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其政悶悶, 其民醇醇,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所倚, 福兮禍所伏, 孰知其極. 其無正耶. 正復爲奇, 善復爲訞, 民之迷, 其日固已久矣.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耀.
그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르른) 다스림은 (백성의 유위에 대해) 어두워지고 어두워지지만, 그 백성(의 성性·명命)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무위가 저절로 그러하게) 진해지고 진해지며, 그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르지 못한) 다스림은 (백성의 유위에 대해) 밝아지고 밝아지지만, 그 백성(의 성性·명命)은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한 본래의 모습을 지키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아) 무너지고 무너진다. (이른바) 화禍, 복福이 (저절로 그러하게 한 켠을) 의지하는 바! 복福, 화禍가 (저절로 그러하게 가운데) 엎드려 있는 바! 누가 아는가? (아주 먼 옛날, 그러했던 성인의 다스림) 그것이 이르른 (무위의) 끝점을. (아주 먼 옛날, 그러했던 성인의 다스림) 그것은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아) 달라지는 바를 일삼고 되돌이키며, (일부러 일삼아) 잘하게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아) 어긋나는 바를 일삼고 되돌이키는데,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유위로) 치우치게 된, 그 날이 따라서 오래되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성인은 반듯하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지 않고, 모나게 하고 각지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갈아내거나 깎아내지 않으며, 곧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바루고 펴지 않고, 빛나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번쩍이게 하지 않는 (것이)다.
悶悶, 不快之意. 至德之政, 不抉擿以爲明, 不擊斷以爲嚴. 躬行於內, 而去其甚害於民者而已. 其, 始也.
민민悶悶은 (유위有爲에 대해 어두워지고 어두워진다는 말로서, 유위有爲를) 기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덕스러움(德; 無爲)에 이르른 다스림은 (백성의 유위有爲를 일부러 일삼아) 도려내고, 들추어내는 바로써, (백성이 무위無爲에 대해) 밝아지게 하는 바를 일삼는 바도 아니고, (백성이 일부러 일삼아 유위有爲와 더불어) 부딪치게 하고, 잘라내게 하는 바로써, (백성이 무위無爲에 대해) 엄격해지게 하는 바를 일삼는 바도 아니다.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르른 다스림은 백성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안(內; 性·命)을 (저절로 그러하게) 몸소 일삼게 하고, 그 백성을 심하게 해치는 바(害; 有爲)를 (저절로 그러하게) 떠나보내게 하는 바일 따름이다. (따라서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르른 다스림)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바들을) 비롯되게 한다.
固未有赫然近功. 可以快人耳目者. 然其, 久也. 則民, 安於無事. 而忘其機智巧利之萌. 蓋與之, 俱化. 而不自知矣.
따라서 (백성은 일부러 일삼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공능(功能; 功)을 갑자기 가까이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귀로 들은 바와 눈으로 본 바를 즐겁게 여기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 가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편안하게 여기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그 (일부러 일삼은) 대응, 지혜, 재주, 이익의 싹을 틔우는 바를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 그것을 더불어 하게 되고, (그것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자신이 그렇게 된 까닭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察察者, 反是. 缺缺, 不完也. 謂隳其樸也.
찰찰察察은 (민민悶悶과) 반대로 한다는 말이다. 결결缺缺은 (본래의 모습을 지키는) 일을 끝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투박한 바(樸; 性命)를 (일부러 일삼아) 무너뜨리게 된다는 뜻이다.
吳幼淸曰, 人, 以爲禍. 而福, 倚於禍之傍. 人, 以爲福, 而禍, 伏於福之中. 譬悶悶之政, 而有醇醇之民. 察察之政, 而有缺缺之民也.
(중국 원元나라 때) 오징(吳澄, 1249~1333)은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 제49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르지 못한) 임금은 화禍를 일부러 일삼게 된다. 복福이 화禍의 한 켠을 의지하는 바임에도. (덕스러움德·無爲에 이른) 임금은 복福을 일삼게 된다. 화禍는 복福의 가운데 엎드려 있는 바이기에. 비유컨대, (따라서 백성의 유위有爲에 대해)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는 다스림은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성性·명命이 저절로 그러하게) 진해지고 진해지는 백성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백성의 유위有爲에 대해) 밝아지고 밝아지는 다스림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성性·명命이 일부러 일삼아) 무너지고 무너지는 백성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愚謂. 此四句, 意, 屬上章. 自禍兮以下, 又別. 是, 一意也.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기정민민其政悶悶~기민결결其民缺缺) 이 네 문장은 뜻이 앞 (제57)장(의 뜻,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의 다스림의 모습)을 잇는다. 그러나 화혜복소의禍兮福所倚 이하는 (뜻이) 다르다. (이른바, 지금 세상의 성인의 다스림의 모습을 뜻하는 화혜복소의禍兮福所倚 이하) 이것은 (앞 네 문장과 다른) 하나(의 문단)이다.”
極, 至也, 謂其, 終所至也. 正, 猶黃帝, 正名百物之正, 對變而言者也. 奇, 變也. 訞, 邪也, 善之反也.
극極은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의 다스림, 그것이 끝점에) 이르른 바를 뜻한다. 그것이 이르는 바를 마친 바를 뜻한다. 정正은 (『예기禮記』 「제법祭法」이 일컬은) “(아주 먼 옛날, 무위無爲가 끝점에 이른) 황제黃帝는 (유위有爲한)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하고, 사물을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불렀(는데, 따라서 유위有爲한 백성이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밝은 백성이 되었고, 사물이 저절로 그러하게 백성과 더불어 하는 재화가 되었)다”라고 할 때의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한다”는 말로서, (저절로 그러하게) 달라지는 바(變; 無爲)를 마주하는 그러한 말이다. 기奇는 (일부러 일삼아) 달라지는 바(變; 有爲)를 뜻한다. 요訞는 (일부러 일삼아) 어긋나게 된다는 말로서, (저절로 그러하게) 잘한다(는 말)의 반대(말)이다.
言禍, 不正. 於禍, 而福, 倚焉. 福, 不正. 於福, 而禍, 伏焉.
이른바, 화禍는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화禍는 복福이 (저절로 그러하게 자신의 한 켠을)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복福은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복福은 화禍가 (저절로 그러하게 자신의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然則其, 將無禍福之正者耶. 民之, 所謂正者, 未必不復歸於變. 民之, 所謂善者, 未必不復歸於邪. 民之, 迷於眞僞, 有如是者. 則其, 所謂禍福, 固亦非眞禍福也.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 그는 화禍와 복福을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이른바 일컫는다. “(일부러 일삼아) 바르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달라지는 바를 되돌이키고, (그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이른바 일컫는다. “(일부러 일삼아) 잘하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어긋나는 바를 되돌이키고, (그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비유컨대) 참 또는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치우친 사람들이자, 그것을 가지는 바가 있고, 그것과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른바 일컫는다. “화禍와 복福은 참된 화禍와 복福이 아니다.
蓋以得爲福者, 其得也, 必有失. 以榮爲福者, 其榮也, 必有辱. 是, 固禍,福之所伏也. 聖人, 則不然. 其, 所謂福者, 無爲而已. 則終身, 不求福. 而亦終身, 不及於禍矣. 其, 所謂善者, 無爲而已. 則人, 不見其, 爲善. 而亦終, 不復爲訞矣.
이른바, 복福을 일부러 일삼아 얻는 사람은 그 얻은 바가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잃어버려지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복福을 일부러 일삼아 빛나게 하는 사람은 그 빛나는 바가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욕되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이것이 “화禍는 복福이 (저절로 그러하게 자신의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바이다”(라는 말의 뜻이다). (지금 세상의) 성인은 따라서 그렇게 일컫지 않는다. 그는 이른바 일컫는다. “복福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할 바일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몸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복福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몸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화禍에 이르지 않게 된다. (또한) 그는 이른바 일컫는다. “잘하게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할 바일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그가 잘하게 하는 바를 일삼는 바를 살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끝끝내 (잘하게 하는 바가 무위無爲를) 어긋나는 바를 일삼는 바를 되돌이키지 않게 된다.
廉, 稜隅也. 劌, 磨削也. 肆, 直遂也. 方之割, 廉之劌, 直之肆, 光之耀, 皆其, 用也. 然肆, 其直者, 必有時, 而折. 耀, 其光者, 必有時, 而滅. 割且劌者, 固必有所傷.
염廉은 모나게 하고 각지게 한다는 말이다. 귀劌는 (일부러 일삼아) 갈아내고 깎아낸다는 말이다. 사肆는 (일부러 일삼아) 바루고 편다는 말이다. (어떤 이가) 반듯하게 하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며, 모나게 하고 각지게 하면서 (일부러 일삼아) 갈아내고 깎아내며, 곧게 하면서 (일부러 일삼아) 바루고 펴며, 빛나게 하면서 (일부러) 번쩍이게 한다는 것은 모두 그가 일부러 일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바루어지고 펴진, 그 곧은 바는 반드시 (그) 때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 꺾여지게 되는.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번쩍여진, 그 빛남은 반드시 (그) 때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 사그라들게 되는.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뉘고 갈리며, (일부러 일삼아) 갈아 내어지고 깎아 내어진 바는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此, 善之, 所以復爲訞也. 唯聖人, 全其德, 而藏其明. 此, 所以一於善. 而能長有其福也.
(요컨대) 이것이 (지금 세상의 임금이) 잘하게 하는 바가 (무위無爲를) 어긋나는 바를 일삼는 바를 되돌이키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성인은 그 덕스러움(德; 無爲)을 오롯하게 하도록 하고, 그 밝음을 감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지금 세상의 성인이) 잘하게 하는 바를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되게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임금은) 그 복福을 가지는 바가 있는 바를 오래 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