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문학의 스승, 어린시절 12년은 120년과 맞먹는 삶
1953년 10월 18일 강원도 정선군 골지리(문래리)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6년 동안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니까 1953에서 1964년까지 12년 동안을 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고향 마을 12년의 생활은 귀하고도 값진 120년의 삶과도 맞먹는 삶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비밀의 회원 같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 무섭고 엄격한 아버님 밑에서 살았지만 끝 없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 속에 지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외할머니와 이모님들의 사랑도 지극하였다. 동네 어른들의 인심도 따스한 햇살처럼 정겨웠다, 이 모든 것이 나로하여금 고향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12년의 고향 살이는 내 문학의 원천이며 문학의 으뜸 가는 스승이기도 했다.
1975년, 을묘년! 나는 ‘아, 이거구나!’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정신의 탈출구 ‘문학’을 향하여 창작의 불씨를 지폈다.
우울했던 내 정신의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1975년 3월 처음 쓴 작품은 시조였다.
3월, 봄빛이 지붕위의 눈을 녹이고 있다. 조록조록 낙숫물이 떨어지고 흙 담장 밑은 햇볕이 내려앉아 자리를 틀었다. 온산의 눈들이 몰래 물기를 흘러 보내는 봄날의 한나절이었다.
햇빛과 낙숫물 하얀 눈, 흙 담장, 이런 사물들을 떠올리니 행복했다. 옛날 봄이 찾아오는 고향의 마을이었다. 싱싱한 과일을 앞에 놓은 듯 싱그러운 기운이 내 몸 속을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옥 토독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서 봄은 자리 트는가.
- 늦겨울 아침
시상이 떠오르고 한수를 써내려갔다. 샘터지에 시조 작품을 투고하였다.
4월이 끝나갈 무렵 샘터사로부터 책을 한 권 받았다. 샘터 5월호였다. 거기에 내 작품 ‘늦겨울아침’이 게재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원고료도 받았다.
이 작품을 춘천에서 보고 반가와 소식을 전해준 여인이 있었으니 지금의 아내가 된 김정자 여사, 소라 엄마이다. 결혼 후에 대순이와 소라 두 아이를 낳았지만 딸 아이 이름이 예뻐서 소라 엄마라고 자주 불렀다. 부드러운 느낌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 해 여름 아내가 처음 보는 나를 만나러 친구와 내려왔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오자마자 식사준비도 하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도 썼다. 1975년 처음 써 본 작품이 ‘호수’였다.
호 수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울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 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 마다
방글
해님 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강원아동문학 제3집. 1975)
위의 작품을 75년 강원아동문학 3집에 수록되었다. 문학지에 게재된 첫 작품이었다. 이 동시를 쓸 때에는 경포의 호수를 떠올렸다. 호수 속에 거꾸로 잠긴 물상들이 보였다. 여기에 상상력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자라고 싶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호숫가에 서 있는 나무들로 여겼고 그 모습을 그대로 거울처럼 보여주는 호수는 인자한 선생님이나 어머니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강원아동문학회의 가입은 최도규 선생님 덕분이었다.
당시 교육전문 잡지 ‘교육자료’와 ‘새교실’이 있었는데 유명한 시인께서 시평과 함께 문예작품을 뽑아 추천을 하였다.
나는 그걸 읽으며 문학 공부를 했다. 1년 내내 투고를 하였다. 작품을 보내고 나서는 내 작품이 추천되어 작품이 활자화되어 나오는 상상에 늘 빠졌다. 기다릴 때마다 찾아오는 것은 실망 뿐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내가 될 소라 엄마를 데리고 최도규 형을 따라 정선의 어느 시골마을에 갔다. 아주 퇴락한 시골집인데 젊은 새댁이 늙은 시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정도 되었는데, 18살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농촌에서 일을 하여 얼굴이 타고 꾀죄죄하여 안쓰러워 보였다. 젊은 새댁과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보면서 늦도록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에 총총총 별이 유난히도 빛났다. 고향 마을의 밤에 멍석에 누워 보던 별처럼 아름다웠다.
황지 화전초등학교 관사에 돌아와 ‘여름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작품이 되지 않았다. 쓰고 지우고 쓰고 버리고 무수히 파지가 생겼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제법 그럴 듯하게 된 것 같아 ‘교육자료’지에 투고하였다. 아마 10월 말 쯤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는 추천이 되지 않아 무능한 재주를 탓하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1975년, 지금 생각해 보니 평생의 반려가 될 아내를 알게 되었으니 가히 나쁜 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참 힘들었던 해였다.
‘산사’라는 단시조도 썼다.
山寺
남진원
태고적 님의 자태
고요 속에 심어두고
목탁에 옥 굴리며
몸 헹구는 독경소리
빈 세월
마음 바늘로
빛을 깁는 산사여
(1975년 작)
이 작품을 토대로 동요 한 편을 2015년 10월에 썼다.
- 산사가 좋아요
남진원
고요한 산속
푸른 숲 사이로 걸어가면
목탁소리 또그르르
맑은 친구 얼굴처럼 달려 나오는 곳
아름다운 산사
스님의 독경소리 낭랑히 번지는
산사가 좋아요. 산사가 좋아요.
번잡한 도시 속
발걸음 뒤로 하고 찾아가면
범종소리 댕그러엉
우리 엄마 숨결처럼 평화로운 곳
아름다운 산사
법당의 부처님이 빙그레 웃음 짓는
산사가 좋아요 산사가 좋아요.
- 2015년 솔바람 회지에 발표 -
1975년 내 문학의 스승, 윤일광, 김사웅 시인의 작품들
「교육자료」에서 추천 1회를 받은 윤일광의 동시 ‘아가의 나이’는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아가에게 몇 살이냐고 물을 때, 아가는 대답대신 주먹손을 펴 보인다. 아기가 펴 보이는 손은 얼마나 귀여운가? 엄마 등에 업힌 채 아가가 펴 보이는 손은 천사의 손보다도 아름다울 것 같다고 여겼다. 윤일광 선생님의 동시를 읽으며 아가의 천진한 모습과 손이 눈에 어른거렸다. 가장 즐거운 상상이었다.
1975년을 전후하여, 윤일광 시인이 경남 거제 하청국민학교에 계실 때 「교육자료」에 추천 받은 작품이다. 아기의 귀여운 손을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한 작품은 보기 드물다.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손을 펴 보이는 아기의 귀여운 조막손과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 하였다.
아기 손을 나무 잎사귀라 생각한 점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 아기 손가락을 빨간 고추잠자리라 여긴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신선한 감각에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다. 특히 대화법을 사용한 점은 동시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아가 손 – 단풍 잎사귀
아가 손 – 빨간 고추잠자리
아가 손 – 별
이런 대비가 아주 적절하여 오늘도 읽으며 미소를 짓는다.
내 문학의 스승이었다.
‘꼬가신 기다리며’는 김사웅 선생님이 대구 내당국민학교에 계실 때 추천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다. 고향마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장이 섰다. 5일마다 마을 어른들은 장을 보러가셨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귀하였기에 대부분 30리길을 걸어서 임계장을 다녀왔다. 하얀 고무신을 사오셨을 때엔 얼마나 기뻤는지….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김사웅 선생님의 동시 ‘꼬까신 기다리며’를 읽으면 어릴 때 장에 가신 어른들을 기다리던 일이 그리움처럼 떠오른다. 이 동시는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어서 더욱 정이 간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어릴 때의 일이, 행복했던 것을 깨달았다.
위의 작품에서 어린이는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가 꼬까신을 사가지고 오실 거라는 희망을 갖고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날은 어두워지고 문풍지가 떨리도록 바람이 분다. 아마 늦가을이나 초겨울인 것 같다. 어린이는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꼬까신 꿈을 꾸며 잠이 든다.
아마 아이는 엄마가 사 온 꼬까신을 신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스물 세살, 윤일광 선생님의 ‘아가의 나이’, 김사웅선생님의 ‘꼬까신 기다리며’ 등의 시를 공부하며 문학의 꿈을 다졌다.
김현승 시인은 「교육자료」인가 「새교실」인가의 시평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사실을 그대로 나태내는 글은 시가 되기 힘들다고 하며 ‘들판을 걷는 마음’이란 작품을 예로 들었다. 나는 그 작품과 해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닿는 부분이 컸다. 사실의 아름다운 기록은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친 기교도 금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노원호시인은 추천완료를 받고 천료소감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며 시를 쓰기도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글을 쓰기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천료소감을 쓰신 노원호 선생은 한국동시문학회 회장을 지내고 「새싹문학」을 운영을 맡기도 했다. 「새싹문학」은 전에 윤석중 선생이 만들어온 아동 문학 전문잡지였다.
그 후 노원호 시인의 동시 ‘바다를 담은 일기장’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는데 그 작품 또한 내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교육자료」에서 선평을 맡은 이석현 시인의 선평 또한 눈을 새롭게 뜨게 한 글들이었다.
시인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말은 시를 쓰는 지금도 꼭 필요한 구절이다.
그러면서 김학선 시인의 작품 ‘군창터에서’를 추천하며 매우 우수작이라고 평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그 작품을 읽으며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작품을 뽑을 수 있는 뛰어난 시인과 그 작품을 쓴 김학선 시인이 존경스러웠다.