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라운 믿음 / 왕상 8:41-43, 눅 7:1-10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총회선교주일이다.올해 총회 주제는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하는 공동체’이다. 성서 본문은 구약 겔 37:15-23, 신약 엡 2:14-21이다. 본문을 보자. 겔 37:15-23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 앞에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엡 2:14-21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우리 교단은 민족의 막힌 담, 사회 각 영역의 막힌 담, 교단 간의 막힌 담을 헐어내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화해하는 공동체를 이루어내기 위해 꾸준히 일해 왔다. 2003년 우리 교단의 희년을 앞두고 희년의 시대를 선도해 나갈 앞서가는 교단으로서 꾸준히 전진해 나가야 할 사명과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번 총회 선교주일을 맞이하여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내기 위하여 힘쓰는 성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과 과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각오로 감당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본문인 눅 7장을 통하여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놀라운 믿음이다. 중병에 걸려 있던 로마 군인 백부장의 종이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을 받은 이야기는 깊은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이방인 장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가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1. 백부장은 넓은 아량을 가진 인도주의자였다.
백부장은 국경이나 종교의 선을 넘은 대범한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은 강포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그들이 하였으며, 눅 3:14절에서는 세례 요한이 군인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백애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종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 당시 종은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무런 소유권이나 자유가 없었으며,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때리고 괴롭히고 내쫓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었다. 물건이나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네로 황제의 신하 가운데 에파프로디투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네로처럼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에픽테투스라는 노예가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에픽테투스의 다리를 장난삼아 비틀기 시작했다. ‘주인님, 계속 비트시면 끝내는 부러질 것입니다. 그만 두시지요’라고 노예는 애원했지만, 잔인한 주인은 계속 비튼다. 드디어 다리가 부러졌다. ‘주인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결국 제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노예의 말이었다. 그는 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철학의 스토아 학파의 거장이 되었으나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노예들이 이렇게 공공연히 가혹한 취급을 받던 때에 백부장이 자기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은 참으로 특히한 일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네 속국 국민인 유대인을 사랑했다.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을 더러운 민족이요, 야만적인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상거래를 하거나 대화하는 것조차 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런 천민 취급을 받던 유대인을 극진히 사랑했던 것이다. 유대인 장로들이 그의 사랑에 감탄하여 예수님이 도움을 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백부장은 다른 종교를 존중했다. 로마인들은 자기 특유의 종교가 있었다. 쥬피터가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가이사(황제)를 우상화하여 섬기던 시대였다. 그러나 아량이 넓은 백부장은 다른 종교인 유대교의 회당을 지어줄 만큼 사랑이 많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유대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성서학자 바클레이는 백부장은 ‘깊은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라 평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일을 본다. 같은 기독교인데도 다른 교파에는 구원이 없다고 독선적인 태도로 교리를 우상화하는 일을 볼 때 다른 종교의 회당을 지어준 백부장은 참으로 훌륭했다. 극단의 교파주의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교단들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든다. 다른 교파의 교회를 사서 그 건물에는 하나님이 안계셨으니 없애고 새로 지어야 한다며 불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다른 교파 사람들은 마귀의 자식들이니 자기 자신들을 더럽힐 수 없다고 대면이나 인사를 못하게 손을 멀리서부터 내저으며 지나간다는, 소위 극단의 보수주의자들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가 자선사업을 할 때도 으레 자기 교파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반드시 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태도를 가진 옹졸한 교인들은 백부장의 범종교적인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한 10년 전인가 신문에 실렸던 원불교 강남교당의 박청수 교무의 기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그분은 8년 이상이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성 나자로 마을’과 산청 ‘성심인애병원’, 이리 ‘성모의원’ 등 자선단체에 과일과 이불과 옷을 구해 보내기 위하여 엿장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단체를 위하여 어떻게 그처럼 고생하며 도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환자 돕는데 종교가 다르면 어때요?’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저는 원불교에 대해 잘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박청수 교무의 숭고한 사랑의 정신에 깊은 존경을 보낼 따름이다. 교파나 교리에 매여 허우적거리며 죽을 때까지 헛되이 고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엄하게 책망하셨다.
2. 백부장은 자기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비록 당당한 로마 군대의 장교엿으나 그는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겸솜한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귀한 심성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자기의 무력함을 발견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탕자가 그러했고, 시몬 베드로가 그러했다. 큰 병원에 가보면 종종 흥미있는 일들을 볼 수 있다. 대개 나이가 젊거나 경험이 적은 풋내기 의사들일수록 청진기를 목에 걸고 활발하게 걷는다. 큰소리로 간호사들에게 명령한다. 거의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경력있는 의사들은 온갖 어려운 수술과 진료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그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기면서 늘 인간의 무능과 무지를 느낌과 동시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체험했기 때문에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말도 부드럽게 한다. 이런 태도를 보면 이 의사는 능력있는 의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열두제자 중에 가장 패기있고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그의 담력과 용기, 그리고 언제나 앞장서야 하는 기질이 때로는 돋보인다. 신앙고백을 바로하여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님과 동행하겠다’고 장담을 한다. 그는 자기의 믿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어느 날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애쓴다. 수십 년간의 경험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신다. 놀랍게도 그는 거기서 많은 고기를 잡게 된다. 바로 그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한다. 이때가 베드로에게는 의미심장한 신앙의 출발점이었다고 보인다. 그는 자기의 무력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 옥살이를 한 사람이 있다.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주님을 영접하고 감옥 전도에 헌신하고 있다. 그는 대학다닐 때 원하던대로 해병대 장교가 된다. 소위로 임관되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는 1954년 여름 과테말라에서 봉기한 공산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을 명령받았다. 해변 연안의 해상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느날 밤이었다. 그는 밤이 점점 깊어 자정을 넘자 앞날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45명의 부하 헤병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에 불안해 하는 순간 돌연 넓은 밤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점보다 더 작은 지구,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곳에 서 있는 자신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늘 가득 펼쳐져 있는 수억만개의 별들을 보면서 이 젊은 장교는 자신이 무력하고 무가치하며,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 위에서 이 광대한 우주를 지키고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기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한 그 신앙의 체험이 그를 감옥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게 했다는 고백이다.
옛날 다윗도 비슷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시 8:3-4절 ‘(공동번역)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당시 용맹을 떨쳤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자기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깨달은 것은 대단히 귀한 신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 6하-7절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이런 겸손의 고백은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3. 백부장의 말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백부장은 ‘그저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본에는 ‘주여, 저는 당신이 할수 있다고 확신합니다’라고 기록되었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일부러 종의 몸에 손을 얹을 필요도 없고, 그의 곁에 갈 필요도 없이 다만 계신 곳에서 말씀만 하시면 고쳐진다고 믿었다. 그가 믿는 예수는 전능하신 분이어서 능히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성현들처럼 도덕과 윤리의 스승으로만 본다면 기독교의 생명과 참된 내용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위인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진실된 신앙이 싹틀 수가 없다. 그는 구세주로 오셔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이 우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실 뿐만아니라, 우리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다 아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 군인으로서 용납이 안되는 위험한 길을 주저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바른 확신은 두려움없는 신앙과 생동력있는 믿음을 갖게 한다. 주께서 우리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들과 경제문제와 신앙상 모든 문제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신 분임을 진심으로 알고 고백할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 그때는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신념과 실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일종의 모험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같이 전지전능한 분이라는 신앙이 생길 때 비로소 모험이 가능한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때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자기의 화려했던 경력이나 지식이나 전통적인 신앙까지도 다 분토처럼 버리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스데반도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돌무덤에 묻혀 죽는 고통 속에서도 주 예수에 대한 확실한 신앙 때문에 죽음을 기쁘게 감수할 수가 있었다.
토마스 머튼은 뉴욕 타임즈의 권위있는, 그리고 장래가 촉망되는 서평 담당 기자였다. 그러나 어느날 예수를 영접한 그는 20대의 젊음을 주님을 위해 불태우기 위하여 장래성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신문기자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그분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 헨리 뉴엔이라는 신부가 있다. 그도 역시 세계적으로 명문학교인 예일대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페루 라마에 있는 수도원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약자를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저술에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답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후의 백부장의 이야기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로마정부나 군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형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마음을 바꾸어 다시 주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님을 한번 바로 발견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간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백부장은 참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믿음이 사람이었다. 우리도 백부장처럼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