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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絶學無憂.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학문을 끊으면, (그러한 학문을 닦음에 따른) 걱정거리를 가지는 바가 없을 수 있게 된다.
此一句, 亦如上章, 絶聖棄智, 絶仁棄義之文. 而若絶棄道學, 則固可無進修之憂矣.
이 한 문장은 이른바 제19장의 “절성기지絶聖棄智, 절인기의絶仁棄義” 문장과 (뜻을) 같이 한다. 이른바, 만약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도道를 “끊어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학문”을 내버리면, (그러한 도道에) 나아감에 따른 “걱정거리”와 (그러한 “학문”을) 닦음에 따른 “걱정거리”를 진실로 “가지는 바가 없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以起下文, 不敢絶學之意也.
따라서 (이 한 문장은) 다음 문장의 “(군자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와 그러한) 학문學을 감히 (일부러 일삼아) 끊어내면 안 된다”는 뜻을 (앞서) 일으키는 문장이다.
舊註, 以學爲世俗之學. 而謂老子, 眞欲絶之. 則世俗二字, 旣非老子之所言. 且通篇, 無非言學, 下篇又曰, 爲學日益. 豈容言學, 而復欲人絶之哉? 必不然也.
(덧붙여) 옛날의 주석가들은 (모두 노자가 일컬은) “학學”이 ‘세상’의 (모든) “학문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이렇게) 주석했다. “노자는 진실로 (세상의 모든 학문學) 그것을 끊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2글자는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글자가 아니다. 이른바, (이 책의) 여러 장은 “학學”을 일컫는데, (예를 들어) 제48장은 이른바 일컫는다. “(유가儒家의) 학學을 일삼으면, 나날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이) 품어 안고 일컬은 (모든) “학學”이 어찌 이른바 (사람들이) 되돌이켜야 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해야 하며, 사람들이 “끊어내야 하는 바”로서의 (‘세상’의 모든 “학문學”) 그것이겠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唯, 上聲.
(이른바,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 서로의 떨어진 바가 아주 어떠한가? (아주 멀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잘 일삼는 학문과 잘 일삼지 못하는 학문, 서로 떨어진 바가 무엇과 (아주) 같은가?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아주 같다!) 유지唯之의 유唯는 상성(上聲; 3聲)의 유(唯; 공손한 대답인 ‘예’)이다.
唯, 應之恭也. 阿, 應之慢也. 二者之分, 只在脣齒低昻之間, 則其相去, 特毫忽之微矣. 然子, 阿於父, 則爲不子. 臣, 阿於君, 則爲不臣. 弟, 阿於兄, 則爲不弟.
“유(唯; 예)”는 대답으로서 공손한 바이다. “아(阿; 응)”는 대답으로서 불손한 바이다. (그런데) 2가지가 (“서로”) 나뉘는 기준이 단지 입술과 이가 아래로 내려가느냐와 위로 올라가느냐의 사이에 자리하게 되면, 그것이 “서로 떨어진 정도”가 겨우 가는 털의 1/10 굵기만큼 작아지게 된다. 따라서 자식이 부모에게 “응阿”이라 대답하는 일은 이른바 자식답지 못한 바를 (부모에게) 일삼는 일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응阿”이라 대답하는 일은 이른바 신하답지 못한 바를 (임금에게) 일삼는 일이다. 아우가 형에게 “응阿”이라 대답하는 일은 이른바 아우답지 못한 바를 (형에게) 일삼는 일이다.
其善惡相去, 眞天壤之判耳. 以明人心. 有一毫私欲, 之蔽. 則其端, 甚微, 其害, 遂大.
(따라서 “학문學” 중에서) 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잘 일삼는 바善와 잘 일삼지 못하는 바惡가 “서로 떨어진 정도”는 진실로 하늘과 땅이 (“서로” 떨어져) 갈리는 정도일 따름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잘 일삼는 “학문學”을 닦음으로써, 제19장이 일컬은 저절로 그러하게 “하얀 종이를 드러내는 바見素”이자, “통나무를 품어안는 바抱樸”로서, 일부러 일삼은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적으며少私”,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작은寡欲”) 사람의 (본래) 마음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잘 일삼지 못하는 “학문學”을 닦음으로써) 한 올의 가는 털만큼의 (일부러 일삼은) “사사로움”이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라도 가지게 되면, (이른바 사람의 본래 마음) 그것이 (일부러 일삼아 덮어) 가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실마리는 아주 작지만, 그 해로움은 아주 크기 때문이다.
此, 君子, 所以不得不以學爲憂也.
(요컨대) 이 문장은 “군자는 따라서 부득불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도道와) 학문學을 걱정거리로 삼는다(는 뜻이자, 군자는 따라서 부득불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와 학문學을 감히 일부러 일삼아 끊어내면 안 된다)”는 뜻이다.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이른바, 제19장이 일컬은 일부러 일삼은 성스러움, 지혜로움, 인仁, 의義, 기교, 이익, 그리고 일부러 일삼은 사사로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드문드문하고 듬성듬성한 바로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바, (그리고 학문을 닦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러나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빽빽하고 촘촘한 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어렴풋한 바, 멀어진 바, 거친 바이다. (그리고 도道)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끝점을) 다하는 바가 없는 (바,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의 끝점으로 더욱 나아갈수록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더욱 없는 바,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드문드문하고 듬성듬성하며 얇고 얕은 사람이 의지함으로써 충족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自其, 粗者. 而言之, 則衆人之所畏, 學者, 亦不可不畏, 如上章三者之文 令有所屬, 是也.
이른바, (“소所”) 이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드문드문하고 듬성듬성한 바이다. 따라서 (“소所”) 이것에 대해 말하면,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바”, 그리고 “학문學”을 닦는 사람이 이른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서, 이른바 제19장 “차삼자이위문부족此三者以爲文不足” (이전)의 “(일부러 일삼은) 성스러움聖”, “(일부러 일삼은) 지혜로움智”, “(일부러 일삼은) 인仁”, “(일부러 일삼은) 의義”, “(일부러 일삼은) 기교巧”, “(일부러 일삼은) 이익利”, 그리고 (제19장) “영유소속令有所屬” (이후)의 “(일부러 일삼은) 사사로움私”,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 그것이다.
自其, 精者. 而言之. 則道, 妙, 荒, 遠, 愈進愈未已. 不可以粗淺者, 據以爲足. 如首章以下所云, 是也.
이른바, (“기其”) 이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빽빽하고 촘촘한 바이다. 따라서 (“기其”) 이것에 대해 말하면, 이른바 (그것은) 도道로서, (제1장 “동위지현同謂之玄”)의 “현(玄;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거친 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멀어진 바,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끝점으로) 더욱 나아갈수록 더욱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일 따름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드문드문하고 듬성듬성하며 (얇고) 얕은 사람이 (그것을) 의지함으로써, (그것에) 충족되지 않을 수 없는 바(일 따름)이다. 이른바, (“기其” 이것은) 제1장 (“동위지현同謂之玄”) 이후가 일컫는 바(“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妙之門”), 그것이다.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乘乘兮若無所歸.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이름을) 즐거워하고 즐거워한다. 큰 접시에 소·양·돼지고기를 차려 제사를 지내는 듯, 마치 봄날에 누대를 오른 듯. (따라서) 나는 홀로 담담하다! 그 기미도 (가지는 바가) 없이. 어린아이 같은 바와 더불어 한다. 그 웃을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바와 더불어 한다! (잠시도 가만히 머무는 바로) 되돌아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듯한.
乘乘, 不住貌. 此, 言衆人, 皆自樂, 而我, 獨以學未至爲憂.
“승승乘乘”은 (잠시도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모양과 모습을 비유한다. 이 (두) 문장은 일컫는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이르는 바)를 즐길 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나는 홀로 (나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거리로 삼는다.”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이르는 바가) 남아도는 바를 가지며, 따라서 나는 홀로 이른바 (그것을) 떠나보낸다.
此, 言衆人, 皆自足, 而我, 獨以學未足爲憂.
이 (두) 문장은 일컫는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비유컨대 자신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이르는 바)를 만족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나는 홀로 (나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충족되지 못함을 걱정거리로 삼는다.”
我愚人之心也哉,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똑똑하고 똑똑한 사람의 마음이 되지만) 나는 (홀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 되며,
味衆人之所不味, 自笑, 且自喜也.
(“나”는 “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맛보지 못하는 바(所; 無爲·自然·道)를 맛본 채, 홀로 즐거워하며, 홀로 기뻐한다는 뜻이다.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若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忽若晦, 寂若無所止.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과 더불어 어우러지지만, 나는 홀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아우러진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밝아지고 밝아지지만, 나는 홀로 이른바 (그것에 대해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똑똑해지고 똑똑해지지만, 나만 홀로 (그것에 대해) 어리숙해지고 어리숙해지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커지고 또렷해지지만, 나만 홀로 그것에 대해) 작아지고 이른바 어렴풋해지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뚜렷해지고, 다다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하지만, 나는 홀로 그것에 대해) 어슴푸레해지고, 이른바 다다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한다.
沌, 如渾沌之沌也. 悶悶, 猶云憒憒. 此, 言衆人, 自以爲知, 而我, 獨以學未明爲憂.
“돈沌”은 어우러지고 “아우러진다”고 할 때의 “아우러진다”는 말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다. “민민悶悶”은 어리숙하다는 말과 뜻이 같으며, 어리숙한 모양과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요컨대) 이 (두) 문장은 일컫는다. “(따라서 이른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를 (밝게) 알아차려야 할 바로 삼으며, 따라서 나는 홀로 (이른바 나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에) 밝지 못함을 걱정거리로 삼는다.”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을 가지지만, 따라서 나는 홀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완고하고, (따라서 나는 홀로) 비루한 듯하며,
以, 爲也. 古者, 謂都, 爲美, 野, 爲鄙. 此, 言衆人, 皆有所爲, 而我, 獨於學潛心, 不知其他也.
“이以”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爲; 有爲)을 가리킨다. 옛날 사람들은 (잘 다듬은) 도읍(都邑; 都)을 아름다운 바로 여겼으며, (다듬지 않은) 들판을 “비루한 바”로 여겼다. 이 문장은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學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지만, 나는 홀로 (그러한) 학문學에 대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마음을 가라앉힌 채, 그 다른 학문(學; 他)을 (내가 일삼아야 할 학문學으로) 알아차리지 않는다.”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食, 音嗣.
(따라서) 나는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데, (음양陰陽·태극太極·무극無極이자 무위無爲·자연自然·도道로서, 비유컨대 만물에게 젖을) 먹여주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식食母의 식食은 사嗣와 같은 거성(去聲; 4聲)의 식(食; 먹이다)이다.
食母, 臨川吳氏, 以爲二字, 見禮記內訓篇, 卽乳母也. 萬物, 皆資陰陽而生. 則陰陽, 乃萬物之母也. 故曰, 食母也.
오징(吳澄, 1249~1333)은 이른바 일컬었다. “식모食母, (이) 두 글자는 『예기禮記』 「내훈편內訓篇」에서 보이는데, (그 뜻은) 이른바 (아이에게) 젖(을 먹여주는) 어미이다.” 만물은 모두 음陰·양陽을 말미암아 살아간다. 따라서 음陰·양陽은 이른바 만물의 “어미”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만물을) 먹여주는 어미食母.”
盖至此, 總結上文, 曰, 我之所貴, 異於人之所貴. 而貴陰陽. 載太極, 爲萬物. 之, 母也. 夫惟不貴人之貴, 然後方能貴天地之貴. 此, 老子, 示人, 入道之要旨也. 右第二十章.
덧붙여, (노자는) 이 문장에 이르러, 이 장(의 내용)을 총결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이렇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는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바와 다르다. 이른바, (나는) 음陰·양陽을 귀하게 여기는데, (내가 귀하게 여기는 음陰양陽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바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끝점에 다다른 바인) 태극(太極; 無爲)을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실은 채, 만물(의 생겨남과 자라남)을 일삼는다. (따라서 음陰·양陽) 그것은 (비유컨대 만물에게 젖을 먹여주는) 어미이다. 따라서 오로지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바(貴; 有爲)를 귀하게 여기지 않은 다음, 하늘과 땅이 귀하게 여기는 바(貴; 無爲)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노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요지要旨이며, (세상 사람들이 노자의) 도(道; 自然)로 들어가는 요체要諦이다. 여기까지가 제20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