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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소망 / 애 3:25-33, 벧전 4:12-16
여러 성도들이 협조로 지난 목요일 이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이삿짐을 싸는 것을 쉽게 생각했다. 왜냐면 책을 싸는 것은 신학생 때부터 아주 잘 쌌다. 생활관 동료들이 놀랄 정도였다. 책 싸는데는 도가 텄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매일 전주를 한 번씩 왔다갔다 하지, 어떤 날은 두 번을 온 적이 있다. 오면서 책을 몇 보따리씩 싸서 가져왔다. 그러면 쉽게 이사가 될 줄로 알았다. 책 보따리를 몇 번이나 가져다 놓아도 줄어들지를 않네요. 10년을 갈보리교회에 있으면서 책만 샀나 보다. 책장 8개가 모자라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이 무척 많았다. 버리고 온 책까지 다 가져왔다면 이사를 하루 더 연기했어야 할 정도이다. 이사갈 짐이 아직 정리가 안 되었는데, 이삿짐 차는 미리 와서 기다리니 마음만 더 바빴지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아마 성도들이 이삿짐 정리도 안하고서 이사간다고 했다며 속으로 흉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포장이사에 맡기려다가 완전히 집이 완성되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임시 거처로 옮기는 것이라, 포장이사에 맡기기도 그래서 직접 이삿짐을 꾸렸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난장판속 같은데도 마다하지 않고 도와준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 한가지는 보라가 이사와서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 방이 하나밖에 안되는데 아주 큰 교육관을 우리 방으로 사용하니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야, 우리 보라가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좁은 곳에서 살려면 좀 고생이 있겠지만, 좁은 공간이라도 거처할 곳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치 독인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을 때 폴란드의 유대인 전용시장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팝니다.’ 그런데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불어본다. ‘아니 노인장, 아무 것도 없지 않소?’ 그러자 노인은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소망을 팔고 있습니다. 나의 동포여, 소망을 잃지 맙시다. 여호와는 우리이 도움이십니다.’
월남전이 끝난 후에 있었던 일이다. 전 미국인을 울린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보스톤 근교의 한 가정에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원남전에 참전했던 아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부모에게 건 전화였다. ‘아버지, 드디어 제가 돌아왔어요.’ ‘언제 오니? 집에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버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제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가면 안될까요?’ ‘어떤 친구니?’ ‘놀라지 마세요. 제 친구는 전쟁에서 오른쪽 눈과 오른쪽 팔을 잃어버렸고, 오른쪽 다리까지 절단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를 꼭 좀 데리고 갔으면 좋겠어요.’ ‘데리고 오너라.’ ‘그런데 아버지, 가서 그저 며칠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 친구하고 계속 같이 살았으면 해요. 그래도 될까요?’ ‘아니, 너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거냐?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나 우선 오려무나.’ 일단 전화를 끊었다. 사흘이 지나갔다. 나흘이 지나갔다. 아무 소식이 없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청년 하나가 자살을 했는데 소지품을 조사해본 결과 이 집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해서 당장 달려가 보니 시신은 오른쪽 눈과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 데리고 가고 싶다던 친구는 다름아닌 그 집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청년의 일처리 방식을 나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청년은 친구 이야기를 통해 자기 사정을 부모에게 고하고 있엇고, 부모님의 사랑이 그런 사람에게까지는 미칠 수 없는 제한된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더 이상은 부모 앞에 설자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스로 생명을 끊었던 것이다. 고통 중에도 소망이 있었다면 그래도 목숨만은 부지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망이 없기에 인생을 포기한 것이다. 고통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소망임을 알아야 한다. 소망이 없는 성도는 죽은 자와 같다. 사람은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은혜를 깨닫게도 되고, 또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개척의 능력도 생기게 된다.
아주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매우 훌륭한 가정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는 출세에 가장 빠른 군인 장교가 되기 위하여 육군공병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그의 성품에 맞지 않아서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849년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사형 직전에 형 중지령으로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4년 동안 잔인무도한 죄수들과 함께 갖은 고생을 다하며 지냈다. 그리고 장교였던 사람이 졸병으로 6년을 복무하고 석방되어 돌아왔다. 그의 10년 동안의 고통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그 생활을 그린 ‘죽음의 집의 기록’과 ‘학대받은 사람들’이란 작품이 있다. 그가 죽음과 바꾼 그 고통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문인으로 성장하게 했다. 그는 유형지로 갈 때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고 열심히 읽었다. 거기서 그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몹시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서운 신경질의 성품이었다. 하지만 유형지에서 읽은 성서를 통하여 그의 성품은 몰라보게 변했다. 그는 극히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 ‘죄와 벌’ 등의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은 결과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을 받는다.
이러한 인생의 방향이 바로 신앙으로 이룩된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신앙은 소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장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거기서 생긴 그의 살 수 있다는 소망이 그로하여금 새로운 생관으로 살게 했다. 월남전에서 불구의 몸으로 구사일생 살아온 청년, 그러나 살 소망을 잃고 생을 마감한 청년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나? 고통 중에도 소망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유다의 비극을 보고 슬픔 가운데서 부른 노래이다. 조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적국의 손에 초토화되고 동포들이 대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니 함께 끌려가서 고난을 겪으면서 보른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 아니라, 눈 앞에 나타난 현실을 눈물로 경험하며 나타낸 실제적인 고통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다름이 없다. 인간은 슬픔을 아는 동물이다. 또한 고난을 당하며 사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는 아무도 낙관하고 살아갈 수 없으며, 희락을 즐기는 사람들도 닥치는 고통을 뿌리쳐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어차피 고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숙명론적으로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모퉁이는 소망의 길로 통하는 전환점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마지막에는 소망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불가사의한 분이다. 우리가 불평하고 괴로워할 때는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맬 때에도 침묵을 지키신다. 그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지 주님이 우리를 내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 우리의 힘이 탈진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우리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켜 주신다.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리를 소생시키는 어떤 동기를 심어주신다. 바로 이 순간이 절망이 찬송으로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29절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라고 말한다.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실 한 줄기 소망을 바라본다. 31절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절망의 밑바닥에서 가까스로 소망의 줄을 한가닥 붙잡는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와츠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화가가 그린 그림이 생각났다. 여러분 중에 어쩌면 이 그림을 보신 분도 있을 줄로 안다. 저는 주일학교 공과책에서 본 적이 있다. 지구본 위에 한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서 있다. 하늘은 캄캄하게 어둡다. 자세히 보면 이 캄캄한 하늘에 별 하나가 떠 있다. 더 자세히 보면 이 소녀는 눈이 멀었다. 좀더 유심히 보면 소녀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현은 한 줄만 남고 모두 끊어져 있다. 캄캄한 밤 하늘에 뜬 단 하나의 별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남은 현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눈먼 소녀의 모습, 그 그림 밑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소망’
예레미야는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채찍질에 항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마땅한 저주임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있다. 그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 삶을 주님 앞에 펼쳐 놓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징계의 원인을 발견한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징계르ᅟᅮᆯ 내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동시에 깨닫는다. 32-33절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곧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근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두셨으니 그것이 그분의 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놀라운 말씀 아닌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채찍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예레미야는 그것이 당연한 징계라고 인정하는 동시에, 채찍을 드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니었노라. 네가 이 고생을 당하고, 이 어려움을 당하고, 이 눈물을 흘리고, 이 아픔을 당하고, 그리고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너를 향한 내 본심이 아니었노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때릴 수밖에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때리던 손을 거두신다. 그리고 한없는 애정으로 다시 백성을 보호하신다. 바벨론의 포로되게 하셨으나 포로된 그들을 지켜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다시 그 백성을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우리가 지은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빚어진 잠시동안의 어둠이나 근심이나 고통에 대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의 채찍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을 믿기 바란다. 우리가 아직 없어지지 않은 이유, 우리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 고통 중에도 우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이 게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지난 우리의 생애가 비록 밤이었고 어둠이었고 고통이었고 슬픔이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세요.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붙잡아 보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경험해 보세요. 이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고통의 밤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새로운 아침이 올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소리쳐 주님을 찬양하면서 예레미야처럼 주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리고 고통을 벗어버리고 밝아오는 아침처럼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20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