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주위는 온통 회색빛이다. 해는 없고 비는 내리고 물안개에 쌓인 도시 풍경은 마음과 두뇌의 번잡함을 지운다. 지나온 날들의 이와 같았던 풍경이 어슴푸레하게 되살아난다. 비가 내려서 새로 생긴 물웅덩이를 참방거리며 걷던 작은 소녀였던 시절. 우산을 접고 쏟아지는 비를 그냥 맞으며 걷던 스무 살의 어떤 날. 변사체로 저수지에 떠오른 학우에게 달려가는 사람들을 걱정하던 어느 비 오는 날. 해는 없고 주위는 회색빛이고, 하늘은 계속 비를 뿌리던 날들, 날들.
비가 오는데 이불 빨래를 하는 나를 보고 딸이 묻는다. 엄마, 비 오는데? 내일은 해가 뜬다고 하지만. 그러니까, 지금 빨아서 널어놓으면 내일은 마르겠지. 아, 그런 거야? 어, 그런 거야. 내일은 해가 뜰까? 해가 떠서 이 축축한 이불을 쨍하니 말려줄까? 상관없다. 오늘 이불을 빨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마르겠지. 안 마르면 빨래방에 가서 말려야지. 오늘 해야 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 지금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오늘 할 일을 다 못했어도, 조금은 했고,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대로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 비가 내린다.
첫댓글 좀 참을성이 없으시네요. 말르는게 빠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나 싶은데...
ㅎㅎ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그렇겠네요, 말리는 게 더 중요하다면 빨래가 아니라 말래였겠죠.
@호미 하하하하. 그 다음날 햇볕에 잘 말라서 미리 빨래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