로 전개한 재일본조선인들과 일부 젊은 일본인 학생, 로동자들이 주로 탄압의 대상으로 되였다. 현재 비난의 대상이 되고있는 지문날인제도와 외국인등록증 항시휴대의무 등의 제도도 바로 조선전쟁중인 1950년 10월 점령군의 지시에 의해 시행된 출입국관리령과 함께 주로 조선인을 상대로
고안된 억압체계의 유물이다.
이처럼 일본은 사실상의 한쪽 전쟁당사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실질적인 병참기지와 군수공장역할을 하였다. (남조선잡지 말1990년 6월호)
2.일본은 조선전쟁시기미군의 병참기지, 보급기지,수리기지, 공격기지였다
조선전쟁이 발발되자 당시 일본수상 요시다는 가미다나(집안에 신을 모신 선반)앞에 다가가서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은혜입니다라고 기도하였고 일본경제단체련합회 회장 이시가와는 천우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남조선잡지 말1990년 6월호)
일본은 조선침략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탄약을 전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난후 첫 3개월동안에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이 사용한 모든 탄약은 일본에 재건된 군수공장들에서 생산된것이다. (미국도서 남으로 락동강까지, 북으로 압록강까지1961년판 379380페지)
태평양을 통한 조선전선에로의 미군의 공중수송은 3개 통로를 거쳐 진행되였다. 첫째통로는 워싱톤으로부터 알라스카에 있는 앙코라쉬와 알류산렬도에 있는 쉐미야를 거쳐 도꾜까지의 통로로서 거리는 5,688마일이고 비행시간은 3033시간이다. 둘째통로는 쌘프랜씨스코의 트라비스공군기지로부터 호노룰루와 웨이크섬을 거쳐 도꾜에 이르는 중부태평양상의 통로로서 거리는 6,718마일이고 비행시간은 34시간이다. 셋째통로는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호노룰루, 죤스톤, 크와잘레인, 괌도를 거쳐 도꾜에 이르는 남부통로로서 거리는 약 8,000마일이고 비행시간은 40시간이다.
산처럼 쌓인 보급물자들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전선에 수송되였다. 미군은 일본을 리용하지 않고서는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수행할수 없었을것이다. (우와 같은 책 115페지)
일본이 미군에 설비와 군수품을 공급한것은 미극동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것이였다. 미극동사령부는 태평양섬들에 있는 태평양전쟁시기의 군수기재들을 일본에서 수리 및 개조할것을 지시하였다. 이 계획은 이미 1948년에 미극동사령부 군수관리인 준장 이번 나블로가 발기하고 시작한것이였다. 일본의 군수품수리소들에서는 1950년 7월과 8월에만도 매달 평균 4,000대의 자동차를 수리하였으며 1950년 한해동안에는 일본에서 4만 6,000대이상의 자동차를 수리재생하였다. (우와 같은 책 114페지)
일본독점자본가들은 미군의 특수주문을 받아 그것을 생산보장하였다.
미군을 위한 무기와 전투기재 생산에서 주요청부업자는 신미쯔비시중공업회사, 가와사끼 고꾸미회사, 오사까금속회사, 곤도제강회사, 고마쯔제작소 등 태평양전쟁시기에 군수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회사들이다. 조선전쟁시기에 특수주문을 리행하기 위하여 235개의 일본의 큰 회사들이 일하였다. (일본잡지 경제평론 1968년 10호 107페지)
미국에 의한 공화국북반부지역에 대한 무력침공이 개시되자 일본공업은 전시체제로 개편되였고 미국이 요구하는 군수품들을 전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각종 군수품을 구입하였다.
조선전쟁에서 특수주문은 1950년 5월부터 년말까지 약 3억딸라에 달하였다. (일본도서 일본제국주의와 군수산업 1979년판 80페지)
조선전쟁에서 악마의 무기로 불리운 나팜탄은 일본의 닛싼자동차, 이시이철공, 도요화열공업, 후지산업-한다, 소화자동차 등에서 대량생산되였으며 이것은 미극동공군특수주문의 90%를 차지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 1953년판 266페지)
조선전쟁시기 미국의 특수주문은 군사적성격을 띠였다. 일본기업소들은 미군을 위하여 포탄, 탄약, 화약, 로케트탄, 조명탄, 나팜탄, 박격포, 무반동포, 유도탄기구, 비행기 및 땅크 부속품, 피복, 모래포대, 위장망 등을 생산하였으며 자동차, 땅크, 배, 비행기, 저격무기, 포들을 수리하고 일부 회사들은 석탄, 자동차부속품, 화물자동차, 식량, 금속구조물을 미국에 납입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과 미국, 동료와 경쟁자 1970년판 169170페지)
미군사령부로부터 일본의 오사까 기교회사는 대구경박격포생산을, 고바금속회사는 포탄생산을, 고바고교회사는 포생산을 각각 주문받았으며 1952년 6월에는 포, 보총, 탄약을 비롯한 무기생산을 위하여 162개의 일본공장들을 더 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952년에 가와사끼기계회사는 비행기부속품생산에, 후지 고교회사는 비행기 조립과 수리에 착수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억압하에 있는 일본 1955년판 1819페지)
미군의 특수주문을 받고 생산보장한 일본의 대표적인 공장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항공기관계-쥬니홍중공업 (구미쯔비시중공업), 후지중공업 (구나까지마비행기), 가와사끼기계, 신메이와공업 (구가와나시항공)
포 및 방탄강판-일본제강, 일본특수강, 히다찌제작소, 신다이도제강, 고베제강, 나가사끼제강
군용차량-히가시일본중공업 (구미쯔비시중공업), 히다찌제작소, 히노디젤
총, 폭탄-히다찌공업기계, 니찌헤이산업, 일본제강, 고베제강, 구스미도모금속
전파계기-도시바, 도꾜계기
화약류-일본화약(구일본화약)
함선-가와사끼중공업, 니시니홍중공업 (구미쯔비시중공업), 쥬니홍중공업, 히다찌조선
(일본도서 전후 일본의 력사 상 1970년판 178페지)
일본의 공장들에서는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사이에만도 약 2,000문의 각종 구경의 포, 바주카형의 7,656문의 반땅크포, 40만개의 로케트탄, 120만발의 포탄, 230만개의 각종 지뢰와 220만개의 수류탄을 생산하여 미군에 제공하였다.
일본에서는 파손된 미군의 자동차의 84%, 포의 68%, 보병무기의 70%를 수리하였다. 그러나 리해할만한 원인에 의하여 유엔군에 대한 일본공업의 원조규모는 적게 밝혀지고있다. (미국신문 뉴욕 헤랄드 트리뷴 1952년 6월 7일부)
일본은 조선전쟁에서 미군의 특수주문을 받아 그 무기와 군사장비들을 생산보장하여줌으로써 막대한 돈벌이를 하고 고도경제성장의 기초를 축성하였다.
일본독점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조선전쟁은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돌파구였다. 미국은 일본독점자본의 거대한 생산력을 충분히 리용한다는 방침하에 로골적으로 대일정책을 전환시켰으며 일본은 단시일내에 조선전쟁의 전선병참기지 혹은 아세아의 군수공장으로 전변되였다. 일본경제는 이미 1952년에 태평양전쟁이전 (19341936년)수준으로 회복되였다. 1950년 일본의 국민총소득은 전쟁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였고 수출입균형도 1950년하반기에 패전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조선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군의 대규모적인 폭격전과 소모전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나팜탄 등의 생산과 비행기, 함선 등의 보수 등으로 일본의 중공업부문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전쟁기간에 일본독점체들의 특수수입은 1950년하반년에 1억딸라를 넘었고 1951년에 5억 7,000만딸라, 1952년에 8억 3,000만딸라, 1953년에는 8억 1,000만딸라를 기록하였다. (남조선잡지 말 1990년 6월호 164페지)
조선전쟁기간 일본의 섬유, 기계, 금속 등 군수품생산과 관련된 부문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의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공업생산지수는 19341936년을 100으로 할 때 1949년에는 68.9%, 1950년에는 82%, 1951년에는 115.1%로서 제2차 세계대전전수준을 회복하고 1952년에는 128.2%, 1953년에는 159.7%의 높은 속도로 장성하였다.
만약 조선전쟁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고도성장은 있을수 없었을것이다. (일본도서 조선문제에 대한 기본적시각 1976년판 178페지)
다른 산출방법에 의하면 조선동란에서 일본이 번 딸라는 30억딸라라고도 이야기되고있으며 이것이 그후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의 토대로 되였다. (일본주간잡지 노다게이자이 1965년 5월 17일호, 일본도서 조선사람, 일본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1965년판 212페지)
무기 및 군수품에 대한 미국의 특별주문에 의한 생산과 미군에 대한 로무제공에 의한 총수입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4월까지의 사이에 41억딸라에 달하였다. (일본번역도서 쏘련의 아세아정책 1981년판 185페지)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에 대한 지원은 일본으로부터 진행되였다. 미국은 일본의 저장소들과 제조업자들로부터 무엇이든지 얻어내고 조달받았다.
1950년 7월에 일본제조업자들은 반땅크지뢰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7월 18일에 3,000개의 반땅크지뢰를 실은 배를 부산항에 입항시켰다.
도꾜군수품보급창은 조선전쟁에 리용하기 위하여 태평양전쟁시기의 설비들을 수리갱신하였을뿐아니라 일부 무기와 설비들은 전투에서 효률성을 더 높이기 위하여 개작하였다. 실례로 엠4에이3땅크들은 75미리포대신에 속도가 높은 76미리포를 쓰도록 개작되였다.
그리고 105미리포운반용자동차가 개작되여 조선의 가파로운 산들에 67도까지의 고각도사격을 할수 있도록 개작되였다.
또한 무한궤도식군용자동차 엠15에이1도 개작되여 37미리포대신에 40미리포를 설치한 티19로 되였다. (미국도서 남으로 락동강까지, 북으로 압록강까지 1961년판 114페지)
미군사령부의 전략구상에서 일본의 역할과 의의는 미국이 조선에서 침략전쟁을 도발한후에 더욱 커졌다. 일본에는 미군의 중요한 후방기지가 창설되였다. 일본에 있는 공장들에서 비행기, 땅크를 비롯한 전투기술기재들이 수리되였다. (이전 쏘련도서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일본의 대외정책 1965년판 82페지)
미군은 일본의 토지를 접수하여 군사 기지 및 시설 확장을 꾀함과 동시에 철도와 전화망을 전시체제로 독점하였다. 지리적으로 조선반도와 가까운 후꾸오까시의 경우 최전선기지로서 이다즈끼비행장의 확장은 물론 레이다기지(나다, 기따자끼)와 고사포진지 (하꼬자끼, 미나미고우엔, 나까하라)가 구축된것을 비롯하여 항만시설의 일부가 미군에 전용되였다.
또한 조선전쟁중 군수물자수송에는 국철이 주로 리용되였다. 그때까지 하루 평균 30만40만톤이였던 수송량이 23배로 뛰여올랐다.
작전상의 긴급성이 요구되였기때문에 대량으로 조선전선에로의 항공수송을 위한 준비도 진행되였다. (남조선잡지 말 1990년 6월호)
일본은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미제의 침략전쟁에서 군사기지로 리용되였다. 미국의 해군기지로 전변된 일본의 항구들로부터 군대와 무기들이 조선전선에 투입되였다.
미제는 조선침략전쟁기간에 612개의 군사기지들과 군사시설물들을 일본에 설치하고 리용하였다.
미군비행기들은 오끼나와, 아오모리를 비롯하여 일본도처에 설치한 공군기지들로부터 하루 평균 700800회, 때로는 9001,000회 출격하여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조선은 재생한다 1956년판)
일본령토에 있는 공군기지들로부터 출격한 폭격기, 전투기들은 조선의 평화적인 도시와 농촌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조선 녀성들과 어린이들, 늙은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조선의 도시와 농촌들을 파괴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판 4748페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미제1해병사단주력은 일본 나고야에서, 제7보병사단은 요꼬하마에서 승선하였고 제7함대는 사세보에 집결하여 최후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일본도서 조선전쟁 4권 1969년판)
미군의 작전행동은 륙해공군의 대부분이 일본의 기지를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였다. (일본도서 전후일본사 1961년판 65페지)
3.일본은 조선전쟁의직접적인 참가자이다
일본은 포쯔담선언에 의해서뿐아니라 일본평화헌법에 따라 재무장할수도 없고 전쟁에 참가할수도 없게 되여있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을 공공연히 위반하고 미제가 도발한 조선전쟁에 참전하였다.
일본반동지배층은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기전부터 전쟁에 참전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1949년 7월당시 일본수상 요시다의 친구인 자유당의 히로가와는 미국편에 서서 앞으로 있을 전쟁에 참가할것을 호소하였으며 일본사람들의 임무는 자기의 노력을 미국과 합치는것이라고 하였다.
요시다내각의 국무상이였던 야마구찌는 1949년 10월 도야마시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는 전쟁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일본은 자기의것을 이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판 4243페지)
미제는 저들이 도발하려는 조선침략전쟁에 일본군대를 참가시킬것을 미리부터 계획하고있었다.
1950년 1월 1일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인민들에게 보낸 년두서신에서 헌법에 고착된 조항들을 침략에 대한 일본의 방어의 권리를 완전히 부정한것으로는 절대로 해석할수 없다. 고 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일본의 대외정책 1965년판 76페지)
일본점령 미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우리는 일본경찰을 훈련, 무장시킬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구일본군이 가지고있던 소총외에도 10만정의 소총과 탄약이 필요하였지만 그것은 남조선에 있었다.
나는 필요하다면 오장으로부터 대위까지의 구일본군병사들을 소총수로 동원할것을 제안하였다. 고 하였다. (일본도서 일본점령 3권 1987년판 149페지)
1950년 2월 16일 도꾜에서 맥아더와 리승만괴뢰는 일본을 참전시킬것을 모의하고 다음과 같은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군을 맥아더의 지휘하에 둔다. 한국군은 일본군과 공동으로 싸운다. 한국은 일본군을 위한 100만석의 쌀을 1950년 6월까지 맥아더사령부휘하에 둔다. 한국군은 북조선에 대한 공격을 진행한다. 훈련되지 못한자들은 전투에서 오히려 방해로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한국군을 늘이는것을 중지하고 대량의 일본인병사를 림시로 받아들인다.
전쟁준비는 대체로 1950년 5월에 완료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 1953년판 165페지)
일본반동지배층은 미제가 조선침략전쟁을 도발하자 그에 적극 참가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1950년 7월 1일 일본내각관방장관 오까자끼는 기자회견에서 조선전쟁에 미군이 출동하는것은 유엔의 경찰조치인것만큼 일본이 전투행위 또는 기타에 종사하면서 미군을 지원하는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1950년 7월 4일 일본정부는 내각회의에서 행정조치의 범위안에서 미군을 협조할 방침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미군의 군사력발동에 협력하는것은 응당하다. 장차 일본이 유엔에 가입하기 위해서도 유리하다. 따라서 헌법과 법률의 범위안에서 필요한 행정조치 즉 선박, 륙상수송력의 강화, 전화통신의 가설, 해상보험의 림시적조치 및 여기에 필요한 금융조치를 취한다. (일본도서 조선문제에 대한 기본적시각 1976년판 178페지)
미국잡지포린 어페어즈에 실은 글에서 일본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환영하고 침략자들에게 일본병사들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밝혔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1951년판 42페지)
1950년 7월 14일 수상 요시다는 일본국회에서 한 시정방침연설에서 조선사건은 공산세력의 위협이 이미 우리 나라 주변에 얼마나 다가왔는가를 실증하여주며 우리 나라로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할것이다. 라고 하였다.
일본외무성은 1950년 8월 19일에 발표한 조선전쟁과 일본의 립장이라는 문건에서 일본이 유엔군에 협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본의 안전을 지킬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조선전쟁에 참가할것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 정부와 자유당은 유엔군에 협력한다는 이름으로 조선전쟁에서 미군에 적극 협력하고 스스로가 미국의 아세아반공정책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본도서 일본 력사22권 현대11977년판 394395페지)
일본은 조선전선에 저들의 침략무력을 직접 투입하였다.
1950년 1월 브래들리장령이 이끄는 미합동참모본부련합그루빠가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강점 미군고위장교들과 가진 모의에서 조중인민을 반대하는 침략계획을 작성하였다.
이 침략계획을 수행하는데서 일본을 광범히 리용할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1951년판 43페지)
미국무장관 애치슨과 미륙군성우두머리들은 당시 일본수상 요시다에게 우선 다수의 일본 장군들과 장교들을 시급히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전쟁상황에 익숙시키며 리승만군대를 검열, 원조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요시다는 그 명령에 따라 제1진으로서 일본군 장령, 장교 200명을 급히 파견하였다.
그들은 미군복을 입고 매달 150딸라를 받으면서 남조선괴뢰군의 각 군종참모부에서 군사 고문과 전문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태평양전쟁시기에 중국, 말라이, 버마 등지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4,000여명의 황군출신 장병들은 일본의 군마, 야마나시, 시즈오까에 있는 미군특수훈련소들에서 훈련을 받은 다음 의용소대를 무어 미제24사단과 미제1기병사단에 배속되는 즉시로 조선전선에 파견되여 전투에 진입하였다.
1950년 7월에는 벌써 일본군의 조선전쟁참가자수가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로이터통신 1950년 7월 27일)
일본주재 미국대사였던 로버트 머피는 자기의 회고록에 일본의 선박들과 철도전문가들은 그들자신이 숙련된 부하들과 함께 조선전선에 파견되여 미군 및 유엔군사령부밑에서 일하였다. 이것은 극비였다. 그러나 련합군은 조선을 잘 알고있는 수천명의 일본전문가들의 방조가 없었더라면 조선에 체류하는것조차 힘들었을것이다. 일본이 수행한 역할은 조선전쟁을 위한 미국의 공격기지, 보급기지, 무기고였다는데만 있지 않고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전문가들을 포함한 인적자원제공까지 한데 있었다. 고 썼다. (일본도서 조선문제에 대한 기본적시각 1976년판 178페지)
조선전쟁과정에 약 8,000명의 일본지원병들이 이른바 유엔군에 소속되여 전투행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약 200명의 일본 장령들과 장교들이 남조선군대에서 각이한 급의 지휘관직을 차지하였다. (일본도서 우리 외교의 연구 1951년판, 이전 쏘련도서 일본의 무력 1985년판 107페지)
1951년 2월에 텔레프레스보도기자가 전한데 의하면 미국은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14만여명의 일본사람들을 징집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1951년판 49페지)
일본은 자기 군대의 조선전쟁참가를 음페할 목적으로 일본인부대를 재일조선인지원부대로 가장하였다.
1950년 9월 28일 미국 콜럼비아방송 도꾜지국장 죠지 하만은 방송을 통하여 8,000명으로 구성된 유령부대가 조선전선에서 싸우고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온 재일조선인부대라고 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1953년판 266페지)
1950년 9월 3만명의 일본인들이 미국의 기술 및 운수 부대에 배속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으며 1만명의 일본경찰예비대가 침략자의 편에 서서 군사행동에 참가하였다. 1950년 9월에 요꼬하마에는 조선전선에서 죽은 4,500명의 일본사람들의 관이 도착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1951년판 49페지)
일본인의용군이 복무하던 미군 스미스특공대가 1950년 7월 섬멸당한 오산계선전투에서 일본인장교들만 하여도 30여명이나 죽었고 대전지구전투 등에서 수십명의 일본인장병들이 송장이 되였다.
1950년 11월 맥아더의 크리스마스총공세가 조선인민군대의 강력한 반격에 의하여 파탄되였을 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의 실전경험이 있는 일본인장병 8,500명을 알라스카에 보내여 내한훈련을 시킨 다음 의용군으로 가장시켜 1951년 겨울작전에 투입하였다.
1953년 3월 일본은 증산청년단이란 이름으로 수천명의 일본청년들을 혹가이도에서 훈련시켜 미제10군단, 제16군단의 보충병으로 내몰았다. (일본도서 현대조선론 1965년판 82페지)
일본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전선에 파견하는 사업은 일본특무기관들이 수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미중앙정보국에 의하여 재편성된 일본특무기관들인 나까노학교그루빠, 가와베기관, 가마다기관, 후꾸베기관, 고다마기관은 미국의 지령에 따라 조선침략전쟁준비에 미쳐날뛰였다.
전쟁이 개시되자 이 특무기관들은 일본점령련합군총사령부의 지시밑에 일본정부기관의 협력을 얻어 비밀리에 침략전쟁을 위한 요원들을 모집하여 전선에 파견하였다. 이것은 비밀리에 진행된것으로서 그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있다. 알려진것만 하여도 군사고문 200명을 비롯하여 지상군 약 8,000명, 비행사 4명, 소해정 46척과 소해부대 200명, 상륙병 2,000명, 수송기승조원 3,000명, 기타 수송요원 500명, 무기와 선박 수리, 해저케블선 수리 및 신설을 위한 기술인원 그리고 전선위안부 240명 등 많은 인원들을 전선에 보냈다. (일본도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력사 1990년판)
파키스탄신문 이므로즈는 지금 조선전선에 파견되여있는 인도의 보야병원에서 많은 일본인병사들이 치료를 받고있다. 그들은 경찰예비대병사들로서 질서를 유지한다는 구실로 조선에 파견되였다. 이 병사들은 일본에서 두주일간의 특수훈련을 받은후 7080명씩 조를 무어 미해병대 제1, 제2 사단에 배속되여있던 사람들이다라고 전하였다.
조선전쟁시기 전 쏘련원동군관구의 정보분석가로 있은 가브리일 꼬르뜨꼬브는 전 쏘련원동군관구사령부의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조선전선에 파견된 일본의 병력에는 8,000명의 지상군과 1,500명의 해병 및 46척의 함선들이 들어있었다. 그들가운데서 일부는 미군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였을뿐아니라 전선에서 실제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미군이 지휘하는 지역들에만 파견되였다. 일본병사들의 대부분은 지원병이 아니라 당국에 의해 모집된 예비역군인들이였다고 말하였다. (모스크바, 오아나-련합 1992년 10월 12일)
미국과 일본정부는 마치도 일본사람들이 군사행동에는 참가하지 않은듯이 여러번 말하였다. 그러나 전쟁후에 군사검열제도가 페지된 다음 출판물들에는 일본병사들의 일부 그루빠들이 미군편제부대에 있었다는 자료들이 나타났다. 미군부대에 소속되여 전조선을 다 통과하여 압록강까지 갔다가 1951년 2월에야 국제적인 복잡성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에 소환된 28명의 일본사람들이 있다.(일본잡지 붕게이쥬 1960년 3월호 12페지)
수원방면에서 섬멸된 적들의 시체속에는 30여명의 일본인장교들의 시체가 있었다.
서울지역에서는 미군과 함께 많은 일본병사들이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철원지구에서는 남조선괴뢰군과 함께 일본인중대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리승만괴뢰군 제7사단과 제8사단에는 일본장교들이 많았다.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포로된 일본병사들도 많았다.
1951년 9월 4일 림진강지역전투에서 조선인민군 부대에 투항한 일본인포로 야스이 다쯔부미는 1950년 9월 29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인부대 제3그루빠에 속해있었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첫 두 그루빠의 2,000여명은 배를 타고 조선에 가서 남조선괴뢰군복을 입고 림진강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던중 조선인민군부대에 의하여 전부 개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판 49페지)
일본의 공군과 해군도 조선전쟁에 참전하였다.
프랑스주간잡지 악은 일본비행사들은 조선을 폭격하고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맥아더사령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전쟁을 위하여 주로 폭격경험이 있는 이전 일본병사들을 모집하고있다고 썼다.
이전 다나까비행학교 교장이였던 다나까 후지오를 비롯한 많은 비행사들이 의용군으로 징모되여 미제의 비26, 비17등 비행기를 타고 서울, 대북, 마닐라 등지를 오가면서 군수물자를 공중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판 49페지)
일본해상자위대에 속해있는 46척의 전함이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5일까지 거의 3개월동안 미국무력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대를 반대하는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현대일본의 군사경제적잠재력 1979년판 113페지)
일본은 또한 유엔봉사단의 명목으로 수많은 일본청년들을 조선전선에 파견하였다.
그 봉사단에 망라된 기술인원들은 남조선에 기여들어 철도, 운수, 항만, 발전소 등 여러 부문에서 미군의 군사행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50년 7월 수백명의 기술인원들이 후꾸오까-쯔시마-부산사이를 련결하는 해저통신선을 수리복구하는 등으로 맥아더사령부의 통신지휘체계를 보장하였다.
그 봉사단에 징집된 일본인간호원들은 구호반이라는 명색으로 미군야전병원들에서 일하였다. 일본 규슈지방에서만도 1, 000여명의 간호원들이 징집되여 미군야전병원들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미군의 위안부로 되였다. (일본도서 현대군사론1966년판 101페지)
일본군대가 대규모적으로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하고있는것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은 1950년 7월 7일에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여 조선전쟁에 수많은 일본군인들이 참가하고있다는것을 통고하고 이것은 유엔헌장과 국제법에 대한 란폭한 위반이라는것을 밝힌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더욱더 많은 무력을 조선전선에 투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은 1950년 10월에 또다시 유엔사무총장과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의장에게 항의서한을 보내여 미국이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에 일본군인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고있는 사실을 규탄하였다.
미군의 상륙작전에 앞서 바다에서 기뢰를 해제하는 작업은 거의 다 일본해군에 의하여 진행되였다.
일본에서 출판된 도서 일본의 소해는 그 사실을 비교적으로 상세히 밝혔다.
미군이 패전의 운명에 처해있을 때 일본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도와주는것으로 미군을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그후 10월 15일에는 또다시 미군의 원산상륙작전을 도와주었다.
당시 미해군은 서태평양지역에 4척의 소해정밖에 없었으며 기뢰를 해제해본 경험도 없었다. 미군은 항만들에 부설된 3, 000여개의 기뢰들을 해제하지 않고서는 상륙작전을 수행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그때 일본해상보안청에는 1, 508명의 항로개척대와 70여척의 소해정이 있었다.
1950년 8월 미극동해군사령부 부참모장 알레이 바크의 명령에 따라 일본소해정들은 전부 쯔시마해협에 집결되였다.
미국은 일본소해정들이 인천과 원산 앞바다에 부설된 기뢰를 해제할것을 요구하였으며 일본수상 요시다는 유엔군에 협력하는것은 일본정부의 방침이라고 하면서 소해정들을 동원하는데 동의하였다.
일본소해정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배이름과 부대번호표식마크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일장기대신에 국제신호기를 게양하였으며 미제7함대사령관의 지시를 받게 되였다. (일본도서 일본의 소해 1992년판 9495페지)
일본해상보안청은 1번대에 4척, 2번대에 5척, 3번대에 5척, 10번대에 7척 도합 21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특별소해대를 조선전선에 파견하였다.
1번대는 이미 1950년 9월상순에 출발하여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2번대와 3번대는 10월 10일에 원산해역에 도착하여 3, 000여개의 기뢰를 제거하고 원산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4번대는 서해안의 군산해역의 소해작업에 참가하였다.
이 특별소해대들은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2일까지의 8주일동안에 인천, 원산, 군산, 해주, 남포 등 5개 해역에서 총 327키로메터의 수로와 607평방마일의 정박소에 대한 소해작업을 진행하였다. (일본도서 일본방위정책과 현실 1989년판 113114페지)
일본의 아사히신붕은 최근 조선전쟁때 미해군소해정을 타고 조선에서 소해작업에 참가하였던 일본인 후지와라의 고백기사를 실었는데 그는 원산앞바다에서 2척의 미해군소해정이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는것을 목격하였으며 그 사진들을 지금까지 가지고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소해작전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게 된것은 소해부대간부로부터 비밀을 루설하지 말라고 강박당하였기때문이였다고 실토하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가 타고있던 배는 가가와현 이즈시마부근에서 소해작업을 하고있던 8척의 배들과 함께 조선반도로 향하였다.
그는 1950년 10월중순 원산앞바다에서 소해작업을 할 때 세번째 배인 800톤급정도의 소해정에 타고있었는데 앞의 두 함정이 기뢰에 걸려 침몰되고 자기 배는 겨우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1951년 2월에는 자기 배와 나란히 전진하고있던 미군소해정이 원산앞바다에서 기뢰에 걸려 침몰하였다. 그 배의 승조원 전원이 죽었다. 그가운데는 2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미군은 그들에게 전사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일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아사히신붕 1991년 5월 8일부)
일본은 조선전선에 미군사인원과 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당시 일본상선관리위원회 위원장이였던 아리요시 요시야는 저서 점령하의 일본의 해운에서 자기는 맥아더측근으로부터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날것이라는 예고를 이미 받았기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데 대하여 조금도 놀라지 않고 선박들을 지체없이 동원하여 미군에 협력하였다고 썼다. (일본도서 조선의 통일과 인권 1976년판 115페지)
일본정부는 1950년 7월초부터 수송부문에 전시체제를 세우고 군용화차 2만 5,000량가운데서 그 절반에 달하는 1만 2,000량을 미군의 군수물자수송에 동원하였다. (일본잡지 조선연구 1966년 4호 18페지)
미군수물자운반에 일본선박들을 동원시킬데 대한 1950년 7월 4일 일본내각결정에 따라 요꼬하마, 사세보, 마이즈루를 비롯한 수많은 군항들을 보수확장하고 고베를 비롯한 여러 무역항까지 군용항으로 전변시켜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전쟁에 전적으로 복무하도록 하였다.
일본선박들이 부산으로 운반한 화물은 하루 평균 1만 660톤에 달하였으며 1950년 7월 한달동안에만도 부산항에 부리운 물동량이 30만 9,000톤에 달하였다. (일본도서 륙전사집 1권 1975년판 159160페지)
일본선박들의 대부분이 동원되여 남조선에 군대와 물자를 수송하는데 리용되였다. 미제10군단을 인천상륙지점까지 수송하는데 사용된 720척의 3분의 1에 맞먹는 선박들에는 일본인들이 타고있었다.(일본도서 조선의 통일과 인권 114페지)
일본은 수송선뿐아니라 화물선, 유조선을 비롯하여 적십자표식을 한 선박들까지 동원하여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와주었다. (일본잡지 조선연구 1966년판 6월호)
남조선으로 가는 군수물자의 수송이 특별조달청의 주선으로 일본의 해운회사가 수행하였다는것과 수많은 일본인선원들, 항만로동자들이 미군의 수륙량용함에 승선하여 여러가지 형식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다는것이 1978년에야 공개되였다. (남조선잡지 말 1990년 6월호 164페지)
1950년 10월 14일 일본수산성 선박국이 종합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50년 7월부터 10월말까지 일본은 조선전쟁에 248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99만 5,800톤의 미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또한 일본은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수송선들을 동원하여 공화국북반부에 기여들었다가 녹아난 미제침략군 제10군단의 퇴각을 보장하여주었다.
일본의 공식문건인 점령군조달사에 게재된 군수물자의 수송업무수행중 사망한 일본인수는 다음과 같다.
특수항만관계자 101명, 특수성원 254명, 기타 조선전선에서 특수수송업무를 수행하던 가운데서 26명.
전쟁시기와 그 이후시기 이 사망자들에 대한 자료가 극비로 되여있었으나 1978년에 공개되였으며 그들에게 훈장을 주고 가족들을 대우해주고있다. (남조선잡지 말1990년 6월호)
4.일본은 세균전에도직접 가담하였다
일본은 미제와 함께 세균전을 금지한 국제법을 란폭하게 위반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제네바에서 조인된 질식성, 유독성 또는 기타의 독가스 및 세균학적방법을 전쟁에 사용함을 금지하는 의정서에는 세균무기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여있다.
1948년 12월 9일 유엔총회 회의에서 채택된 멸족성도살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공약 제1조에는 체약 각국은 평시이거나 전시이거나를 막론하고 멸족성의 모든 도살죄행을 방지 또는 징벌한다는것을 확인한다.고 규정되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모든 국제법규들을 위반하고 미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천인공노할 세균전만행을 공공연히 감행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후 처벌하기로 되여있던 극악한 전쟁범죄자인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세균전문가들을 처벌할 대신 그들을 보호하고 리용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세균전을 감행케 하였다.
영국텔레비죤기자 죤 할리데이는 가장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세균전이란 글에서 미국이 일본의 세균전요원들을 보호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제731부대 세균전요원들을 보호했다는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필림에 수록하는것을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마지막에 와서는 삭제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당시 직접 조사를 진행한 2명의 저명한 과학자 죠세프 니담과 프랑코 구리지오와 인터뷰했지만 텔레비죤프로에서는 삭제당하였다. (일본잡지 세까이1990년 7월호 122페지)
미국지배층이 일본의 세균전범자들을 옹호하고 비호한것은 우연치 않다. 죤슨은 미국군벌들이 세계대전에서 원자탄과 함께 사용하려는 세균무기를 만들고있다는것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은 세균무기 생산과 준비에 관한 일본자료들을 자기 나라에 가져갔다. 세균무기에 대한 자료는 일본전범자들인 이시이와 가시하라 장령들에 의하여 수집되였으며 일본에서 세균무기들이 생산되였다.(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1951년판 55페지)
일본점령 미군은 패망한 일본으로부터 세균무기에 관한 자료를 알고 2년동안에 걸쳐 이시이부대로부터 인체실험을 한 보고서들을 받았다.
일본관동군의 군의중장이였던 이시이 시로는 극악한 범죄자였다.
이시이를 책임자로 하는 제731부대는 세균무기를 연구하여 3만 1,000명의 조선인과 중국인, 로씨야인들을 산채로 실험하여 죽인 만행이 1949년 12월 하바롭스크에서 진행한 일본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쯔조대장 등 전범자재판에서 밝혀졌다. (일본도서 현대일본의 력사1953년판 582페지)
미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세균전의 기지는 일본이였다.
사이다마현 오미야시에 있는 미군의학연구소는 원래 일본륙군의 세균연구소를 접수한것이였다.
미군은 여기서 세균무기를 연구하고 제작하였다.
이전에 관동군 제731부대 (이시이세균부대)에 세균재료를 공급하고있던 사이다마현농업협동조합련합회 의학시험동물취급소장 겸 일본실험동물종합연구소장 오자와 미찌사부로가 미군에 세균재료를 공급하였으며 그가 미군에 공급한 모르모트의 수는 1개월에 2만3만마리에 달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1953년판 266페지)
전범자들인 구일본군세균전문가들이 직접 동원되여 조선에서 미제의 세균전에 가담하였다.
이시이 시로의 두번에 걸치는 남조선방문과 조선에서 미군에 의한 세균전은 일치되였다는것을 강조하여준다. (조선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쟁실태조사를 위한 국제학술위원회의 보고1952년)
미제는 1950년말부터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세균전을 계획하였으며 일본에서 만든 세균무기들을 가지고 포로병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였다.
1951년 12월 12일 쁘라하발 이전 따쓰통신과 텔레프레스 이전 랑군보도는 일본세균전문가들인 이시이 시로, 고에쯔 쯔지로, 기다노 마사지 등을 태운 군함이 세균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출발하였다고 전하였다. (남조선잡지 말1990년 6월호)
1951년 3월 유엔군총사령부 공공복지부장 삼스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미군세균수송선이 거제도에 도착하여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에 대하여 세균무기실험을 진행하였으며 이 세균전준비에는 일본의 세균전범죄자들인 이시이 시로, 와까마쯔 가즈지로, 기다노 마사지 등이 공공연히 협력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1953년판 216페지)
조선에서 미군이 사용한 세균폭탄은 이시이식자기폭탄이였다. 이시이식자기폭탄은 1940년대에 중국의 도시와 농촌의 평화적주민들에게 투하하였던 폭탄이다. (일본도서 공포의 세균전1991년판 106페지)
국제과학연구위원회는 1952년 10월 8일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은 세균무기에 의한 공격대상으로 되였으며 세균무기를 사용한 여러가지 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 일본군이 사용한 수법과 흡사하다고 결론하였다.
일본의 저명한 국제법전문가인 다바따 신지로교수는 전 쏘련중앙텔레비죤기자 울라지미르 쯔베또브에게 조선에서 제2차 세계대전때에 제731부대가 중국에서 류행시킨 전염병과 똑같은 종류의 전염병이 발생하고있다.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제731부대가 설계한 자기폭탄을 사용하고있다. 금속폭탄에서는 폭탄이 지상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이에 세균이 죽지만 자기폭탄은 발열하지 않고 떨어지며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깨여지므로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광범하게 산포시킬수 있다. 미국인들은 제731부대가 개발한것을 조선전쟁때에 실전에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우와 같은 책 109페지)
미제는 조선전쟁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하여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티브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을 만연시켜 수만명의 무고한 조선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미제침략군은 1950년 가을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지역에서 쫓겨나게 되자 천연두, 티브스 등 병균을 산포하여 여러 지역들에서 환자들이 발생케 하였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티브스 환자는 3,500명에 달하였으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특히 1952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미제침략군은 세균전을 발광적으로 감행하였다.
1월 28일 미제군용기들은 조선에서 종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종류의 벌레들을 강원도 이천동남쪽에 대량적으로 산포하였으며 그 첫째종류의 형태는 검은파리와 같으며 둘째종류의 형태는 벼룩과 같으며 셋째종류의 형태는 빈대와 같았다.
1월 29일 적의 군용기들은 이천지구에 대량의 파리와 벼룩을 산포하였다.
2월 11일 미제침략군 비행기들은 강원도 철원지구의 조선인민군 진지들에 벼룩, 거미, 모기, 개미, 파리 및 기타 작은 벌레들이 가득찬 대량의 종이통과 종이봉지를 투하하였다. 평강지구에는 벼룩, 파리, 모기, 귀뚜라미들을 대량적으로 뿌렸다.
2월 13일 미군비행기들은 강원도 김화지구에 파리, 모기, 거미, 벼룩 등 작은 벌레들을 대량적으로 산포하였다.
2월 17일 4대의 미군비행기는 강원도 평강이북에 파리와 벼룩들을 뿌렸다. 그들이 뿌린 곤충들에 의하여 페스트, 콜레라 및 기타 전염병들이 광범히 전파되였다.
1952년 2월부터 5월까지의 사이에만도 황해도 신천군, 강원도 문천군, 평안남도 평원군, 성천군, 녕원군, 대동군 등 여러 지역들에도 세균무기를 대량적으로 투하하였다.
1952년 7월 6일 세계평화리사회 특별회의는 전세계인민들에게 보낸 서한 세균전을 반대할데 대하여에서 우리는 최근 조선과 중국에서 감행한 세균전에 관한 문건들을 상세히 검토한후 깊은 우려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세균전은 응당히 저지되여야 할 가증스러운 죄행일뿐아니라 전인류에 대한 위협이다.
우리는 전세계남녀들이 세균전을 금지하고 세균무기금지를 요구할것을 그들의 량심에 호소한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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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본은 국제법들과 자기의 평화헌법을 위반하고 미제가 도발한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하여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과거 력사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 불길속에서 밤을 구워먹으며 횡재하던 지난 조선침략전쟁때를 꿈꾸면서 불길속에 다시 뛰여들려 하고있다.
불을 즐기는자들은 불에 타죽기마련이다.
일본반동들이 제2의 조선전쟁에서 또다시 황금소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1994년 6월 23일 평 양
첫댓글 개노무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