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 화요일
해파랑길 걷기 22일째. 새벽 4시 30분쯤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숙소에서 컵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엊그제 아침에 받아온 그 사과를 잘라서 반쪽만 천천히 먹었다. 반은 내일 아침에 일출을 보면서 먹기로 하고서….
7시 30분쯤에 숙소를 나서 궁촌항을 뒤로 하고 31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동막리를 지나가는 사래재를 오르면서 일출을 감상했다.
고개를 넘어 교가리에 도착했다. 카페를 검색하다가 '커피에 반하다'라는 이름에 반해서 찾아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40대 초반의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주 고운 모래로 덮힌 맹방해수욕장이 꽤 길게 놓여져 있었다.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북동풍이 거세지더니 해변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점점 엄청난 모래바람으로 변해갔다. 지나가는 차량이 날리는 모래에 가려져 금방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모래폭풍에 가까운 이런 바람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몰아치는 강풍을 뚫고 2.8km의 긴 맹방해변을 걷느라 고생을 좀 했다. 등에 7kg쯤 되는 짐을 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 가벼운 몸이 아마 강풍에 휘청거려 걷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리라.
삼척 맹방해수욕장을 지나고 마을로 들어와 양평해장국에서 점심을 먹으며 언 몸을 녹였다. 주인이 부산에서 음식점을 오래 하다가 온 분이라고 했는데, 무척 자상하였고 음식도 맛있었다. 맹방해변의 거센 모래바람이 유명하다는 말도 해줬다.
삼척시에 도착하여 오십천을 따라 걸었다. 죽서루를 돌아보고, 가까운 안경점을 찾아가 나사가 빠진 선글라스를 2,000원을 주고 수리하였다. 약국에 들러 근육통 치료 연고도 하나 샀다. 왼쪽 어깨 통증이 어제부터 생겼기 때문이다.
오십천을 따라 조성된 장미공원을 지나고, 이사부독도기념관에도 잠시 들렀다. 삼척항에 이르렀을 때 마침 2024년의 마지막 날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사부사자바위 바로 옆 해안가에 위치한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오래되어 낡은 시설의 모텔이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주변의 문을 연 음식점에 차례로 들렀는데 모두 주문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1인 손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새해 일출을 보려고 찾아온 2인 이상의 손님만 받는 모양이었다.
대여섯 군데 헛걸음일 친 끝에 한 곳에 들어가 곰칫국 1인분을 시켜 겨우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뒤늦게 소주 한 병을 주문해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깊이 빠져 있는 현재 지구상 대부분의 인간들은 때때로 특정 상황에서 이런 행태를 얼떨결에 나타내곤 하는 것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가 갈파한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새삼 뇌리를 스친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부도덕성의 평범성'이란 말도 우리 인간들에게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 정치적 활동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보이곤 하는 몹시 불합리해 보이는 행태와 소시민들이 일상 중 특별한 상황에서 드러내는 불합리하고 부도덕적인 행동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연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일까?
내일 아침에 새해 일출 광경을 기분 좋게 감상하기 위해 생각을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이었고 모텔 방값도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인 15만원이나 치렀으니까. 남은 한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내일이면 80세가 된다는 주인은 무척 자상하고 세심하고 건강한 분이셨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왔다.
400m 거리의 해안도로를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반짝이는 하늘의 별빛, 파도 소리와 하얀 물보라, 그리고 그런 시청각적 정보들과 공감각적인 느낌들이 소환해 내는 아련한 아름다운 옛 기억들이 내 마음을 안온하게 해줬다. 이런 내 사고체계가 고마웠다.
숙소에 돌아와 오늘 일정을 정리해 놓고, 빨래를 했다. 수건으로 어느 정도 물기를 빼고, 머리말리개 약온풍을 이용해서 반건조한 후 여기저기 걸쳐 놓았다.
어느새 11시가 넘었다. 파도소리가 크게 들린다. 지은 지 오래된 홑창 건물이라 더 그런 거 같다. 파도가 센 걸 보니 내일 아침 날씨는 일출 보기에 좋은 거 같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