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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흥관광(高興觀光)은 고흥반도의 서쪽 지역의 다음 코스로 여행할 계획이다.
고흥만/방조제---(차, 30분/20.7km)---녹동항/ 음식거리---(13분/6km)--소록도/중앙공원--한샘 병 박물관--(3.97km)--거금도/생태숲
이 여행 중에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국내 여행지의 하나'라는 소록도(小麓島)에 가면 거기서 꼭 만나보고 싶은 세 사람이 있다.
일제 강압기 시절 Hansen병에 걸린 총각으로 강제로 단종대에서 정관 수술하며 그 절망을 시로 호소하던 청년이 그 하나요,
다음은 Hansen병 환자를 돕겠다고 간호학교를 나온 오스트리아 두분 수녀가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봉사로 40년 동안이나 이국 땅 소록도에서 청춘을 불사르다가 할머니 나이 될 때까지 봉사하다가 말없이 홀연히 어느 날 새벽에 떠나간 마리안느, 마가렛 두 수녀가 만나고 싶은 두 번째 사람이다.
그 소록도를 보려고 어제 여수를 거쳐서 녹동항을 구경하고 팬션에서 1박을 한 후 소록대교를 건너다가 안타깝게도 그냥 소록도를 지나 쳐 가야만 했다.
Corona19로 인하여 청정지역 소록도도 당분간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냥 지나칠 수만 있으랴. 수도권에서 천리길을 달려 온 아내의 망구순(望九旬)의 생세일(生世日) 기념 가족 여행인데-. 이 아비를 여행작가라고 믿고 온 자식들인데-.
나는 30여 년 전에 아내와 소록도에 가서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단종대(斷種臺)와 검시실, 감금실을 구경한 적이 있다.
하여 나의 옛날 기억에다가 유튜브 등을 참고로 기억을 되살려 이 글을 쓰고 있다.
소록도에 가서 내가 보고 싶은 세 사람 중에 그 하나는 일본 강압기 시절 단종대(斷種臺)에 누워 강제 정관수술을 당하며 울부짖던 25살의 Hansen병 환자 총각이요, 나머지 두 사람은 평생을 문둥병에 맞서 소록도 나병 환자 병구완에 평생을 바친 오스트리아 마리안느(71)와 마가렛(70) 수녀 간호사들이다.
문둥병은 이름도 많다. 나병(癩病), 천형병(天刑病), 풍병(風病), Hansen병등. 그중 오늘날에 흔히 쓰고 있는 Hansen병이란 무슨 뜻일까?
세계 최초로 문둥병의 그 병원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Hansen184~1918)이란 이름을 따서 문둥병을 Hansen병이라 하였다. 문둥병이란 선입감이 무섭고 두려운 이름이라서 이를 정화 차원에서 문둥명을 한센(Hansen) 병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인류는 기원 전부터 Hansen병을 고칠 수 없는 전염병이나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왔다.
Hansen병에 걸리면 주로 말초 신경과 피부에 병변이 생겨서 안면과 손발, 고환 등 신체의 일부가 썩어 떨어져 나가 흉측한 외모를 만드는 무서운 병 중에 병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문둥병은 환자와 접촉만으로도 쉽게 감염되는 불치의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생각하여 왔다.
오늘날 코로나 19처럼 당시는 치유할 백신이 없던 시절인 데다가, Hansen병균에 감염되고 나서 발병할 때까지의 잠복기가 2년부터 40년 정도로 길어서,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감염했는지 몰라 사람들은 유전병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를 보통의 환자가 아닌 모두가 혐오하는 관리, 통제, 격리(隔離)의 대상으로 보고, 일제는 Hansen병 환자들을 한데 모아 격리 수용할 수 있는 마땅한 곳으로 소록도를 찾았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이요, 물이 풍부하며, 기후가 온화한 섬으로 소록도(小麓島)가 그 조건에 딱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소록도에 세운 나병 전문 병원인 자혜의원(慈惠醫院)은 1916년에 개원하여 다음 해부터 전국의 나병환자를 강제로 수용하기 시작하여 당시에는 Hansen병 환자 약 700명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 재원은 일본 황실의 은사금(恩賜金)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조선인을 위해서라기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영원한 속국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기 시작하여, 소록도 주민이 1941년에는 6천 명이나 되었지만 지금은 전력이 있거나 치료 받아야 햘 환자 6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당시의 의학상식으로는 Hansen병은 유전병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Hansen병 환자의 자식을 못 낳게 강제로라도 단종수술(斷種手術)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드디어 셀폰제 치료약인 백신이 나온 후 1983년 이후에는 완치의 병이 되었다. 드디어 Hansen병 백신으로 Hansen병을 완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思春期)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단종대(斷種臺)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痛哭)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孫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精管)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局部)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繁盛)하라던
신(神)의 섭리(攝理)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地下)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痛哭)한다.
-25세 총각 이 동
이 시를 몸으로 쓴 지은이는 25의 젊은 나이로 단종대(斷種臺)에 올라 Hansen병 환자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강제로 정관수술(精管手術)을 당해야 했던 숙명의 젊은이다.
이런 만행은 ‘Hansen병 환자들에 대한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해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이라는 '보건사회부 전염병 예방법'에 의거 단종 수술대에 오른 것인데 이런 정관수술은 해방 후 1949~1958년까지 계속되어 총 1,191 건의 수술을 강행하였다.
*. 수탄장(愁嘆場)
소록도는 두 지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한센환자들의 거주지인 국립소록도병원 지역이요, 또 한 지역은 그 의료인들의 거주하는 객사(客舍) 지역이다.
환자들에게도 가족이 있는 법이다. 그 가족들에게도 Hansen병 전염을 우려해서 어린 자식들은 어쩔 수 없이 5살까지는 부모가 키우다가도 그 이후에는 가족과 헤어져 의료 직원 객사 지대(客舍) 쪽에 자리한 '미감아(未感兒) 보육소'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미감아 자식들과는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나게 하였다.
한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눈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만남이었다. 만약의 경우의 안전을 위해서 자식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그 반대 위치에 주욱 서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였으니 이는 통곡의 벽이요 통곡의 바다였다.
이곳을 일컬어 근심 '수(愁)', 탄식할 '탄(嘆)' '수탄장(愁嘆場)'이라 하였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인가. 우리가 듣기만 해도 눈물이 앞선다.
*. 간호사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
두 번째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마리안느(현 87세), 마가렛 수녀다.
일반인도 가볼 수 있는 소록도 중앙공원에는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근처에 ‘세마(3M) 공적비’가 있다.
1960년대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보기 위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는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나라인 Korea에 처녀의 몸으로 자원봉사하겠다고, 낯 설고 물 설은 머나먼 이국 땅 오스트리아에서 소록도에 자원봉사 수녀로 왔다.
마침 고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딴 간호사 수녀였다.
이 공적비는 두 수녀님들이 소록도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처녀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아름다운 희생의 봉사의 삶을 산 세 분의 수녀들을 노고를 기리는 공적비다.
'세마(3M) 공적비’라고 한 것은 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 세 사람의 이름이 ‘마’로 시작한다고 해서 '세마(3M마) 공적비'라고 한 것이다. 둘이 아닌 셋인 것은 내가 모르던 또한 분의 천사 마리아 수녀가 더 있던 것이다.
이 세 수녀님들은 한셈 환자들의 돌봄은 물론 열악하던 당시 한국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여 고국 오스트리아에 지원 물자를 신청하여 받아 물질적인 봉사에도 힘썼다. 그뿐인가. 1962년부터 '소록 영아원' 운영, '물리치료실', '이동 치료실', '음성 나환자 정착사업'등을 말없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것이다.
그보다 더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두 수녀의 이별이었다.
2005년 11월 21일 이른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마리안느와 마가 펫 두 수녀는 처녀 시절에 들고 왔던 낡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말없이 고국으로 훌쩍 떠나 가버렸다. 간단한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지금 우리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어서 우리들이 있는 것이 오히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송별식을.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되고, 헤어지는 아픔을 줄까 봐 소리 없이 조용히 떠납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희 외국인에게 보내준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과 존경에 감사 말씀드립니다. 부디 주안에서 건강하고 햏복하소서.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 올림' '
이런 내용의 간단한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빈 손으로 소록도를 떠나간 것이다.
들어온 자리보다 떠난 자리가 더욱 허전하다는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기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고마운 이런 천사를 허무하게 떠나보낸 당시 Hansen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서운함에 울부짖으며 그동안 천사와 같은 수녀와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칭송했을까?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운 '세마(3M) 공적비’는 이러한 두 수녀님의 고귀한 잊지 못할 사랑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2년 조창원 국립 나 병원장이 세운 것이다.
나라에서도 이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1996년의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고, 40년여 연간 머물었던 집을 등록문화제 제660호로 지정하여 두 천사 같은 수녀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였다. 일각에서는 노벨 평화상에 천거해야 할 분들이라는 의견도 분분하지만 이 두 수녀들은 선행이 두루 알려지기를 극구 샤양하고 있다.
봉사(奉仕)란 무엇인가. 남을 조건없이 돕는 일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희생이자 삶의 목적이다. 그보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큰 사랑이 아닌가. 메스컴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호의 손길을 청하지만 우리들이 이를 외면하게 되는 것은 봉사가 1회성에 그지치 않고 한 달이나 일 년도 더 계속해야 하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봉사란 내가 나를 위해 써야 할 시간과 재물과 사랑을 남을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인데 이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평생을 봉사에 바친다는 것은 성인의 경지 같다.
오늘 (2021. 6. 8) 조선일보에 우리의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 수녀(87세)가 간호사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런 제 48회 플로렌스 나이팅 게일 기장(紀念章)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소록도의 영광이요, 한국의 영광의 귀한 소식으로 Korea 국민전체가 환영할 일이다. 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 수녀 만세! 만세!다.
그렇게 가보고 싶던 소록도를 그냥 지나쳐 나로도를 향하고 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운 것은 나의 나이가 우리나라 5천만 인구 중에 5%만이 살고 있다는 90이 가까워 오는 세월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81세 망구순 생세일을 맞은 아내의 소원대로 나로항을 향하고 있다. 그 건너 편의 '쑥섬'을 가기 위해서다. -2021. 6. 8
첫댓글 저도 백세가 넘으신 장모님 모시고, 고흥 나로도도 구경하고 소록도도 구경하고 왔습니다.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일만 성철용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