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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믿음의 동기 / 행 1:15-26, 요일 4:11-16
‘너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때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던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던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요한을 학수고대하던 메시야로 착각하고 그렇게 따라다녔던 것이다. 예수님 외에도 사람을 갈대로 비교해서 말한 사람들이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다. 또한 음악가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은 항상 변한다’라고 노래했다.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처럼 우왕좌왕 요동하고 흔들리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성도로 구별된 사람들은 믿음의 도리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적 여하에 따라 달성의 여부를 결정할 수가 있다. 또 그 목적 여하에 따라 보람도 찾을 수 있으며, 많은 유익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되는것도 마찬가지이다. 목적을 바로 알고 교회에 다닐 때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얻어지는 많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전기 난로를 갖다 놓고도 사용할 줄 몰라 얼어 죽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에어콘이 있는데도 켤줄 몰라 더워서 파김치처럼 되었다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가? 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그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적으로 죽기 일쑤이다. 부자 아버지를 가진 아들이 돼지 우리에서 굶어 죽을 뻔한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의 종류를 그들의 목적에 따라 대략 몇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첫번째 무리는 배가 고파서 얻어 먹고자 따랐던 무리들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두번째 무리는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좇았다. 오늘날도 이런 세상적이고 직접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무리들이 많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목사들이 인간의 이런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여 축복을 남용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고상한 복음의 진리를 무속화 내지는 미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번째 무리는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좇아다녔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이 무리에 속한다. 주님을 책잡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아무리 은혜로운 천국 복음을 전하여도 소귀에 경읽는 격이었다. 결국 그들의 음모로 인하여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신 것이었다. 오늘날도 그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교회에 드나드는 무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복음의 진리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남의 실수나 잘못에 깊은 관심을 두고 뒤에서 계속 교회를 박해하는 무리들이다. 네번째 무리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따랐던 이유를 보면 그들 역시 불손한 점이 많았다. 그들의 관심은 주님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어떻게 하면 지상왕국이 건설될 때 좀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하는데 있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크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도를 잘 아시고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자리는 둘째 문제란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충고를 하셨다. 한번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아서 통치할 수 있도록 높은 자리를 주실 것을 부탁하셨다. 그 어머니 역시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책망을 받았다. 항상 그들은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 당연한 현상이다.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거의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던 어부들이나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세리들이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사회의 천덕꾸러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을 만나고, 전에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을 때, 그리고 많은 군중들의 인기가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자연히 높은 자리를 탐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천국보다 자리에 있었다.
오늘날도 이런 무리들이 교회 안에 있다. 사회에서 받을 수 없는 어떤 대우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온다. 인정에 굶주린 무리들이다. 그들은 교회 봉사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도 교회 제직이 되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쉽게 교회를 옮긴다. 우리는 위의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동기가 확실해야 한다. 요일 4: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고 믿음의 동기를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이 아주 견고하게 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두가지 면에서 말씀드리겠다.
1. 항상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한의 말과 같이 사랑은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조건부의 사랑을 한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또 사랑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거나 애써 의로운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더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밤죄한 후 그들은 숲속에 숨었다. 숨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범죄한 후에는 계속 도망가고, 될수록 더 멀리 도망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찬 387장처럼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이렇게 된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주셨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 찬 525장처럼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라고 주님은 불러주신다. 군대에서는 가끔 탈영병이 생긴다. 탈영하면 자유로울 것 같아도 끝없는 불안이 계속될 뿐이다. 죽을 때까지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거나 도망다니는 우리 인간들을 부모님처럼 사랑하는 심정으로 찾아주신다.
프랜시스 톰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48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유명한 시들을 남겼다. 의사인 아버지가 천주교로 개종한 후 톰슨은 신부가 되려고 우쇼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아버지의 권유로 오슨스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8년간 노력하였지만 자격시험에 3번이나 떨어짐으로 결국 의사의 꿈을 포기하였다. 그는 건강이 몹시 나빠졌다. 성냥과 신문을 파는 신세가 되었으며, 심지어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 더군다나 폐병까지 걸려 결국 죽게 된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죽기 몇 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늘 도망만 다니며 멀리멀리 떠나서 멋대로 방황하던 자기를 하나님은 끝까지 좇아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시로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아담과 하와를 찾아주신 하나님은 다윗을 찾아주셨고, 멋대로 방황하던 톰슨을 찾아주셨고, 불순종하며 살기를 좋아하는 탕자같은 우리를 끝까지 살펴주실 것이다. 이 넓고 크신 사랑은 타락하여 정처없이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농촌에 홀어머니 마리아와 외동딸인 크리스티나 단둘이서 정답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비록 초라하고 가난한 집이었지만 방안에는 나무로 된 십자가가 벽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딸을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잘 기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젊은 과부가 된 그녀에게 사방에서 재혼하자고 청해왔지만, 어린 땅을 잘 기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았기에 다 거절했다. 남의 집 식모 노릇을 하면서도 정성을 다해 딸을 길렀다. 그런데 딸은 15세가 되던 어느날 갑자기 좀 더 큰 도시에 나가 직장을 얻어 여유있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했다. 처음에는 농담이라 생각했으나 이미 딸의 마음이 결정된 것을 알고 어머니는 여러 가지로 만류했다. ‘그곳은 집과는 다른 곳이란다. 사람들은 거칠고 매정하며, 일거리도 별로 없는 곳이니 생각을 바꾸어 보려무나’라고 타일러 보았지만 딸은 결국 집을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몹시 불안했기 때문에 딸이 나간 방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어느날 딸을 찾아 나섰다. 넓은 도시 거리거리를 누벼봤지만 딸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사진관에 들어가 흑백으로 자신의 사진을 수십장 만들었다. 마리아는 딸의 인물은 무척 예쁘고 활달하지만 별 뾰족한 재간이나 기술이 없고, 게다가 고집이 무척 센 아이이며,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좀체로 쉽게 집으로 돌아올 아이가 아님을 잘알고 있었다. 그녀는 딸이 별의별 잡된 일을 다 하리라 생각하고 호텔, 술집, 심지어는 창녀들의 소굴에까지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의 거울 밑이나 호텔 입구의 게시판 밑에 짤막한 구절을 뒤에 적은 사진을 붙여놓곤 하였다. 몇주일이 지난 어느날, 크리스티나는 어느 호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피곤했고 지쳐있었다.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였다. 그녀는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그래도 농촌에서 어머니와 살던 때를 한없이 그리워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참혹한 모습으로 자기 어머니를 찾아갈 용기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호텔 입구 안내소 옆에 있는 큰 거울 밑에 달린 조그마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자기 어머니였다. 그녀는 돌연 목이 메이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임을 느꼈다. 그녀는 금방 사진을 떼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 적힌 글을 읽었다. ‘네가 무엇을 했더라도,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발 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만 오려무나.’ 그것을 읽은 크리스티나는 즉시 자기 집으로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구절이 적힌 사랑의 초청장을 들고 말이다.
2.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 개개인의 역사는 죄로 얼룩져 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어두운 과거를 갖고 사는 인간들이 많다. 미움과 욕심과 거짓과 불순종으로 가득한 과거이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 상태를 이사야는 우리 속에 쌓여 있는 찌꺼기와 혼합물이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괞찮은 것 같으나 온갖 찌꺼기가 다 섞여 있는 그런 혼합물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기 속에 있는 더러운 죄성에 대해 탄식을 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하면서 이 못된 마음 속의 찌꺼기가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리고 하였다. 베드로 역시 같은 말을 한다. 개가 토한 음식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돼지가 더러운 곳에 계속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인간들은 자기의 죄를 계속 범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이 찌꺼지 같은 죄악의 근성을 다 없애기 전에는 계속 범죄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본능과 본성이 죄를 짓게 되어 있다.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나 직분이 없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다. 믿는 사람에게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따금씩 죄를 회개하고 또 같은 죄를 짓는 것 뿐이다. 일단 죄를 범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죄악감 때문에 항상 공포와 불안에 떨며 살게 된다. 그래서 결국 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용서의 손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위로하신다. 또한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반가운 말씀인가? 죄에 대해 아무런 댓가를 치르지 않고 무조건 용서받는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된다. 그 크신 사랑을 알 때 우리는 주님께로 나오지 않고는 못견디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은 미움과 악이 가득찬 사람들이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무섭고 사나운 인간들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마음이 변하여 순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변화되는 것은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죽은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오랜 교도소 생활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도 아니다.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기적같이 새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뜨거운 사랑에 접하게 될 때 그 굳어진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처럼 강한 힘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연합군의 한 병사가 독일 군인들을 많이 죽인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훈장을 볼 때마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전쟁터에서 17세도 안되어 보이는 어린 독일 군인을 총검으로 잔인하게 찔러 죽인 일이었다. 자기의 총검에 피를 토하며 죽던 그 어린 군인에 대한 기억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복무하던 부대에 세 명의 군목이 있었다. 한 군목을 찾아가 자기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훈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에게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 군목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게나’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훈장이 세상의 것이니 다시 나에게 반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병사는 실망했다. 다시 다른 군목을 찾아갔다. 그 군목은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의 찬송을 부르며 자네는 군인인데 전쟁에서 적군을 죽인 것으로 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면서 더욱 용감하게 싸우라는 것이었다. 역시 실망한 그는 마지막으로 세번째 군목을 찾아갔다. 그 군목은 젋은 군인의 고민을 다 듣더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그저 그 군인을 꼭 껴안았다고 한다. 그들은 한참동안 함께 울었다. 더 이상의 대답이 필요없다고 느낀 군인은 군목실을 나오게 되었다. 바로 그때 군목은 문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순간 그는 마음에 펑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꼈으며 비로소 안심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젊은 군인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제대한 후에 신학을 공부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캠벨 목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그 사랑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될 때에만 우리의 신앙이 굳은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흔들림 없이 언제나 든든할 것이다. 내가 왜 예수 믿게 되었나? 나는 왜 지금 교회에 나와 있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의 동기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